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을 넘어 개벽으로 - 희년의 새 하늘 새 땅'이라는 주제로 7월 26~29일 2017년 예수원 희년 학교가 열렸습니다. '다시 보는 희년 학교'에서는 오랫동안 '희년'을 고민하면서 희년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강사들을 인터뷰하면서 희년 학교 강의 내용을 담으려 합니다. 신구약과 교회사에 담긴 희년 사상을 오래 연구해 온 김유준 목사와 나눈 이야기를 정리했습니다.

김유준 목사. 사진 제공 희년함께

이성영 /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김유준 / 공평과 정의에 입각한 하나님나라를 세워 가기 위해 은진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는 김유준입니다. 연세대학교를 중심으로 캠퍼스 선교를 감당해 왔고, 교회사를 전공했습니다. 석사 학위는 칼빈의 지공주의 사상을 연구해 받았고, 박사 논문에서는 미국 조나단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을 연구했습니다.

지금은 연세차세대연구소와 은진교회 대학 청년들 중심으로 희년 세대 동아리를 만들어 캠퍼스에서 희년에 대한 세미나를 여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올해부터는 희년함께, 마커스커뮤니티가 연합하여 화요일 저녁에 격주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서울 중랑구 묵동에 위치한 대학 청년을 위한 신앙 훈련 공동체 그리스도대사단 원장을 맡고 있기도 합니다. 주거 문제로 많이 힘들어하는 청년들에게 교육비, 식사비, 관리비, 전기세를 포함해 1달 25만 원을 받고 신앙과 생활을 함께할 수 있는 공동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20명이 거주 가능합니다. 이런 거주 공간이 확산됐으면 좋겠습니다.

이 / 주로 희년 관점에서 성경과 교회사를 해석하십니다. 희년 학교에서도 성경 속의 희년, 교회사 속의 희년이라는 주제로 강의하셨는데 '희년의 관점'으로 성경을 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성경과 교회사를 보는 것인가요.

김 /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있습니다. 그 복음이란 단어가 헬라어로 보면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인데,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면 '기쁜 소식'입니다. 이것을 한자어로  만들면 '희음'(喜音)입니다. 보통 '희소식'(喜消息)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구한말에 이 단어를 복된 소식이라는 의미인 '복음'(福音)으로 번역했습니다.

물론 중국에서 번역한 말을 그대로 사용한 것도 있지만, 구한말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가난과 억압, 질병과 고통 속에 살던 우리에게 복을 준다는 것은 굉장히 매력적이었지요. 유불선과 샤머니즘의 오랜 토양 속에서 그렇게 번역한 것은 기독교 신앙이 기복적 신앙으로 전락하기 쉬운 토대가 됐습니다.

기쁨의 소식인 '희음'은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누가복음 말씀과 닿아 있습니다. 누가복음 4장 18절의 복음, 기쁜 소식은 19절의 "주의 은혜의 해"인 희년과 직결하는 개념입니다. 물론 희년(禧年)이란 단어에서도, 한자가 기쁠 희(喜)가 아닌 복 희(禧)로 사용되었기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레위기에 나오는 희년은 분명 자유와 해방을 의미하는 기쁨의 해를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희년 관점으로 성경 전체와 교회사를 함께 관통해서 봐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희년은 하나님나라의 가장 핵심적인 가치이자, 하나님나라의 통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 일반적으로 희년을 구약에 있는 개념으로 많이 이해하는데, 신약 속에 희년에 관한 내용으로 어떤 것이 있나요.

김 / 많은 사람이 희년을 구약 레위기에 잠깐 언급된 '폐기된 율법' 중 하나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안식일, 안식년, 희년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에 있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계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방식이며, 예수님께서 종말의 때에 심판하실 기준도 희년에 입각한 사랑의 실천 여부에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마 25:31-46).

신구약 전체를 통전적으로 보지 않고 단절적으로 본다면, 지금의 유대교나 초대교회 이단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특히 희년 사상은 신구약 전체에 걸쳐 면면히 흐르는 하나님나라 핵심원리로 작용하기에 이를 배제한다는 것에는 상당한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신구약을 같이 봐야 합니다. 구약에서 개념이 명확하게 나와 있는데도, 신약에서는 단절된 사상으로 봐서는 안 됩니다.

희년의 핵심 원리는 공평과 정의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미슈파트(מִשְׁפָּט)와 츠다카(צְדָקָה)입니다.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부채 탕감과 노예해방, 토지에 대한 권리 회복이죠. 신약에서 희년과 관련한 말씀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처음 회당에서 선포하신 말씀이 바로 희년 선포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줄곧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 수많은 가르침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희년과 관련한 말씀이 참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 중심에 위치한 주기도문의 죄 용서에서 '죄'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 원문을 보면 '오페일레마'(ὀφείλημα)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단어를 사용한 로마서 4장 4절에서도 '빚'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죄 용서를 원문으로 직역하면 빚 탕감, 부채 탕감을 의미합니다. 보통 신약에서 죄라는 단어의 원문은 "과녁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의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를 사용합니다.

신약의 난해한 비유 중 하나인 소위 '불의한' 청지기 비유도 희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인에게 해고당한 청지기가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 채무를 절감해 주는 모습을 보면서 주인은 재산을 낭비하고 있는 증거를 잡았다고 그를 혼내거나 옥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칭찬해서 해석하기 난해한 구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비유는 희년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부채 탕감을 말하고 있습니다. 부채 탕감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 것이죠. 거기에서 불의한 재물은 불로소득으로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재물 자체는 불의하지 않고 중립적인 것입니다. 불의한 재물이란 땀 흘려 수고하지 않고 거둔 재물입니다. 오늘날의 의미로는 땅 투기를 통해 벌어들이는 불로소득과 같은 재물을 의미합니다. 그 당시 부자는 대부분 희년이 되면 마땅히 돌려줘야 할 토지를 돌려주지 않고 착복하고 있었습니다. 소수가 막대한 토지를 상속해 가며 특권처럼 누린 불로소득의 재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찾아왔다가 근심하며 떠나간 부자 청년의 재물을 이야기할 때 쓰는 단어도 일반적인 부를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라 막대한 토지와 포도원을 지칭할 때 쓰는 '크테마'(κτῆμα)입니다(마 19:22).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의 재물이 희년의 토지법을 지키면 누릴 수 없는 것이기에, 희년을 지키지 않아 누리고 있는 막대한 토지 불로소득을 마땅히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 그들의 잃어버린 토지 권리를 돌려주는 '반환'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초대교회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희년을 지킨 예가 사도행전 4장에 자세히 나옵니다. 토지를 사유할 수 없었던 레위족의 바나바는 밭을 팔아 사도들 발 앞에 그 값을 마땅히 반환하는 것으로 자발적 희년을 실천했습니다(행 4:36-37).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소유를 팔아 얼마를 감추었습니다. 그들이 감춘 소유는 부자 청년이 지닌 재물을 말할 때와 동일한 단어인 '크테마'(κτῆμα)입니다(행 5:1).

희년이 되면 마땅히 돌려줬어야 하는 토지와 이로 인해 발생하는 막대한 불로소득을 끝까지 숨기고 일부만 내놓은 그들은 성령을 속이며 땅 판 값을 감춘 죄로 하나님의 심판을 그 자리에서 받았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가 성령 충만을 힘입어 막대한 토지 불로소득을 누리는 이들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로 자발적 환원을 통해 희년을 구체적으로 실천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희년 관점에서 복음서를 본다면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레몬서에서 빌레몬의 종이었던 오네시모를 종에서 해방해 주고, 그의 채무도 대신 갚아 줄 테니 탕감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오네시모를 고향으로 돌려냅니다. 이것도 바울의 희년 실천을 명확하게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13-15절에서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헌금 요청을 하면서 균등(ἰσότης)하게 한다는 것도 구약의 만나 사건에 근거한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의 필요를 채워 모든 사람이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하는 하는 하나님 마음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요. 이렇게 희년 관점으로 성경을 보면, 신약 본문에도 희년 실천 이야기가 곳곳에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 교부들의 경제사상도 많이 연구하신 것으로 압니다. 교부들이 재산, 이자, 토지 불로소득을 어떤 관점에서 봤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 / 우선 교부는 초대교회의 삶과 가르침에 있어서 신앙의 본이 되며 사도적 전승을 따른 교회의 아버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저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카파도키아의 바실리우스, 안디옥의 크리소스토무스 등의 경제사상을 연구했습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로마제국 시대의 인물들이었고, 기독교가 공인되기 이전 혹은 그 직후 인물들로 이들에게서 초대교회 기독교 신앙과 가르침의 진수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로마제국에 타협하거나 순응했던 인물들이 아니었습니다. 막강한 황제의 권력 앞에서도 하나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한 예언자적 삶을 살며 순교의 신앙으로 기독교 신앙과 가르침을 수호했던 분들입니다.

교부들은 재산이나 재물을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선물로 보았습니다. 재산이나 재물은, 함께 공유하며 서로의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한 코이노니아와 자족 수단으로 생각했습니다. 오늘날처럼 돈을 목적으로 삼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땅을 비롯한 천연자원을 모든 세대와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고, 특권을 누리는 소수층의 부 축적이나 막대한 재산상속을 강력하게 비판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막대한 재산을 상속하는 것을 자녀가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의지하게 만드는 죄악이라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막대한 부를 상속받고 난 다음에 형제들끼리 법정 다툼을 벌이지 않는 집안이 얼마나 될까요.

중세까지 교회에서는 이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루터와 칼뱅 시대, 종교개혁 시대에 이르러서 최대 5%까지 이자를 인정했습니다. 초대 교부 시대만 해도, 고리대금을 가난한 이들의 고혈을 짜내는 것으로 봤기 때문에, 고리대금업자는 강도나 살인자와 마찬가지라며 비판했습니다.

특히 토지 불로소득을 누리는 것에 "부자들이 매일같이 끊임없는 강도짓을 하는 것이다"라고 표현했어요. 누군가가 도둑질이나 강도짓을 한 번 했다면, 그것으로 정말 불안해서 벌벌 떨 텐데, 그걸 매일같이 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토지 불로소득을 취하는 것을 이렇게 강력히 비난했어요. 그것은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을 반드시 노예로 전락하게끔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죠.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제사상 연구> / 김유준 지음 / 희망사업단 펴냄 / 101쪽 / 5,000원

이 / 종교개혁자들은 재산, 이자, 토지 불로소득을 어떻게 봤나요.

김 / 교부들 관점과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루터와 칼뱅은 초대 교부들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수도회의 수도사였지 않습니까. 수도사들의 기본 출발은 독신과 청빈(무소유), 절대복종하는 삶이었지요. 그들의 신앙 훈련은 성서와 고전을 읽고 묵상하고 필사하는 일이었어요.

수도사들의 고전은 다름 아닌 초대 교부들 저작이에요. 루터와 칼뱅이 쓴 많은 저서를 보면, 아우구스티누스나 크리소스토무스를 굉장히 많이 강조하며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종교개혁자들이 가졌던 경제관에서도 초대 교부들의 흔적을 많이 발견할 수 있어요.

최근 개신교 신학자 중에 "칼뱅이 한 말이다", "루터가 한 말이다"라고 했던 내용도 원전을 살펴보면 교부들이 한 말로 많이 나와요. 예를 들어 교회 재산을 4등분해서 1/4은 교회 내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1/4은 교회 밖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1/4은 교회 목회자를 위해서, 1/4은 교회 관리를 위해 쓰자고 했다는 내용이 칼뱅의 기독교강요에 나옵니다. 이 내용도 칼뱅이 암브로시우스 말을 그대로 인용한 거예요. 암브로시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가 회심하도록 도와준 분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 경제사상의 큰 틀은 교부들 관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루터는 1524년 '상업과 고리대금'에 대한 저서에서 정부나 위정자들, 황제나 군주들이 해야 할 최우선 과제가 지대를 환수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칼뱅도 종교개혁 사명을 감당했던 제네바에서 로마가톨릭교회와 수도원의 재산과 토지를 몰수, 시의회 재원으로 확보해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구빈원과 각종 복지 정책으로 분배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토지에서 발생하는 수익과 지대를 환수해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토지 보유세를 거두어 복지를 위한 재정으로 사용한 셈입니다. 루터나 칼뱅은 공통적으로 무상교육, 무상 보육, 무상 의료 시스템들을 구축했어요.

얼마 전 동국대학교 교육학 교수님의 연구 발표를 들었는데요. 루터가 역사 속에서 공교육을 최초로 실시한 공교육의 효시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중세까지만 해도 교육은 귀족만 받았다는 겁니다. 우리도 그렇잖아요. 구한말까지 양반 자제나 교육을 받았지, 신분 낮은 사람이나 여성은 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없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최초로 귀족 자녀들만이 아닌 남녀 모든 아이들에게 공교육을 시작한 인물이 바로 루터였습니다. 칼뱅도 제네바아카데미를 통해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무상교육을 실시했어요. 오늘날에는 무상 보육, 무상 급식 이런 말을 하면 포퓰리즘이나 종북 세력으로 몰아붙이지만, 종교개혁 500주년을 외치는 보수 교단이 루터와 칼뱅 정신을 이어받아 더 적극 주장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 루터나 칼뱅이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독일, 북유럽, 스위스 등은 복지국가로 세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나라들입니다. 복지국가 체제가 만들어지는 데 루터나 칼뱅의 사상이나 신학이 영향을 줬을까요.

김 / 독일을 비롯한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아이슬란드 등 북유럽은 대부분은 루터교가 국교이고, 스위스의 제네바는 칼뱅이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도시입니다. 이 점을 감안한다면 복지국가 체제 형성과 결코 무관하지 않겠지요.

루터가 주창한 '만인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간 매개자로 사제를 두었던 가톨릭의 고해성사를 거부하고 누구나 직접 하나님께 죄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신학적 의미를 강조한 것입니다. 만인제사장은 신학적 차원만이 아닌 교육과 의료, 복지 등 실생활에서도 만인 평등사상의 토대가 되어 그들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준 것이죠.

이는 자연스럽게 직업 소명설과 이어집니다. 성직자들만 거룩한 직업이 아니라 구두 수선공도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는 성직(聖職)이라는 것이죠. 모두가 다 거룩한 소명을 받은 성직이라는 개념은 성직자나 귀족들만 존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존엄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와 연결됩니다.

그러다 보니 교육, 의료 문제 등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삶의 필수재들을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누릴 수 있도록 하는 흐름이 역사 속에서 사회 곳곳에 뿌리내리도록 공헌한 것입니다. 루터와 칼뱅은 소외된 약자들에게까지 복지 혜택을 누리도록 기여를 했고, 근대 민주주의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은 가난 문제에 대해 이토록 관심이 컸는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왜 이렇게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렸을까요.

김 / 한국교회가 초창기에 뿌리내릴 때, 교회를 통해 선교만 한 것이 아니라 병원과 학교를 함께 운영하는 트라이앵글 방식(Triangle Method)으로 효과적인 선교 활동을 하며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초기 선교사들은 이러한 선교와 교육 방법은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민족적 차원의 훌륭한 지도자들을 길러 냈습니다.

연세대학교의 출발인 세브란스나 연희전문학교에서도 주기철 목사와 윤동주 시인 등 민족과 교회의 훌륭한 지도자를 많이 배출했습니다. 평양신학교 출신 목회자들이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것이나 3·1 운동을 비롯한 농촌계몽 운동 등 다양한 영역에서 교회는 가난한 자들은 물론 민족의 아픔과 함께했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혹독한 시련을 통해 역사와 민족의 뼈아픈 현실을 직시했던 신앙이 점차 부흥 운동과 종말론적 신앙으로 강화되면서 현실 문제를 외면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영적 차원만 강조하고 정치와 경제 등 현실적 차원은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 아닌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한 것입니다. 특히 조선총독부나 파송한 선교 본부 정책에 따라 선교사들은 정교분리 신앙을 강조하면서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이나 공공성은 점차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해방 이후에도 신사참배를 깊이 있게 참회하지 않고 합리화했던 교권의 주요 세력들이 그대로 한국교회 지도자로 남게 되면서 교회 내 신앙의 순수성은 물론, 교계의 친일 청산도 기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군사독재 정권 시기에는 산업화와 함께 성장주의와 반공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은 교회의 주된 관심에서 변두리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6·25 한국전쟁의 민족상잔으로 가족의 죽음을 목도한 분들에게 공산주의 세력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원수였습니다. 토지 공유의 '공' 자만 들어도 공산주의를 떠올리는 전쟁 세대의 본능적인 거부 반응 속에서 희년의 중심 원리인 토지 공유 개념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던 것이지요.

그리고 친일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대부분 교회가 이승만 정권하에서 적산(敵産, 일제가 남겨 놓고 간 토지와 재산)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무상으로 받은 땅에 교회를 세워 성장하면서 기존 정치권과 기득권을 적극 옹호해 왔기에, 공의 문제라든지 종교개혁 정신이라든지 초기 기독교의 순교 신앙 같은 희생정신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본주의의 성장 이데올로기가 번영신학으로 변형돼 교회가 대형화와 성도 숫자를 자랑하게 된 것이죠.

나라의 3요소인 영토·국민·주권 중 건물인 교회와 국민에 속하는 교인 성장에는 열을 올렸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주권, 즉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는 신앙은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이렇다 보니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가난한 이들을 향한 공평과 정의의 삶은 사라지고, 교회는 오로지 개교회 성장 이기주의에 매몰된 것입니다.

이 / 청년들의 고금리 부채 문제를 통해 교회와 가난한 이들의 접점을 만들고 청년들 문제를 풀어 가려는 희년은행에 대한 평가와 조언 부탁드립니다.

김 / 대학 청년 사역을 하다 보니, 부채 문제로 고통 중에 있는 대학 청년을 많이 봅니다. 캠퍼스 현장에서 청년들을 만나 보면, 그들이 왜 이런 고통을 당하는지에 대한 이유나 구조적인 문제와 근원에 대해 대부분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이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그냥 내가 못나서, 부모님 탓 정도에서 그치지 사회 전반에 걸친 구조적 차원으로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회구조적 시스템 때문에 고금리 부채를 떠안고 고통 속에 살아가는 이들을 보며 청년들이 의분(義憤)이나 거룩한 분노를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희년은행이 일단 청년들 경제문제에 실질적 도움을 주는 것도 참 귀한 일이지만, 그것과 함께 병행해야 할 것은 올바른 교육이라고 봅니다. 사후 약방문식 처리가 아니라, 희년은행이 부채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청년들에게 사전에 빚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교회학교를 비롯한 일반 학교에서 청소년들과 어린이들에게 경제에 대한 올바르고 건강한 교육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만화책이라든지, 희년 캠프라든지 어떤 형태로든 부채 문제를 미리 예방할 수 있는 교육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약탈적 금융 시스템의 덫에 빠지지 않도록 철저히 예방하고 공의로운 대안 공동체를 세워 가도록 교육해야 할 것입니다.

이단도 예방이 제일 중요하거든요. 이단에 빠지고 나면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부채의 늪에 빠져들면 그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지 미리 알려 줘야 합니다. 부채 문제를 미리 충분히 예방하는 교육과 이런 문제들을 혼자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공동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장을 많이 마련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가 오늘 이 시대에 종교개혁 정신을 계승하는 구체적인 방안은 무엇일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 /  종교개혁 정신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기독교의 근본정신을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 신앙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데, 말씀 신앙의 핵심이 구약, 신약, 교회사 전체에 나타나는 하나님나라입니다. 하나님나라의 핵심 통치 원리가 공평과 정의이며, 이를 실행하는 구체적 원리가 희년입니다.

공평과 정의에 입각한 희년 정신으로 돌아가는 구체적인 방안은 무엇이 있을까요. 일차적으로는 교회가 교회 안의 가난한 이들과 교회 주변의 지역사회를 돌아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교회가 지역사회와 동떨어진 섬처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문제와 아픔에 적극 공감하고 품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주 중에 비워 두고 있는 교회를 활짝 개방해야 한다고 봅니다. 성전이라는 공간적인 성소 개념은 예수님 당시부터 사라졌습니다(요 4:21-24).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예배하는 공동체가 교회이지, 건물인 교회는 모이는 장소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통해 교회가 다양한 그룹에게 공간을 개방하고 이들을 섬겼으면 좋겠습니다.

방과 후 오갈 데 없는 어린이나 청소년을 위해 교회의 공부방이나 독서실을 열어 주거나, 창업을 원하는 청년에게 교회가 인큐베이팅할 수 있는 공간으로도 많이 활용했으면 좋겠습니다. 포도원의 작업을 마무리하기 1시간 전에도 일꾼을 데려와 일당을 준 포도원 주인처럼, 어려운 이들의 생계 문제를 적극 돕고 지원하는 방안을 모색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주택을 여러 채 가지고 있는 신자가 주거난에 시달리는 이들을 위해 전월세 가격을 동결하거나 반값으로 제공하면 좋겠습니다. 전월세 상한제, 계약 갱신 청구권 제도를 도입하기 전에 먼저 자발적으로 저렴하게 전월세 주택을 제공해 주면 좋겠습니다. 자발적 희년 실천의 일환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빚을 진 채무자가 있다면, 그 채무자가 도저히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상황이며, 내가 당장 먹고사는 데 큰 지장이 없다면 그 채무자의 빚을 모두 탕감해 주거나, '불의한' 청지기 비유처럼 20%, 50%를 탕감해 주면 좋겠습니다. 그러한 희년 실천을 감사의 제목으로 주님께 올려 드릴 수 있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렘 9:23-24).

무엇보다 저는 희년에 대한 가르침을 목회자나 신학생이 많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교회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교회가 희년을 실천하지 않으니까 이슬람이 일어나 "이 땅은 알라의 것이다"라고 하며 기독교 귀족들이 대토지를 소유한 수많은 지역을 이슬람화하지 않았습니까. 교회가 초대교회의 자발적 희년을 실천하지 않으니 사회주의자가 일어나 공산화하지 않았습니까.

초대교회가 불과 250년 만에 거대한 로마제국에게 공인받고 국교화할 수 있었던 것도 희년을 실천한 거룩한 삶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시 희년 정신에 입각해 신자들과 지역의 이웃을 도와야 합니다. 교회의 공공성을 회복하며 건강한 교회를 세워 가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교회를 다니지 않는 주변 사람들도 신자들을 보며 '와 정말, 저런 사람들은 정말 천국 갈 만한 사람들이다'라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날이 오리라 봅니다. 희년을 실천하는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될 줄 압니다.

희년 학교 강의 듣기

교회사 속의 희년1: https://youtu.be/MhdCEUj1OxM
교회사 속의 희년2: https://youtu.be/HKfCKpyTK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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