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에 대한 칼럼이 많군요."

이번에 출간된 <불완전한 삶에게 말을 걸다>(예수전도단)에는 총 41개의 칼럼이 실렸고, 개중에 '목사에 대한 단상'이라는 부제의 글이 4개다. 다른 어떤 주제의 글보다 분량이 많다. 아무래도 목사라서 그런가 보다 라며, 묻는다. "왜 이렇게 많아요?" 그건 간단하다. 편집자다. 그간 써 두었던 200개의 칼럼 중에서 편집자가 출판할 만한 것들을 가려 뽑고, 그걸 네 개의 주제로 묶었다. 그러니까 목사에 대한 글을 많이 썼다기보다 편집자의 에디팅 때문이다.

편집이라는 말에 가볍게 웃고는 북토크 사회자인 최승훈 목사가 묻는다. "그렇다면, 목사로서 목사라는 직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 자신도 목사이거니와 이러저러한 사정과 사연을 안고 사는 그인지라, 그 질문이 정작 향하는 바는 내가 아니라 그 자신일지도 모른다. '왜 내가 목회라는 것을 하지?' 일각에서는 목회자의 영광이니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같은 고상하기 짝이 없는 단어를 써서 목회와 목회자를 수식하고 수사하지만, 현장에서는 그냥 일일 뿐이다. 밥 벌어먹기 위한 수단이 되어 버렸다. 이러자고 목회자가 되었나, 하는 자괴감이 든다.

그가 카톡으로 남긴 속내는 이렇다.

"저는 요즘 목사라는 직업에 대한 연민에 자꾸 빠집니다. 거칠고 사나운 이들에게 속살을 내주고 실컷 뜯기고 물려도 저항할 수 없는 이놈의 자리! 독한 맘을 먹었다가도 이내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은 나의 몫이란 생각에 우울해졌어요."

나는 약간은 주저하며,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목사는 저주받은 직업이라고. 청중들 사이에 가벼운 신음 소리가 들렸다. 왜 안 그렇겠는가. 다른 직업은 몰라도 목사는 성직이라고들 여기지 않는가. 적어도 종교개혁 이후 모든 직업이 성직이라고 가르쳐도 내가 하는 일은 돈벌이 수단이기 때문에 천직이고, 목회는 하나님의 일이니까 성직이라는 고정관념이 잘 안 바뀐다. 게다가 자신의 일을 '저주'라는 격심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놀랍기도 했을 테다. 그 청중이 나에게 우호적인 편향이 있었기 망정이지, 항의와 반발이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극단적인 단어를 사용한 까닭은 내가 설교한 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목사의 잡 리스트에는 설교와 회의 진행에서부터 운전과 화장실 청소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도 많은 일을 포함한다. 어느 하나 소홀히 여길 수 없지만, 심적인 부담으로 치자면, 설교가 제일이다. 설교 능력 여부가 교회 성장의 관건이고, 목사가 쫓겨나느냐 살아남느냐 인정받느냐의 열쇠인 경우가 허다하다. 설교 우선이 설교 만능이 되었다. 그래서 목회자를 간혹 설교자라고 하는 것도 그 중요성을 보여준다. 목회를 설교로 축소할 수 없지만 말이다.

내게는 기능적으로 설교를 잘 하느냐는 관건이 아니다. 나도 내 설교를 들어야 할 청중이다. 아니 최초의 청중이리라. 그러니까 설교자는 설교할 때, 이중적 정체성을 겹으로 갖고 있다. 설교하는 나와 설교를 듣는 나이다. 내가 한 모든 설교의 일차 청중은 바로 자신이다. 그러니까 나 들으라고 설교한다. 대개 남 들으라고 하지만 말이다. 자신은 쏙 빼고 설교하곤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도 될 사람이 있는가? 그가 누구라서 자신을 예외적인 자리에 두는가.

화자인 동시에 청자라는 이중성 말고도 또 하나의 이중성이 있다. 데카르트의 그 유명한 '코기토'(cogito)는 '나는 생각한다'는 의미의 라틴어다. 그는 인간의 존재의 존재다움을 '사유'에서 찾았다. 그런데 저 말은 내가 생각한다는 그 사실을 생각하는 내가 나를 생각한다는 뜻을 함축한다.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생각하지 못한다면 저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고 있는 나를 또 생각하는 나. 이렇게 앞의 나를 물고 들어가면 끝도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생각한다는 점이다.

설교라고 다르지 않다. 설교하는 나를 내가 무연히 쳐다보는 내가 내 안에 있다. 열심히 설교하고 있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징그러운 내가 있다. 그는 설교하는 내내 내게 속삭인다. '너, 참 말 잘한다', '너는 그렇게 안 하면서 잘도 가르치는구나', '웃기고 자빠졌네' 등등. 이런 지랄 맞은 소리를 설교 시간 내내 듣는다. 설교 도중에 그만두고, 내려가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풍문에 의하면, 어느 존경받는 목사님이 '이번 주는 내가 설교한 대로 못 살았다'고 부목사에게 설교를 시켰다는데, 그 부목사는 무슨 날벼락인가. 단언하건대, 모든 설교자는 일 년 내내 설교한 대로 못 산다. 아니 안 산다. 설교한 대로 못 살았다고 설교를 안 하면, 그는 목사직을 그만두어야 마땅하다. 그는 일 년, 아니 일평생 다섯 손가락, 양보해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수만큼 강단에 올라갈 수 있을까?

설교도 대중 강연과 마찬가지로 아이 컨택이 중요하다. 대개 앞의 청중을 바라보지만, 좌와 우, 뒤편의 교인에게도 눈 맞춤을 한다. 반주자나 성가대가 있다면 한두 번 몸을 돌려야 한다. 허나, 도무지 시선을 둘 수 없는 청중이 내게 하나 있다. 바로 아내다. 아들과 딸도 당연 포함된다. 내 가족은 내가 어찌 사는지 너무 잘 안다. 설교의 십중팔구는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내 속의 내가 아내가 되어서 말한다. '당신의 이웃에는 왜 아내가 없지요?' 그래서 못 쳐다본다. 행여 눈이라도 마주치면 혀가 꼬인다. 말이 헛나온다.

그러니 설교는 숫제 싸움이다. 내 속에서 전쟁이 벌어진다. 그 싸움질에 내가 미치고 지친다. 화딱지가 난다. 짜증이 인다. 기쁘고 즐거운 때도 나를 조롱하고 시니컬하게 웃는 나를 대면해야 하니 너무 피곤하다. 그래서 목사는 저주받은 직업인 게다. 스스로에게 저주를 퍼붓고, 싫다고 도망갈 수도, 갈 곳도 없다. 청년들에게 목사 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왜 이런 저주를 자청하느냐 말이다. 하지 마라. 그게 살 길이다.

내가 설교한 대로 못 살기 때문에 목사가 저주받는 직업이라는 것이 첫째 이유라면, 하나가 더 있다. 전도사와 부목사 때는 몰랐다. 인기 최고였다. 어쩌면 목회 인생에 그때가 전성기가 아니었을까? 그때는 담임목사들이 하는 말이나 행동의 절반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하면 될 걸, 이렇게 저렇게 하시면 될 텐데 왜 그러지? 나는 목사가 되면 절대로 저렇게 안 할 거야.' 얼마나 다짐을 했던가. 이래저래 상처받은 교인을 잘 다독이지 못하는 분들을 보면, 의문과 반문이 늘어만 간다.

아, 아아. 나도 모르게 신음이 터져 나온다. 목사가 돼서 목사라는 직업에 가장 회의적이고 비판적일 때가 언제냐 하면, 목사인 내가 문제가 되는 경우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목사인 나 때문에 교회를 떠난 사람이 있을까, 없을까? 차마 공개하고 싶지 않은 자아비판일지, 자아 학대일지 모르는 질문이 또 하나 있다. 나로 인해 교회 다니는 사람이 많을까, 떠난 사람이 많을까? 죽을 맛이다. 죽어가는 영혼 살리고, 힐링, 티칭, 프리칭하겠다고 목사가 되었는데, 살아 있는 영혼을 아프게 하고 다치게 하고 있으니, 정말 욕이 나온다. 내가 주 안에서 죽어야지 교인이 왜 교회 안에서 죽느냐 말이다. 아, 눈물 난다.

그래서 목사는 저주받은 직업이다. 하나님을 위한 일인데, 가장 하나님에 반한 일이 될 직업이 목사다. 기독교 최고의 안티는 기독교인, 교회, 목사인데, 그 중에 제일은 목사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인간 본령이고 목회의 본질일진대, 목회를 하면 할수록 교인들을 시험 들게 하는 주범이 목사다. 손봉호 선생님은 당신이 주도하고 설립한 NGO단체를 일컬어 자살적 기관이라고 하셨다. 없어지는 날이 세상 좋아지는 날이라는 뜻이다. 목사라는 직업도 자살적 직업이다. 내가 목사를 안 하면, 나를 표정 없이 바라보는 내 속의 나를 안 봐도 되고, 나 때문에 여럿 고생시키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김기현 목사. 뉴스앤조이 유영

마지막이다. 결정적으로 목사가 저주받은 직업이라는 것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한 대목 인용해 보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는 모두 저주를 받은 자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갈 3:13, 새번역)

갈라디아서가 인용한 저 구절(신 21:23)은 말 그대로 나무에 매달려 죽은 것은 그가 저주받았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십자가라는 나무에 달려 죽은 예수는 저주받은 자다.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분리. 그게 그간 내가 사용한 저주라는 단어의 말뜻이다. 하나님과의 분리됨. 여기에 이웃, 타자와의 분리도 추가해야 한다. 아무튼, 예수 자신도 그러하거니와 바울은 저 구약 성서를 다르게 해석한다. 저주받은 것은 맞다. 그걸 부정하면, 신명기와 구약 전체를 같이 버리는 꼴이다.

헌데, 그 저주는 자신의 죄나 잘못이 아닌 타인의 죄와 잘못을 대신 지기 위한 저주다. 무고한 자가 유죄한 자, 사형 받아 마땅한 자, 영벌을 받아도 시원찮을 죄인을 위해 아무 까닭 없이 대신 죽는 것이 저주가 아니고 무엇인가? 저 구절에서 이미 힌트를 주었지만, 예수가 받은 저주는 우리를 위한 저주이다. 남을 위해 저주받은 거다. 저주받은 자를 구원하기 위해 몸소 저주받으신 분, 그가 예수다. 그것 밖에는 달리 구원할 방도가 없다. 인간이 되심으로써 인간을 구원하듯.

저주받은 자이었기에 나의 저주를 이해하시는 분. 저주받은 자이었기에 저주받은 자리로 우리 모두를 부르시는 분. 저주받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으신 예수 그리스도.

그러니까 예수가 저주받은 자로 저주받은 죽음을 죽었다면, 어디 목사만 저주받은 자이겠는가. 그의 제자된 모든 그리스도인 역시 저주받은 자의 제자인 한 저주받은 자이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 14:27)는 주의 말씀에서 십자가는 곧 저주받는 죽음을 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는 그의 십자가를 지고, 나는 나의 십자가를 지고. 나는 목사로서 십자가 질 뿐.

안다, 안다, 나도 잘 안다. 내 꼬라지가 그분의 삶과 십자가랑 동쪽 끝과 서쪽 끝의 거리처럼 멀어도 한참 멀다는 것을. 그분은 남을 위한 대속적 저주를 받으셨다면, 나는 나 하나 건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적어도 내게는 저주받은 직업인 목사를 통하지 않고서는 저주받은 자의 제자가 될 수 없다. 남을 위한 희생적 삶을 살만한 어떤 단서도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내가 죽어야 할 자리, 그리하여 살아 내야 할 자리는 목사라는 직업 말고는 없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나는 물어뜯는 이 저주받은 이 자리에 그냥 있으려 한다.

김기현 / 목사, 로고스서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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