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여성상담소는 교회 내 성폭력 근절 운동을 위해 1998년 창립된 단체다. 교회 내 여성의 제반 문제를 상담하고 있다. 교회 내 성폭력, 가정 폭력 등의 문제 상담에 주력한다. 정신적 피해뿐 아니라 신앙의 위기를 경험한 기독교 여성 피해자들에게 열려 있다(홈페이지 바로 가기).

문의 및 상담: 02-2266-8275

<뉴스앤조이>에 연일 성폭력 기사가 뜨고 있다. 문대식 목사의 미성년자 성추행 사건에 이어 여학생들을 수차례 성희롱한 신대원생전남CBS 전 문화사업국장의 직원 성추행까지…. 교회 성폭력을 넘어 그야말로 기독교인의 성폭력이 문제가 되고 있다. 혹자는 '왜 기독교인이 성폭력을 저지르는가', 심지어 '비기독교인보다 더 심한 것 같은데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질문을 한다.

성폭력 사건이 공론화됐을 때, 기독교 내에서는 교회건 기관이건 학교건 어디서나 "말도 안 돼"라며 피해자의 말을 믿어 주지 않거나, "왜 그런 일로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려 하는 거야"라며 문제 제기가 과도하다고 여기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피해자가 입은 상처, 인권 상실, 고통을 안고 살아갈 미래는 생각하지 않고, 가해자의 미래와 향후 거취를 걱정하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성폭력을 사사로운 일로 치부하면서 교회 공동체나 조직의 안위와 남성 가해자의 미래를 더 걱정하는 어이없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지, 그 기저에 있는 논리를 찾아보자.

우선 근대가 남성을 공적 존재로 보고 남성, 사회, 국가로 뻗어 나가는 공적 질서와 여성을 사사로운 존재로 보고 여성, 가족으로 국한한 사적 질서로 구조화되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성폭력 문제 제기에 대한 남성들의 태도, 교회와 조직의 태도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 지금까지는 당연하게 여겨졌는데 '사소한 일' 가지고 이러지 말고 '좀 봐 달라'는 식의 태도에서부터 말뿐인 사과·회유·협박, 거짓말 등으로 점철된다.

심지어는 '호감'이나 '스킨십'을 표현했을 뿐인데 뭐가 그렇게 잘못됐냐는 듯 억울함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는 여성을 동등한 사람으로 보지 않고 '집 안에 있어야 될 사람', '남성의 성적 대상', '부수적 존재', '가정경제의 1차적 책임자가 아니기 때문에 쉽게 해고할 수 있는 사람', '같은 일을 하고도 월급을 적게 받아도 되는 사람'이라는 근대적 사고방식이 작동하고 있는 탓이다.

'꽃뱀' 취급도 이런 성별 권력관계가 전제된 근대적 발상에서부터 나온다. 여성의 동등한 능력이 인정되지 않고 남성에 의해서만 지위가 상승할 수 있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지위가 높은 남성이 평범한 여성을 왜 선택했겠느냐, 혹시 여성이 자신의 지위 상승을 위해 먼저 유혹한 것 아니냐는 추측인 것이다. '공적 세계'로 나온 여성들은 남성들의 사회에서 성폭력을 당해도 피해로 인정받지 못하고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으로 오해받는다.

이런 근대적 사고방식은 '남녀의 상호 보완성' 내지는 '남녀의 타고난 본능'으로 인해 서로 끌리고 사랑하고 결혼한다고 믿는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이는 성폭력을 가부장적 교회와 사회의 결과물로 인정하고 다룰 수 없게 하는 장애물이 된다.

이 때문에 때때로 성폭력이 '사랑'으로 둔갑하기도 하는 문제에 주목하면서, 이 글에서는 폭력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너무나도 익숙한 '사랑'에 내재한 모순을 살펴본 후,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낭만적 사랑의 문화 모델'을 상대화하고 덜 폭력적인 새로운 사랑의 방식이 가능한지 살펴보고자 한다.

성폭력이 계속되는 것은 '사랑'에 문제가 있기 때문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다. 그러나 사랑을 강조하는 기독교에서 왜 성폭력이 일어나는가. 친밀한 관계, 신뢰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성폭력이라면 사건으로서의 폭력에 초점을 맞추어 작업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교회 성폭력이 사랑의 왜곡된 형태인 목사 숭배와 인정 욕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면 애초부터 불평등한 사랑이 문제가 되는 것 아닐까. 불평등한 사랑은 폭력과 연속선 상에 있고 언제든 물리적 폭력으로 돌변할 수 있다. 이제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친밀성의 구조에 이미 폭력이 내재되어 있음을 알리려는 것이다.

불평등한 가부장적 사회구조와 남성 중심적 성 문화를 재생산해 내는 데는 남성의 지배와 여성의 복종으로 특징지어지는 그 어떤 사랑의 이데올로기, 쾌락을 생산해 내는 기제가 작용하고 있다. 쾌락은 고통 속에서도 즐거움을 향유하는 환상을 전제하고 있는데, 성적 욕망의 금지로 인하여 이 환상은 더욱더 커지게 된다.

기독교에서 '혼전 순결'이라는 이름으로 금지된 섹슈얼리티는 남성의 지배와 쾌락을 뒤섞음으로써 그 욕망의 세력을 확장한다. 금지를 둘러싼 욕망의 전투는 순결을 강탈하려는 남성과 순결을 지켜 내야만 하는 여성 사이의 쫓고 쫓기는 게임에서 여성이 패배하도록 프로그램화된 강간 문화로 나타난다.

성에 대한 금기와 부정, 정신적 사랑의 진실성을 여성의 '순결'로 증명하려는 낭만적 사랑은 성·사랑·결혼을 통합해 가부장적 가족을 재생산해 내는 여성 억압의 장치로서 기능해 왔다. 성·사랑·결혼이 한데 통합된 것을 '낭만적 사랑 복합체'라고 부른다. 서구 기독교 국가에서 17세기에 유행한 '열정적 사랑'이라고 불리는 이상화·과도함·무절제·역설(정복하는 복종, 능동적 수동)로 특징지어진 사랑이 18·19세기를 거쳐 서구 사회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다.

사랑의 사회적 정착 과정은 근대적 쾌락, 감정적 자아, 개인의 출현을 도우면서 전근대적 공동체에서 풀려난 개인이 사랑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간다는 새로운 발견으로 이끌었다.

신데렐라 이야기는 아름답지 않다

한국은 신분제적 공동체 사회였으나 식민지 조선 땅에 들어온 기독교로 인하여 해방 이후 압축적 근대화를 겪게 되었다. 교회가 담당했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계급을 뛰어넘는 급진적인 사랑이 가능하고 모든 형제 자매가 주님 안에서 평등하게 만나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었다

교회는 '연애당'이라고 불릴 만큼 사랑에 개방적인 곳이었다. 그러나 과연 교회에서 가르친 사랑이 사람들의 신분 경계를 초월하고 해방하는 역할을 했는가. 공사 이분의 영역 분리 신학은 남성에게는 해방과 연대를, 여성에게는 구속과 비정치화를 가져왔다. 공적 영역을 남성들이 차지하게 되면서 여성들은 '집안에 있는 존재'가 되었다.

교회는 현모양처로서 여성의 역할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가르치고, 소설·드라마·영화 등 대중문화는 로맨틱 스토리를 만들어 보급했다. 모든 로맨틱 스토리의 프로토 타입은 공히 '신데렐라' 이야기다. 이는 여성들로 하여금 거대한 성적 경매 대상 안에 집단적으로 있다가 누구한테 발탁되거나 평가되어져 지위가 격상하게 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보잘것없는 여성이 권력의 최고봉에 있는 남자를 만나 결혼하는 이야기는 해피 엔딩으로 끝나지만 불행의 시작을 예고한다.

낭만적 사랑의 환상: 네가 곁에 있어도 그립다

낭만적 사랑 복합체는 남성들이 폭력과 사랑, 지배와 보호를 뒤섞어서 여성들을 지배하는 도착적 장치다. 그러나 사람들의 상상을 조절하고 사회의 재생산 과정을 조절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사랑의 표상에 심취하고 '모방 인간'(homme-copie, Niklas Luhmann, 1982)의 복제된 실존을 살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 무의식에 깊이 코드화되어 있는 욕망의 장치이다. 어딘가에 있는 소울 메이트를 찾아 자기실현을 하고자 하는 욕망은 소위 '사랑 사업'에 목숨을 걸게 만들고, 사랑을 '세속적인 종교'로 만들었다.

성 해방의 결과, 섹슈얼리티가 재생산과 분리되면서 가족이 해체되고 사람들이 개인화되면서 낭만적 사랑 복합체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자아실현과 성적 관능의 기술이 중심이 되는 순수한 관계를 지향하는 '합류적 사랑'(confluent love)으로 그 중심이 이동했다. 그러나 연인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 속에서 더 외로워진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관계나 만남을 찾아 나서고 있다.

이럴 때, '단 하나뿐인' '영원한' 사랑에 빠지는 것과 그 황홀한 감정에 강조를 두는 사랑, 결혼으로 인해 둘이 하나 됨을 선포하는 사랑, 결혼과 동시에 무한한 성적 쾌락을 약속하는 사랑의 환상은 기독교가 아직도 '낭만적 사랑'의 결과물인 남성 중심·이성애·정상 가족을 주장할 수 있는 빌미를 준다.

혼전 순결이나 결혼에 대한 환상 등 교회에서 가르치는 왜곡된 사랑을 믿는 교회 여성은 낭만적 환상을 자극하는 가해자들의 거짓말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다. 교회 성폭력 가해자들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그들 자신도 결혼으로 해소되지 못한 낭만적 사랑의 환상에 상당히 경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내에 대한 불만족을 표현하면서 피해자에게 접근하는 그들은 현실대상에 만족하지 못하는 과도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그들의 수법 중 하나는 '아내랑 헤어지고 너랑 결혼하겠다'는 식의 거짓말이다.

절대 믿지 말라. 처음부터 과도하게 성적으로 접근해 오며 '작업 멘트'를 날리는 그들은 성적 쾌락을 상상하며 접근할 뿐, 타자에게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환상을 만족하기 위하여 대상이 성적으로 끌리기만 한다면 누구라도 상관없는 사람들이며 황홀한 감정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일시적인 사랑의 대상은 단순히 그런 경험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사랑한다는 환상에 빠져 쾌락을 즐기려는 목적의 접근은 상대를 쾌락의 도구로 수단화할 뿐이다.

낭만적 사랑의 가장 큰 문제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의 실제 대상으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환상 속 대상으로 상상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상하기, 환상, 환상 속에서 쾌락에 빠지기 등이 그 사랑을 진실성 없게 만든다. 남성은 사랑하기를 사랑하고 여성은 남자를 사랑한다(Niklas Luhmann, 1982). 심각한 문제는 불평등하고 비대칭적인 그런 환상이 소비되고 유통된다는 점에서 어느 누구라도 성폭력 가해자 또는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환상은 사람들의 정신에 자리잡고 실제 대상이 아닌 환상 속의 대상과 잃어버렸던 융합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한다. 더구나 그것이 한낱 환상이 아니라 실제 사랑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이다. "네가 곁에 있어도 나는 네가 그립다."

'둘이 하나 되기'가 아닌 '함께 주체 되기'의 과정

하나님의 절대주권 앞에 복종하는 자세는 하나님을 만나는 숭고한 사랑의 방식이다. 신비주의 전통에 입각하여 인격적 고유성을 완전히 포기하고 합일에 이르려는 수행은 오랜 기독교 영성의 역사 속에서 강조되어 왔다.

그러나 그런 사랑의 방식, 정체성 상실과 자기소외로 특징지어지는 종교적 사랑,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낭만적 사랑의 방식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신과의 합일, 타자와의 융합에 이르려는 것은 과연 환상일까.

세계를 내 안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은 내가 하나님과 하나 되는 순간이자 사랑이 탄생하는 지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한 세계가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인데 그럴 경우 합일하는 느낌으로 '내가 타자한테 흡수돼도 좋다'는 감정이 일어난다. 이런 감정이 사랑이다. 나와 세계가 합쳐지는 경험이 사랑이다.

타자는 그의 세계를 지닌 사람인데 어떻게 내가 그에게 온전히 흡수되거나, 타자가 나에게 흡수될 수 있을까. 결국 타자를 나에게로 끌고 오든지, 내가 타자에게로 끌려 들어가든지 둘 중 하나인 권력 다툼이 일어난다. 사랑은 이러한 권력 다툼이자 투쟁일 수밖에 없다.

이상화와 융합 안에 자기를 포기하도록 가르치는 기독교 전통은 결국 권력을 가진 자가 자신의 동일성 안으로 세계를 흡수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일자로 통합되는 사랑은 융합적 사랑, 희생적 사랑, 상부구조적 사랑을 낳았다. 그러나 "타자에게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고 싶은 열정에 사로잡힌다 하더라도 무릎꿇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Alain Badiou, 2010)

기독교 역사 속에 면면히 흘러들어 온 에로스라는 사랑의 형태는 무한한 신의 이데아를 향한 보편자, 동일자의 환상을 품고 자기동일성을 향한 수직 상승의 초월성을 이야기해 왔다. 이런 초월성은 결국 내가 신이 되거나, 상대를 신으로 만드는 우를 범하게 했다.

우리는 무한을 담고 있지만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를 인간이게 만드는 것이 유한성이고 우리가 끝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너무나 쉽게 간과해 버리고 말았다. 타자와의 권력 다툼 속에 길을 잃으면서 우리 자신이 누군가에게 흡수·융합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다른 사람도 나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없음을 잊었다. 낭만적 사랑 속에서 우리는 초월적 구성물로 알려진 망각에 따라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을 간과해 왔다(M. C. Dillon, 1994).

우리 각자는 모두 다 환원될 수 없는 '차이'를 지닌 존재이다. 사랑은 타자를 나의 쾌락, 환상, 욕망의 도구로 삼는 것도 아니요, 그와 융합하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결코 좁혀질 수 없고 환원될 수 없는 무한한 차이를 지닌 타자와의 만남의 '지속성'에 초점을 맞추는, 끊임없는 '주체 되기'의 과정이다.

사랑은 타자와의 만남에서 생성되는 진리 추구의 과정이며 끊임없는 반성과 성찰, 사유의 과정이다. 성(Sex)은 사랑의 과정에서 나를 타자에게 증여하려는 행위이자 시도이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대체로 사랑은 성을 포함하는 더 큰 맥락이다.

인간의 욕망은 본래 타자에 대한 욕망이지 성적 욕망이 아니다. 그러나 교회가 가르치는 성적 금지의 순결한 사랑은 의도치 않았지만 타자에 대한 욕망을 성적 욕망으로 뒤바꿨다. 욕망을 금지하는 것이 그것을 더 부채질한다는 단순한 진리는 성에 대해 악마화해 온 기독교가 실제로 성을 악마적으로 사용하도록 성도들을 내몰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이제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여성을 남성에게 종속하려는 시도가 실패하는 만큼 결혼과 사랑을 한데 묶으려는 시도는 실패하고 있다. 그에 따라 외로워진 사람들이 '잃어버린 융합'(언젠가 주어졌다가 상실했다고 믿는 융합의 환상)을 찾으려는 갈망은 더 강렬해지고 있다. 인간이 성적 존재라는 것은 이러한 갈망을 지닌 불완전하고 취약한 존재라는 의미이고 그 때문에 타자에 대한 욕망을 가지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이제 좀 더 성숙해져야 할 시간이 왔다. 타자를 나의 환상 속 대상으로 전유하는 것은 실재로서의 타자에 대한 폭력이고, 환상은 깨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나에게도 폭력이다. 낭만적 사랑의 환상을 조금씩 떠나보내고 서로의 불완전함, 취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그럼 이제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그것은 아직 더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 한 가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타자를 필요로 하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레비나스(Emmanuel Levinas)가 타자의 얼굴은 하나님의 현시라고 한 말은 옳다. 하나님은 저 먼 곳에 계시지 않고 우리 사이에 계시므로(Luce Irigaray, 2002) 우리의 관계 경험이 곧 하나님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성을 '꿰뚫어 보려는' 남성들의 시도는 계속 실패해야 한다. 그들의 타성에 젖은 '친밀한 폭력'이 성폭력으로 고발되고, 타자의 신체를 제 것인 양 전유하려는 남성들의 시도를 절단 내야 한다. 그래서 남성들이 만든 '영원한 여성성'의 신화가 깨지고 여성이 단일한 젠더 범주가 아니라 각자가 무한한 차이, 환원할 수 없는 차이를 지닌 다양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꿈꾼다.

더불어 이성애 중심·남성 중심적 사회를 무너뜨려 다양한 사랑이 인정받고, 절대적 중심이 사라지고 모두가 상대적 중심이 되는 사랑의 민주주의를 이루어 내자. 그러기 위해서는 의식 혁명,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필요하다. 어렵지만 "사랑하는 자여, 함께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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