<뉴스앤조이>는 변영권 목사의 '애니의 위대한 질문'[이 제목은 고전문헌학자 배철현 교수(서울대 종교학과) 저서 <신의 위대한 질문>(21세기북스)에 대한 변영권 목사의 오마주입니다]을 격주로 6차례 연재합니다. 연재 칼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인터뷰 기사(바로 가기)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편집자 주

애니메이션(애니)에도 다양한 장르가 있습니다. 저는 딱히 장르를 따지지는 않지만 마법이나 판타지 장르를 좋아하는 편입니다. 특히 타입문(TYPE-MOON)에서 나온 '페이트' 시리즈는 정말 좋아합니다. 그런데 일본 애니는 모든 것을 '여성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앞서 말한 '페이트'의 주인공 세이버는 전설의 기사 왕인 아서왕(King Arthur)의 영령(英靈)인데, 그가 실제로는 여성이었다는 설정이지요.

최근에는 아서왕이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 같은 역사 인물뿐 아니라, 거대 로봇들('로봇 걸즈')이나 전함('칸코레')을 여성으로 그리는 애니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조금 다른 표현으로 '모에화'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애니의 주 소비층이 남자들이기 때문이겠지요. 단순히 취미로 보는 애니메이션에 지나치게 의미나 해석을 부여하는 것도 조금 어색하지만, 우리가 즐기는 대중문화에 여성을 상품화하는 시각이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도 꼭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성화 애니 중 '푸른 강철의 아르페지오'(蒼き鋼のアルペジオ, 2013)가 있습니다. 극장판으로 2편이나 나올 정도로 성공한 시리즈인데요. 평소 밀리터리 장르를 보지 않는 저도 굉장히 재미있게 본 애니입니다(애니는 원작 만화와 다른 오리지널 결말이라고 합니다). 다른 여성화 애니메이션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이 작품에서는 군함 자체를 여성으로 그리지 않고 여성형 인공지능 '멘탈 모델'이 '나노 마테리얼'이라는 물질로 각종 군함을 만들어 움직이게 한다는 점입니다. 멘탈 모델 타카오가 주인공 치하야 군조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장면 말고는 선정적 묘사가 없어서 초등학생 딸들과 보기에도 부담이 없었습니다(*이 뒤로는 '푸른 강철의 아르페지오' TV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주인공 치하야 군조(위)와 이오나(아래). '푸른 강철의 아르페지오' 홈페이지 갈무리

간단히 줄거리를 소개하면, 어느 미래에 갑자기 정체불명의 군함들('안개의 함대'라고 부르는 집단)이 지구상의 모든 바다를 장악하고 통신을 마비시킵니다. 그들의 첨단 기술 앞에서 각국의 군대는 괴멸하게 됩니다. 그들과 싸우기 위해 해군사관학교를 다니던 주인공 치하야 군조 앞에 안개의 함대 측 잠수함 401과 그 멘탈 모델 이오나가 나타납니다. 이오나는 치하야 군조를 함장으로, 그의 인간 동료들을 승무원으로 세우고 안개의 함대와 인간들 사이에서 싸우게 됩니다.

차례로 만나는 안개의 함대 전함들은 '어드미럴리티 코드'라는 명령에 의해 움직입니다. 그 핵심은 멘탈 모델이라는 소녀 모습을 한 인공지능 프로그램입니다. 치하야 군조가 이끄는 401 잠수함과 이오나는 안개의 함대 전함들을 차례로 격파합니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안개의 함대 멘탈 모델들은 하나씩 치하야 군조의 동료가 됩니다. 싸운 뒤 친구가 되어 동료가 늘어 가는 애니의 전형적 패턴이지요. 인공지능이다 보니 자신들의 프로그램을 뛰어넘는 인간과의 만남으로 사고에 변화가 생기고, 어드미럴리티 코드라는 내적 통제에서 벗어나 스스로 '푸른 강철'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군함 전투 애니답게 최종 보스가 있습니다. 여왕님 스타일의 멘탈 모델 '콘고'(물론 저는 극장판에 나오는 '안개의 학생회' 소속 멘탈 모델 히에이를 좋아합니다)인데, 안개의 제1함대 기함입니다. 자신의 부하 군함들이 하나씩 전선에서 이탈해 군조의 편이 되자, 군조를 향한 분노와 집착이 극심해집니다. 이상을 감지한 안개의 함대 측에서 콘고를 격리하지만, 콘고는 군조와 401을 격침하려는 일념으로 탈출해 푸른 강철과 싸웁니다.

안개의 함대 측 군함. '푸른 강철의 아르페지오' 홈페이지 갈무리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예수와 만난 사람들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 구약성서까지 포함하면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익숙했던 자신의 삶과 전통, 규율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길을 걸었습니다. 편의상 단순한 도식으로 표현하자면, 유대교가 율법과 율법 준수를 강조한다면(물론 '새관점'에서는 달리 봅니다), 예수를 통해 시작된 새로운 운동은 성령으로 인한 내적 기쁨과 충만, 그리고 자율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예수와 수가성 여인의 대화가 나옵니다. 그 여인은 예수에게 말합니다.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가 대답합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아버지께,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중략)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이 산도, 저 산도 아니고, 사마리아 전통도, 유대 전통도 아니고, 나의 삶과 존재 전부가 신을 따르는 것이 진정한 예배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을 저는 '자율'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외부의 규율이 아닌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형상에 따라서, 내주하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신학자인 돈 큐핏(Don Cupitt, 1934~)은 <떠나보낸 하느님>(한국기독교연구소) 서문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생의 한계를 체념한 채 받아들이고, 하느님과 전통에 수동적으로 복종하며 살아가는 삶은 도덕적 삶이라고 할 가치가 없다. 심지어 선하신 하느님을 향한 복종이라 해도, 맹목적인 복종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명령이 선하기 때문에 선하신 하느님께 복종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하느님의 명령이 본래적으로 선하며 행위의 원리로서 받아들일 가치가 있다고 스스로, 자유로이, 그리고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복종할 때, 그래서 하느님이 명령을 했건 하지 않았건 상관없이, 자유로이 그 명령을 받아들이고 복종하고자 선택할 때에만 나의 복종이 가치 있는 것이다." (<떠나보낸 하느님>, 21쪽)

규율과 복종, 강요된 의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헌신이 아닌 완전한 '자율'의 신앙이 가능할까요. 문제는 그와 같은 타율에서 벗어나며 시작한 예수의 운동(기독교)가 또다시 타율적 종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 종교개혁 500주년이 된 지금의 개신교는 교리와 전통, 편협한 구시대적 가치관에 복종하는 것을 신앙의 전부처럼 가르치고 있습니다. 새로운 문화, 과학적 사고, 인류 보편적 가치의 발전을 '교리'라는 이름으로 반대하고 거부하고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교리나 문자적 성서 해석에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착각합니다. 종교 행위들(예배·헌금·봉사) 등을 규칙적으로 하는 것에서 안전감을 느끼고 만족해 버립니다. 자신들이 믿는 교리들, 자신의 종교적 열정 같은 것들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스스로 묻지 않기 때문에 결국 아무런 답도 찾지 못한 채 철저히 타율화된 신앙생활 속에서 살아갈 뿐입니다.

마치 콘고가 자신이 절대명령이라 믿고 따라온 어드미럴리티 코드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 타카오나 하루나, 키리시마 등을 보면서 이해하지 못하고 분노를 내뿜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콘고는 자신이 맹신해 온 것을 지키고 싶어합니다. 그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증오는 결국 콘고를 괴물로 만듭니다. 자기 편까지 흡수한 콘고는 자신의 원래 모습마저 잃어버립니다. 마치 변화를 거부한 개신교가 창조과학 같은 반지성주의, 성소수자 혐오 같은 반인권, 독재자 찬양 같은 반민주주의로 자신들만의 감옥을 만들고 세상과 공감하지 못하는 괴물이 되어 버린 모습 같습니다.

마지막에 콘고는 이오나와 전투하면서 이렇게 절규합니다. "왜 지금 이대로면 안 되는 거야! 변화 따위 필요 없어! 관계 따위 필요 없어! 난 혼자라도 좋았어! 세계 따위 인식하고 싶지 않았는데!" 하지만 전투 후 콘고도 결국 변합니다. 어드미럴리티 코드가 아닌, 자신의 선택을 따라 행동하게 되면서 안개의 함대에서 이탈합니다.

성서에는 하느님의 이름이 다양하게 나옵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이름은 "나는 나다", "I AM WHO I AM"(출 3:14)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인간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할까요. 나의 판단을 규율이나 전통, 편협한 성서 해석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이 때로는 고통스럽더라도, 스스로 판단하고, 삶을 통해 부딪히고, 그 결과에 스스로 책임을 지며, 또다시 하느님의 뜻을 찾아 나서는 사람, 참된 자율의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한 이유는 기독교인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된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였으니까요.

'푸른 강철의 아르페지오'와 성서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참된 자율의 인간이 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