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이만열 교수(숙명여대 명예)가 9월 15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입니다.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어제(9월 14일)부터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와 인권·여성 단체들이, "베트남전 당시 한국 군인들의 전쟁범죄로 고통을 겪은 베트남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기 위해" 서울 종로구 삼청동 소재 주한 베트남대사관 앞에서 1인 릴레이 시위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첫날 시위자는 윤미향 정대협 상임대표였다. 그는 이날 아침 8시 30분부터 한 시간 남짓 "베트남 정부와 베트남 인민에게 한국 국민으로서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사죄의 시위'를 했다.

이 사죄 시위가 시작된 것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뜻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시위 팻말에는 또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의 다음 말이 인용되어 있다. "우리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20년 넘게 싸워 오고 있지만, 한국 군인들로부터 우리와 같은 피해를 당한 베트남 여성들에게 한국 국민으로서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라는 것이다. 시위에 나선 이들 역시 "우리도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의 뒤를 따라 한국 국민으로서 미국의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한국 군인들에 의해 피해를 입은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자, 성폭력 피해자, 그 외 모든 전쟁 피해자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고 했다. 이 사죄 운동은 일본군 성범죄의 조직적인 피해자였던 할머니들의 평화와 화해의 신념이 선봉이 되고, 그 뒤를 이은 후예들의 정의와 인권 의식이 어울려 이뤄지고 있다.

필자는 이 1인 시위를 계기로 베트남을 향한 사죄 운동이 우리 사회에서 본격화했으면 한다. 그동안 우리는 일제가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해 왔다. 최근 소녀상 운동이 국내는 물론 전 세계로 파급되는 것도 일본의 성의를 촉구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일본을 향해서 사죄를 촉구할수록 늘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양심의 소리가 있다. 그것은 베트남 전쟁에서 저지른 우리 자신들의 만행에 대해서는 얼마나 반성하고 베트남을 향해 사죄를 구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자신의 죄악상은 숨긴 채 일본을 향해서만 사죄를 요구하는 것이 균형 잡힌 의식인가 하는 점이다. 일본을 향해 사죄와 배상을 요구할수록 우리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더 철저히 반성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문제는 단순히 우리와 베트남의 관계를 넘어서 인류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본다.

부끄럽지만, 십수 년 전에 개인으로라도 베트남에 용서를 구하려 한 시도를 소개하겠다. 이는 역사를 공부하는 학인으로 베트남을 향해 갖고 있는 사죄 의식의 편린이었다. 삼청동에 있는 한국 주재 베트남대사관을 찾아 다음 편지를 전한 것은 1999년 12월 6일이었고, 소액의 장학금은 몇 년간 전달되었다. 자칫 오해될 수도 있는 일을 밝히는 것은, 이런 형태로라도 베트남에 용서를 구하는 조용한 운동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베트남과 한국의 호혜적인 외교 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해 밤낮으로 노력하시는 대사님께 건강과 행운이 늘 깃드시기를 기원합니다. 저는 서울의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사학과에서 한국의 근·현대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가 베트남을 알게 된 것은, 중학교에 재학하고 있을 때 베트남 독립군이 프랑스 침략군들을 상대로 디엔비엔푸에서 크게 승리했다는 뉴스를 신문에서 보았을 때입니다. 그때는 아직 어려서 베트남의 독립 전쟁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 뒤 제가 대학에 다니고 있을 때 미국이 베트남전에 개입한 것을 알게 되었고, 당시만 해도 반공 이념에 사로잡혀 있던 저는 민족문제의 본질보다 이념적인 문제에 더 경도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트남이 프랑스에 이어 미국을 물리치는 용맹한 독립 투쟁을 보면서 저는 내심 베트남의 민족주의와 독립 운동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무렵 저 자신에게 주어진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베트남이 독립 투쟁과 민족 통일 운동을 전개하고 있을 때, 한국이 미국을 도와 베트남에 파병된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동안 일본의 한국 침략을 비판하였고 지금도 일본에 대해 한국에 사죄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저로서는, 한국이 민족 통일·독립 투쟁을 전개해 온 베트남에 대하여 가졌던 자세가 과연 인류의 양심과 역사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정당한 것이었는가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점에 관해서는 저는 역사학자로서 이중적인 자세를 가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당시 저는 민족이기주의를 극복하지 못했던 나약한 지식인이었습니다.

몇 년 전 저는 한국의 통일 문제를 고민하는 학자들을 이끌고 베트남의 통일을 공부하기 위해 하노이와 호치민시를 방문하고 베트남이 프랑스와 미국을 물리치며 민족의 통일과 독립을 달성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10여 차례에 걸친 학술회의에서 저는 먼저 두 가지를 말했습니다. 첫째 베트남은 아시아 아프리카 대륙에서 프랑스와 미국의 제국주의를 물리친 유일한 국가라는 것과 둘째 베트남이 통일 전쟁을 전개하고 있을 때 한국이 본의 아니게 어쩔 수 없이 당신들과 맞서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점은 한 개인으로서 용서를 구하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때 저와 동행한 학자들은 베트남에서 너무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베트남 독립 전쟁과 통일 전쟁을 이끌었던 호지명(胡志明) 대통령의 인격과 지도력을 확인하고는 베트남에 바로 그 같은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에 통일이 가능하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뒤 제가 맡고 있는 라디오의 칼럼에서 한두 차례 호지명 대통령을 소개하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그 무렵부터 제가 역사를 공부하는 한 지식인으로서 한국이 베트남에 가했던 잘못에 대해 사죄하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고민해 왔습니다. 최근에 와서 저는 개인적으로 베트남의 대학생 한 사람에게 한 달에 100달러 정도의 장학금을 제공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장학생은 귀측에서 선발하시되, 가능하시다면 과거 한국군으로부터 피해를 입었던 귀국민의 후손이거나 피해를 입었던 지역의 학생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뒷날 한국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데에 기여하기를 기대하는 작은 소망은 갖고 있습니다. 장학금은 매년 12월 중에 1년치를 그때의 환율로 한국 화폐로 지급하고자 합니다. 저의 이 작은 뜻이 제대로 전달되어지기를 기대하면서 끝맺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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