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자이자 설교자인 싱클레어 퍼거슨은 기독교 교리를 다루는 책의 유행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 교리를 다루는 책에 대한 수요는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는 바다의 조수와도 같습니다."1) 이 말은 제게 이상하게 묘한 울림을 주었는데, 그 책을 집어 들고 읽던 2010년 당시는 기독교 교리에 관한 책들이 앞다투어 출간되기 시작하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한국교회는 외적으로 신천지 등의 이단에 의해 교리적으로 위협당하고 있었고, 내적으로는 행사나 활동만 강조하는 교회 풍토에 (특히 젊은이들이) 지쳐 있던 상태였습니다.

이후로 아주 많은 기독교 교리서가 번역 출간되거나, 국내 저자들에 의해서 쓰였습니다. 이 현상은 주로 신학적으로는 '개혁파'(Reformed)에 속하는 장로교-복음주의자들이 주도했는데, 덕분에 오래고 오랜 신앙고백이나 요리문답(Catechism) 들이 다시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 신학 전통에 속해 있는 사람으로서, 부지런히 기독교 교리를 공부함과 동시에 열심히 알리려 노력했지요.

인간이 하는 모든 활동이 다 그렇듯, 기독교 교리에 대한 좋은 관심은 당연하게도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옳고 그름을 명료하게 나누는 교리의 특성상, 교리 공부는 자연스럽게 논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리를 열심히 공부한 사람들 가운데는 다양한 성격과 성향의 사람들이 있었고, 열심 있는 공부와 덜 성숙된 인격의 만남은 늘 '상처를 주고 다니는 사람'을 만들어 냈지요. 특히 교리 공부를 주도했던 장로교 개혁파, 즉 칼뱅주의자들은(아마도 그냥 '칼뱅주의자'들이라고만 불리기를 원치는 않겠지만) 논쟁과 더불어 상처를 남겼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가장 커다란 이유는 교리가 '진리'를 다룬다는 것이지요. 교리라는 말 자체는 성경의 가르침, 즉 성경 전체를 통해 조직적으로 결론 낸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 결론은 '성경의 가르침'이기에 진리라고 주장하지요. 어떤 교리가 진리라면 필연적으로 다른 교리는 비(非)진리, 즉 '다른 것이 아닌 틀린' 것이 되며, 당연히 그것은 정죄되어야 마땅하기에 논쟁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교리 논쟁은 일종의 정당성을 확보합니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은 분명히 존재하며, 어떤 주제는 다양성을 허용해야 하지만 어떤 주제는 절대로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부 아타나시우스가 삼위일체 교리 논쟁을 가리켜 "이 싸움은 우리의 모든 것을 위한 싸움임을 생각하십시오!"2)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어떤 교리는 우리의 영원한 생명과 연관되어 있기에, 사람들의 평판을 두려워하지 말고 싸워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논쟁은 성화의 과정을 겪고 있는 그리스도 안의 형제들 모두가 겪어야 하는 고통 중 하나입니다.

위험신호 - 공동체와 격리된 방식의 교리 공부

그러나 모든 논쟁이 진리를 위한 명예로운 헌신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임스 스미스가 이제 막 칼뱅주의자가 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한 말, 즉 "선물을 받아 누리는 주제에 오히려 우쭐해하면서, 받은 것을 자신이 이룬 것처럼 움켜쥐고 있는"3) 바보짓은 한국교회에 항상 있어 왔습니다. 그리고 슬프게도 이것은 제 자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참 놀라운 일입니다. 인간의 전적 타락을 믿는 사람이 자신의 전적 타락은 믿지 않고, 아무 조건 없는 은혜를 받았다고 믿는 사람이 그 은혜(정확히는 교리를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을 정죄하는 것 말입니다. 이론적으로는 가장 자신을 낮추고 이웃에게 따뜻하며 하나님만을 높이는 모습을 보여야 마땅한 교리를 믿는 사람들이, 아주 자주 자신을 높이며 이웃에게 날카롭고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는 행동을 보이다니요.

왜 그럴까요? 물론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이 현상이 일어난 근본적인 이유가 공동체와 격리된 방식으로 교리를 공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의 젊은이들에게 교리 공부 열풍이 불기 시작하던 2000년대 후반, 대부분의 지역 교회에서 시작된 교리 공부는 아래로부터의 개혁이었습니다. 공예배 설교와 당회 주관 아래 있는 교육으로부터 교리 공부가 시작된 것이 아니고, 개인이 책을 읽고 몇몇 사람이 모여 (그것도 대부분 몰래) 나눔을 가지는 것이 교리 열풍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슬프게도, 당시의(그리고 지금 역시) 담임 목회자들과 장로들은 1980~1990년대에 신학 교육을 받은 분들이었고, 그때는 기독교 교리를 다루는 책들의 썰물 시대였습니다. 1990년대에 나온 많은 신앙 서적은 간증집과 교회 성장에 관한 책들이었고, 그분들은 충분히 교리를 배우실 수 없었습니다. 모든 목회자들의 서재에 있던 <벌코프 조직신학>은 신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영어 사전 취급을 받았고, '실제적인 삶' 또는 '목회 방법'을 강조하는 책과 세미나를 찾았지요.

기독교 교리를 다루는 책들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지금, 스스로 책을 읽고 교리를 공부한 젊은이들과 그들을 지도하는 목회자들은 대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쪽은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고 있는데 탄압받고 있다고 생각했고, 다른 한쪽은 상대편이 지적으로 머리만 커지고 삶이 없으며 불순종한다고 생각했지요. 게다가 막 교리를 공부하게 된 젊은 친구들은 아직 교리를 잘 모르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아주 거친 방식으로 교리를 전했고, 결국 상처를 남기고 만 것이지요.

<기독교 교리 핸드북 - 그리스도인이 꼭 알아야 할 기본 진리> / 브루스 밀른 지음 / 안종희 옮김 / IVP 펴냄 / 584쪽 / 2만 7,000원

공동체적 교리 공부를 위한 책

서론이 무지하게 길어졌는데, 이 (듣기에 따라 서글픈)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브루스 밀른의 <기독교 교리 핸드북>(IVP)을 읽다가 이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상 저는 이미 많은 교리서를 보아 왔고, 이 책보다 더 좋은 교리 안내서도 많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다른 교리서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또는 소홀히 했던) 몇 가지 중요한 두드러진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이 책은 무엇보다 따뜻하고 변증적입니다. 교리 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칼뱅주의 교리는 대단히 낯설고 도전적입니다. 따라서 공부를 위해서는 우리의 의심과 반항을 따뜻하게 대해 주며 부드럽게 달래 주어야 합니다. 브루스 밀른은 예상 가능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있고, 이해하기 쉬울 만큼 명료하게 교리를 설명해 줍니다. 또한 그는 권위의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시작하여(1장을 보십시오) 결국 권위적일 수밖에 없는 교리 공부에 대한 이성적인 변증을 따뜻하게 시작하고, 이해되지 않는 문제들을 설명해 주며, 아주 중요하지는 않은 문제들에 대하여는 다양성을 인정합니다. 예를 들면, 유아세례에 관한 논쟁 부분을 보십시오. 논쟁 양쪽의 의견을 공정하게 기술하고, 열린 결말로 답을 냅니다.

둘째로, 이 책은 논쟁과 이성의 이해를 넘어 예배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교리는 결국 하나님에 관한 진리이며, 그 하나님은 분석되고 설명되는 분일 뿐 아니라 경배를 받고 높임을 받으셔야 하는 분이십니다. 많은 교리서가 성경 본문의 주해, 조직화, 논증, 반박 등을 거치다가 결국 교리만 남고 교리가 가리키는 대상을 잊게 만들었습니다. 밀른의 책은 각 교리들을 설명하여 무엇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어 내고, 그분을 예배하게 합니다. 예를 들면 377~379쪽의 '선택'에 관한 부분을 읽어 보십시오. 선택 교리의 논쟁을 어떻게 하나님을 향한 예배로 바꾸어 내는지를 살펴보실 수 있을 겁니다.

셋째로, 이 책은 '지금' 교회가 당면한 문제들에 답을 제공하는 방식의 교리서입니다. 예컨대 대체로 교리서들이 '죄'를 다룰 때 원죄, 원오염 등의 개념을 통해 죄에 대해 설명하는 반면에, 이 책은 포스트모더니즘(221~224쪽)이나 경제적 개인주의(225~227쪽) 등을 다루면서 죄를 설명하는 신선한 접근을 채택합니다. 따라서 이 책은 교리가 '지금'의 교회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를 말해 줍니다.

넷째로, 무엇보다도 이 책은 공동체적인 방식으로 교리를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합니다. 교리 공부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토론일 수 없기에 '가르침'의 요소가 있어야 하지만, 질문과 토론 등을 통해서 의심을 확신으로 이끌어야 하기 때문에 공동체적이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교리를 서로에게 이해시키고 사랑하도록 독려해야 합니다. 각 장마다 달려 있는 (대단히 상세한) 토론 질문들은 전체 내용을 이해시키는 용도를 넘어서, 공동체 가운데 대화와 토론을 가능하게 하도록 주의 깊게 기획되었습니다.

궁극적으로, 이 책은 공동체의 필요와 사용에 최선의 필요를 두고 쓰인 책입니다. 즉 이 책을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더 좋은 책을 찾아봐야지"가 아니라(물론 이런 책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내용으로 사람들과 함께 교제해야지"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 책은 마냥 배우는 책이 아닙니다. 함께 읽고, 예배하며, 토론하는 책입니다.

교리책들의 썰물 시대를 대비하며

물론 이 책만 있으면 공동체적인 교리 공부가 자동으로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결국 밀른의 책과 더불어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하고, 그러한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그러한 사람이 없다면 결국 밀른의 이 책도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겁니다. 책은 위대하지만, 책은 책일 뿐이니까요.

유럽에서 18세기 개신교 스콜라주의의 반동으로 19세기 경건주의가 태동했듯, 교리서들의 르네상스, 즉 밀물 시대인 지금의 반동으로 언젠간 썰물 시대가 올 겁니다. 싱클레어 퍼거슨이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책이나 설교를 비롯한 여러 가지 방편을 통해 많은 교리적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때가 있는 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세 또 체험에 대한 관심이 커져 그리스도인의 체험에 관한 다양한 책들이 바로 다음 날 교회로 밀려듭니다."4)

저는 2011년에 교회를 개척했고, 교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시기에 개혁파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관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교리를 알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의 관심으로 인해 교회가 조금씩 성장해 왔지요(이 말이 자랑처럼 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1990년대 중반 찬양 집회와 제자 훈련을 강조하던 교회들이 성장했듯, 저희 교회 역시 시류를 잘 타서 성장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시류가 끝나고, 썰물 시대가 또 다가오면 저 역시 체험을 중시하는 젊은이들의 요구에 발맞추지 못하는 꼰대 목사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는 저 역시도 기독교의 본질은 잘 모르고, 신앙적 체험도 없는 목사 취급을 받게 되지 않을까요? 만일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저는 우리 교회의 젊은이들에게 체험의 중요성과 함께 그 체험의 뼈대와 내용이 되는 교리를 은혜롭게 전달할 수 있을까요? 공동체적 교리 공부 가운데서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할 수 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다만 은혜를 주시길 구할 뿐입니다.

이정규 / 시광교회 담임목사, <회개를 사랑할 수 있을까>·<야근하는 당신에게>(좋은씨앗) 저자.

각주

1) 싱클레어 퍼거슨, 『성도의 삶』, 장호준 옮김 (서울: 복있는사람, 2010) p. 13.
2) Athanasius of Alexandria, "To the Bishops of Egypt," in St. Athanasius: Select Works and Letters, ed. Philip Schaff and Henry Wace, trans. Miles Atkinson and Archibald T. Robertson, vol. 4, NPNF, Second Series (New York: Christian Literature Company, 1892), p. 234.
3) 제임스 K. A. 스미스, 『칼빈주의와 사랑에 빠진 젊은이에게 보내는 편지』, 장호준 옮김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1) p. 29.
4) 싱클레어 퍼거슨, 『성도의 삶』, 위와 같은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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