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전 유럽의 종교개혁 역사가 한국교회의 현재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애써 무시하고 싶어했던 사람들도 있었고, 과거의 아픈 역사를 지금 되짚어 보는 것이 한국교회를 위해서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는 회의적 시각도 많이 있었다. 종교개혁의 역사에 대해 애써 무관심하려는 회의적 태도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종교개혁이 한국교회의 신학과 선교에 끼쳐 온 그 분파주의적 영향을 생각하면 그 기억을 다시 상기하는 것조차 불경스럽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종교개혁 유산의 영향을 깊이 성찰하고 반성하면서 어떻게 그 사건을 다시 기억해야 할지 판단한 겨를도 없이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은 한국교회의 중요한 현안이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깊이 우려했던 대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교회 개혁 노력은 "이단 심판"이라는 시대착오적 주제와 깊이 얽혀 들어가고 있다. 예장합동 총회 이단대책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사람은 이단 대책을 확실히 정착시키는 것이 개혁신학의 전통을 바로 세우는 것이며 나아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의미 있게 맞이하는 길이라 하고 있으며, 보수 기독교 신문들은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은 교회 개혁이고 교회 개혁은 곧 이단 대처를 통해서라는 인식을 계속 전파하고 있다.

이단 문제가 한국 교계의 중요한 현안이 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이단 구별 지침 같은 것을 만드는 데 열중했었고, 최근에는 동성애와 이슬람을 반드시 배제해야 할 대상에 포함시켰다. 예장합동 총회가 금년 9월 총회 통과를 위해 내놓은 헌법 개정안을 보면 이러한 분파적 배제의 원칙은 더욱 구체화되고 있다. 여성의 목사 안수를 원천적으로 배제하기 위해서 기존 헌법의 "연령은 만 30세 이상자로 한다"라는 규정을 "연령은 만 30세 이상자인 남자로 한다"로 변경하고 있으며, 목사의 직무 조항에 "본 교단 교리에 위반된 동성애자의 세례와 주례와 또 다른 직무를 거절할 수 있고 목사의 권위로 교회에서 추방할 수 있다(이단에 속한 자도 이에 준한다)"라는 규정을 삽입했다. 이 개정안을 내놓은 헌법 개정위원회는 동성애의 확산과 여권신장 등의 사회적 변화에 맞서 자기 교단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개정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고, "양성평등"을 "성 평등"으로 수정한 국가인권위의 헌법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를 대비해서 동성애 반대로 인한 고소 고발 사태에 대응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든다는 점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예장합동 총회 이단대책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다른 일곱 개 교단이 합세하여 성소수자들과 함께해 온 기독교장로회 섬돌향린교회의 임보라 목사를 이단 조사하겠다는 선전포고를 하는 사태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한국교회의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은 이단 심판 논쟁으로 점철되고 있다.

중세의 마녀사냥이라는 것도 다르지 않았겠지만, 이단 대처를 외치는 이들의 주장 속에는 곳곳에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깊이 배여 있다. 아니 이미 내부로부터 변화하고 있고 바닥으로부터 흔들리고 있는 교회 공동체를 과거로 되돌리겠다는 무모함이 가득하다. 변화를 새로운 도전이나 계기로 받아들이고, 그 계기를 통해 새로운 공동체로 재탄생하려는 노력이 아니다. 기존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고, 그 기득권 상실의 위험을 느끼는 사람들을 결집시키려는 노력이며 공격이다. 자신 교단도 아닌 기독교장로회 소속 임보라 목사를 향해 이단 심문을 해 보겠다는 것이 바로 그런 전략이 아닐까? 무엇보다 먼저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자신의 내부를 결속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내부의 문제를 외부를 향한 공격을 통해서 해결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전체 교계를 이 프레임 속으로 몰아넣기 위한 전략이다. 기독교장로회를 포함한 이단 논쟁의 프레임 밖에 있는 교회들을 그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계획이다. 그렇게 하면 그 프레임 밖에 있는 교회의 많은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신들 편으로 더욱 분명하게 뭉칠 것이라는 계산이다.

어쩌면 종교개혁이 이단 논쟁과 만나는 이 모습은 결코 낯선 예상 밖의 일이라 할 수 없다. 우리는 지나치게 이상화된 종교개혁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각 교파 교회들은 종교개혁에 자신들의 정체성의 뿌리를 두고 있고, 자신들의 신학적 교리적 진정성과 정통성의 뿌리를 개혁가들에게서 찾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구 국가들의 민족적 정체성의 뿌리들도 대개는 이 종교개혁과 맞닿아 있다. 그런 점에서 각 교파 교회들이 자신들의 정체를 이상적인 것으로 표현하려는 의지만큼 종교개혁의 역사는 이상적으로 그려졌고,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자신들의 민족적 국가적 기원과 정체성을 이상적으로 그리려 하는 만큼 종교개혁의 역사 또한 그렇게 그려져 왔다.

하지만 종교개혁 시대 참혹한 분열과 갈등 그리고 폭력과 전쟁의 역사를 생각하면, 종교개혁은 그렇게 이상적으로만 그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에른스트 르낭은 "망각이 민족 창출의 근본 요소다"라고 했는데, 이 표현은 종교개혁을 통해 갈라져 나온 교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르낭의 말은 종파주의적 대결과 분열의 과거를 망각함으로써 일체감을 갖는 민족이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대결과 분열과 폭력과 전쟁의 과거를 해소하거나 극복하거나 화해하는 것이 아니고 "망각"이라 했을까? 물론 르낭은 다양한 종족, 언어, 문화 그리고 이해관계들이 모여 민족을 이루는 경우를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 다양한 집단 사이에 과거에 있었던 대결과 적대의 기억을 망각함으로써 민족이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역사를 생각해 보면 서로 대결하던 분파들이 공동의 적을 만나서 함께 뭉침으로써 과거의 갈등을 망각하고 하나의 민족 혹은 국민을 이루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종파주의적 대결이 때로는 폭력적 과정을 포함한 긴 과정을 거치면서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로 결론 날 때, 그것은 적을 악마화하고 배제해 온 편견이 일반화되어 의심 없이 공동체 안에 받아들여짐으로써, 갈등의 해소와 화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체제가 되는 경우다. 그래서 과거의 갈등과 대결 자체를 자신들의 우월의식을 위한 기초로 삼을 뿐 더 이상 화해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로 삼지 않는 경우다. 아마도 이것이 종교개혁 역사가 교파 교회를 성립하는 과정에서 작동했던 망각의 실상에 더욱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 교파 교회들이 종교개혁의 유산으로부터 물려받은 정체성 안에는 이 망각의 영역이 숨어 있다. 곧 타자를 향한 체계화된 편견의 영역이 있고, 해결되고 화해되고 해소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 분파주의 정신이 그 안에 숨어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결과들은 분파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거나 그 중도적 혹은 대화적 해결의 길을 찾아서 이루어진 화해의 결과들이라 할 수 없다. 종교개혁 과정은 해결이나 화해가 가능한 중도적 과정이나 중간 지대를 많이 허용하지 않는 과정이었고, 오히려 어느 한쪽을 무조건적으로 택함으로써 이루어진 과정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생성된 공동체의 일치는 그 자체가 이미 배제의 체계요, 편견의 체계요, 분파주의적 일치다. 참된 화해와 일치의 과정과 가능성은 제거되거나 망각된 체계로 보인다. 그래서 언제든지 그 공동체의 경계나 일치가 위협받을 때는, 해결되지 못한 분파주의적 대결과 폭력적 배제의 태도가 발동한다.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과 이단 논쟁이 서로 얽히는 한국교회의 현실은 이처럼 망각 상태에서 은둔해 있던 종교개혁의 분파주의적 과거가 되살아나고 있는 모습일지 모른다.

갈등과 대결에 대한 참다운 기억, 곧 화해의 책임을 품은 갈등과 대결의 기억을 잊어버린 그 망각은 튼튼하고 높은 울타리 안에서 편안하게 편견을 유지하고 지킬 수 있는 체계를 허락한다. 하지만 그곳은 긴장과 갈등의 현장으로부터의 도피처요, 참다운 평화와 화해를 향한 길을 포기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하느님나라를 향한 믿음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선교적 순례나 모험의 공동체가 아니라 스스로 울타리 안에 갇힌 공동체다. 적과 아군을 식별하는 경계선은 뚜렷해 보여도 경계를 넘어 타인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 공동체다. 이것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이단 논쟁에 몰두하는 한국교회의 모습처럼 보인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진정한 신학적 성찰과 반성은 이 망각의 영역을 파헤쳐 실상을 드러내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갈등과 대결의 분파주의적 승자로서의 자부심이나 명확한 피아 식별의 기준에 대한 확신을 자랑하기보다는, 갈등과 대결의 현장에서 참다운 화해의 일꾼으로 사는 삶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웹진 <제3시대>에도 실렸습니다.
웹진 <제3시대> 바로 가기: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

양권석 /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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