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전도에 열정적인 어느 제자가 길 가다가 기도하기 위해 어느 교회에 들렀는데, 교회 문이 잠겨 기도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교회에 붙여 놓은 '신앙생활 십계명'을 보고 뭔가 의심이 가서 사진을 찍어 페이스북에 올린 걸 보았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예배 잘 드리면 영혼이 복 받고
2. 십일조를 잘 드리면 물질의 복 받고
3. 이웃 사랑 잘하면 주님 사랑 받고
4. 성경을 잘 읽으면 지혜의 복 받고
5. 기도를 잘 드리면 응답의 복 받고
6. 전도를 잘 하면 면류관 복 받고
7. 부모를 잘 섬기면 장수의 복 받고
8. 형제와 잘 지내면 어려울 때 복 받고
9. 교회 봉사 잘하면 건강의 복 받고
10. 주의종 잘 섬기면 자녀가 복 받는다.

열 가지 내용 자체를 보면 크게 틀린 것이 별로 없어 보인다. 상당수는 성경 자체가 이를 뒷받침하기도 한다. 이 자체를 기복신앙이나 번영신학이라고 매도할 용의는 없다(나는 일전에 '기복신앙'이란 말보다 '번영신학'이란 말을 선호한다고 밝힌 적이 있다. '기복신앙의 문제인가, 번영신학의 문제인가'라는 글 참조).

그런데 이를 '신앙생활 십계명'으로 제시하고, 신자들의 신앙생활 목표로 이끄는 데는 상당히 문제가 있다. 첫 번째 드는 의문은 과연 우리 신앙생활이 '복 받기' 위해서인가라는 점이다. 이 열 가지 목록을 보면, 오로지 '내가' 모든 신앙생활의 초점이다. 내가 열 가지 복을 받도록 신앙생활을 유도하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내가 복을 받는 데만 초점을 맞춘 신앙생활이야말로 자기 자신의 복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신앙인으로 만들지 않겠는가. 그 복이 영적인 복이든, 현세적인 복이든 관계없이 그 복만을 추구하는 신앙의 이기주의자로 이끈다면 문제가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 신앙의 문제가 여기서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이 열 가지 목록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나 '하나님나라'에 대한 관심을 찾을 수 없다. 나의 복을 위한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와 하나님 의를 위한 삶이 우리의 신앙의 초점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번영신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애용하는 애물단지 성경 구절은 요한삼서 2절 말씀이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말씀에 근거해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의 형통과 강건을 기도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다. 이 말씀 자체가 갖는 의미이다.

문제는 이 말씀을 '미묘하게' 변형해 적용하는 데 있다. 영혼의 잘됨을 근거로 범사의 형통과 강건을 추구하는 신앙의 목표를 설정하는 게 문제이다. 삼박자 축복이라는 게 바로 이런 논리가 아니겠는가. 이는 영혼의 잘됨을 근거로 해서 현세적인 복을 추구하도록 주신 말씀이 아니다. 잘못된 목표 설정이 바로 미묘한 형태의 번영신학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우리 신앙생활의 목표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한다(사 43:21; 롬 15:6). 우리 질문은 '하나님의 영광을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미묘한 형태의 번영신학에 자주 세뇌를 당한다. 설교자는 예화를 사용할 때 극히 조심해야 할 것이다. 신앙생활 잘했더니… 물질의 복을 주셨다든가, 자녀의 복을 주셨다든가, 높은 세상 지위를 주셨다든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했다든가 등으로 결론을 맺으면 번영신학으로 신자를 이끌 소지가 다분하다.

이런 번영신학에 세뇌된 교인들은 현세적인 복이 오지 않으면 언젠가 신앙을 버리게 된다. 어느 번영신학에 물든 교회에 다니다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도 여전히 가난하고 힘들고 하니까 신앙을 포기했다는 어느 분의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는 종종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번영신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결국 맘모니즘에 빠져 사회적인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신앙생활을 잘했는데도 핍박과 고난을 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천안에는 유관순열사기념관과 관련 유적지가 있다. 오래전 이곳을 방문했을 때 여러 생각이 들었다. 삼일운동을 목격한 유관순 열사는 병천 아우내장터 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부모를 일제의 총칼에 잃고 자신도 교도소에서 죽었다. 그런데 이들의 죽음에 대해 동네 사람들은 유관순 집안이 예수 믿다가 온 집안이 망했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정말 유관순 가문이 예수 믿다가 망한 것인가.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어떤가. 누구보다 신앙생활을 잘한 사람이 있다면 이들이 아니겠는가. 이들은 대부분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이들이 망한 것인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신앙생활의 목표는 분명하다. 먼저는 우리의 구원이요, 그 다음은 우리의 성화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말하자면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게 믿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의 목표이다.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도 구원과 아울러 "온전한 사람"을 만드는 데 있고(딤후 3:16-17), 교회에 사역자들을 주신 목적도 "온전한 사람"을 만드는 데 있고(엡 4:11-12), 목회의 목적도 신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완전한 자로 세우는 데 있다고 사도 바울은 명백히 밝히고 있다(골 1:28-29). 온전한 사람이란 바로 예수님 닮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 이후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다. 우리가 타락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는지 날마다 절망하면서 깨닫지 않는가.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중략)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19-24) 이는 바울의 고민이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고민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의 옛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날마다 분투하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목표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나라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의미한다. 하나님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믿지 않는 영혼 속에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임하는 전도를 뜻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온전하신 통치하심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옛 사람이 죽어지고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역사하실 때 나의 마음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통치하심 가운데로 가지 않겠는가. 이것이 성경을 주신 목적이요, 사역자를 주신 목적이요, 바울이 힘써 사역했던 목적이다.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목표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복을 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성경은 신령한 복들을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다. 그러나 그 복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거룩한 목적 안에서 구해야 번영신학에 빠지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우선적인 복은 "온전한 사람", 즉 "예수 닮은 사람"의 복이다. 이를 추구하는 신앙생활이 진정한 성경적인 신앙의 방향이 아니겠는가.

김진규 / 백석대학교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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