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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과 포스트휴머니즘?
종교개혁과 포스트휴머니즘①
  • 박일준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7.09.09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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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의 해를 맞이하여, 기념하는 행사와 일정 등으로 분주한 해이지만, 우리는 진정 종교개혁의 의미를 알고 있는 걸까. 혹은 종교개혁을 '기념'한다는 것은 과거의 사건을 '반복'(repetition)한다는 것일까. 아니면 그 과거의 사건을 오늘의 상황에 비추어 새롭게 조명한다는 뜻일까. 혹은 과거 사건의 정신을 오늘의 상황에 적용한다는 뜻일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을 기념한다는 것일까. 그냥 오래전 500년 전 과거 사건을 기억하자는 뜻일까.

무언가를 기념하거나(com-memorate) 기억한다는(re-member) 것은 '함께 마음에 올리는 일' 혹은 '구성 지체를 새롭게 만들어 내는 일' 등을 수반한다. 즉 그것은 과거를 '회복'(recover)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과거를 발명(invent)하는 일이다. 철학적으로 혹은 인문학적으로 과거를 발명한다는 것 혹은 회복한다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철학적 개념이나 범주를 창조해 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료 속에 이미 현재했었지만 아무도 주의를 주지 않았던 단어나 개념을 식별해 내는 일을 의미한다(C. Malabou 2011, 68). 즉 독자들이 읽어왔던 텍스트 속에서 지금까지 무시되어 왔던 것을 "절대적 특이성"(absolute singularity)의 사건으로 읽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철학의 작업이다. 이는 곧 종교개혁 500주년의 의미를 채근하는 오늘의 신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종교개혁의 의미를 찾기 위해 과거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과거의 사건을 거듭 반복하려는 몸짓 속에는 500주년을 진정으로 의미 있게 받아들이려는 마음보다는 과거를 관광 상품화하여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구조 속에서 소비를 진작시키는 행위에 더 가깝다.

우리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한다는 것은 그때의 텍스트—여기서 텍스트는 단지 문자로 쓰여진 텍스트만이 아닐 것이다—를 다시 읽으면서, 그 안에서 지금까지 주목받지 못했거나 무시되었던, 하지만 우리 시대를 위한 의미 있는 경종을 파악해 내려는 노력 속에 있을 것이다.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500주년의 행사들은 마치 과거의 사건이 현재에 반복(repetition)될 수 있다는 환상, 그리고 그러한 반복이 의미의 재현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는 듯하다. 의미는 반복을 통해 도래하지 않는다. 의미는 차이를 통해 도래하는 것이다. 내가 이미 이해하고 있는 종교개혁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동일하게' 확인하고자 하는 욕망은 의미를 향한 의지나 몸짓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기독교와 교회의 구조를 정당화할 구실을 500주년 기념을 명목으로 강화할 심사에 다름 아닌 것이다. 우리가 500주년에 물어야 할 것은 그 500주년이 어떤 차이의 사건으로 해석될 것이냐이다.

종교개혁과 포스트휴머니즘?

종교개혁과 포스트휴머니즘은 얼핏 전혀 동떨어진 주제로 간주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로 다가오는 시대를 의미하는 포스트휴머니즘은 종교개혁을 통해 무언가를 회복하려는 몸짓일 수 있다. 바로 그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던 그래서 무시해 왔던 종교개혁이라는 텍스트 안의 특이성일 것이다.

우리는 종교개혁 속에서 '인간'의 의미에 대한 반란을 읽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 '인간'을 규정하던 존재의 사다리를 부정하는 반항적 몸짓, 즉 사회적 신분으로 층층이 구별되고 배열된 사회질서에 저항하는 몸짓의 단초가 바로 종교개혁의 '오직 은혜로만'에 담겨 있었다는 것은 과장일까. 종교개혁은 흔히 사제와 평신도 간의 종교적 신분 차별이 철폐되는 사건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오늘 500주년을 기념하는 한국교회 안에서 오히려 종교적 신분제가 더욱 공고해지고 강건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무척이나 슬프고 역설적인 일이다. 원시 교회라고도 불려지는 바울의 예배 공동체 안에서는 귀족과 자유인과 노예가,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유대인과 이방 민족들이 그리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예배를 드리며 '형제'와 '자매'로 서로를 부르고 섬기고 있었다. 이 예배 사건은 당시에 인간 해방을 위한 사건으로 촉발된 혁명이 아니었다. 하지만 추후 시대에 인간의 해방을 위한 동기가 필요할 때마다 거듭거듭 다시 역사의 현재 속으로 소환되어, 인간 해방을 위한 원형의 이미지를 제공한다.

철학자 데리다가 증언하듯, 근대의 헤겔과 후설과 하이데거의 '인문주의'(humanism)에는 인간(human)이 차별적으로 담지되어 있다. 즉 인간의 해방을 위한 담론이 휴머니즘을 위해 전파되지만, 정작 그들이 말하는 '인간'은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 유럽의 백인 남성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미국독립선언서에는 "모든 사람은 동등하게 창조되었다"는 구절이 있지만, 정작 여기서 지칭되는 '사람'은 men, 즉 남자들이다. 데리다는 이런 해방의 노력들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해방을 위한 노력은 언제나 우리가 극복하고자 하는 차별과 억압의 요소를 다른 측면으로 담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우리의 해방의 노력은 이 한 번의 혁명으로 완수하고 말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비판과 해체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본래 인간은 human-between(人間)이다. 즉 '인간'은 '사이'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사이'(the between)란 나와 너의 차이가 만나는 공간이다. 그 차이의 만남으로 인해 우리는 늘 새롭고 창조적인 관계로 나아갈 수도 혹은 파괴적이고 억압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도 있다. 초대교회나 종교개혁이나 근대 휴머니즘에 대한 철학적 비판은 기존 인간 개념이 '차이로서의 사람'을 억압하고 차별하고 파괴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인간 개념이 해체되고, 새롭게 정초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리는 몸짓으로 'sola gratia'를 읽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르노 라투르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부터 생물학적 유기체의 몸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도구적 존재로서 인간'이라는 인간 개념 속에 함의되어 있듯이, 인간은 태초부터 비인간 존재들과 연결되어 존재하는 혼종적 존재(hybrid)인 것이다. 이를 부르노 라투르는 '행위자-네트워크'(actor-network)라고 부른다. 라투르는 인간은 본래부터 이렇게 주변 환경의 사물들과 네트워크적으로 연결된 존재이고, 특별히 근대 들어서, 인간이 비인간 사물들을 네트워크의 일부로 활용할 수 있는 기술적 발전들이 급속히 이루어지면서, 인간이 비인간 사물들과 혼종적인 존재가 되는 비율이 더욱 높아졌다. 아마도 본격적인 포스트휴먼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의 인간 개념은 자연/인공, 인간/자연, 인간/사물, 문화/과학, 주관/객관, 사실/가치 등의 이분법에 기초해서, 인간을 비인간 존재들과 연결된 존재로 파악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의 이 혼종성을 인간적으로 순수하지 못하다고 억압하거나 외면하거나 도외시해 왔던 것이다.

포스트휴먼의 시대에 우리는 종교개혁을 되돌아보면서, 그 사건을 영원히 죽지 않는 과거의 불사조로 소환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와는 달라진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 500년 전의 사건이 오늘의 우리를 위한 사건으로 파악되기 위해서는 늘 기존 역사 텍스트 안에 담겨 왔지만 외면 받아 왔던 개념이나 측면들을 '회복'하는 것, 그리고 그럼으로써 새 시대를 위한 개념을 발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글은 문화선교연구원 웹진에 게재되었습니다. 문화선교연구원의 허락을 받아 싣습니다(원문 바로 가기).
문화선교연구원 바로 가기: http://www.cricum.org/

박일준 / 감리교신학대학교 종교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신대원을 거쳐 보스턴대학교(S.T.M.)와 드류대학교(Ph.D.)에서 학위 과정들을 마치는 동안 종교학과 철학과 신학의 접경 지역들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집중해 왔다. 현재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과세계> 편집연구원으로, 희망철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인터넷 신문 <에큐메니안> 신학위원장으로, 안산 광야교회의 담임목사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경숙, 박주원, 박주은, 박주영과 더불어 사는 가족 공동체의 늘 부족한 가종(家從)으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정의의 신학: 둘의 신학>(서울: 동연, 2017), <포스트휴먼 시대를 위한 종교철학적 상상력: 인간과 기계의 공생을 위한 존재론>(현암사, 근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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