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인상 깊게 남아 있는 성폭력 사례가 있다. H교회에서 지원을 받던 교단 파송 선교사 L이 청년들을 성추행한 사건이다. 고발자이자 피해자인 A는 지난해 12월 기독교여성상담소로 전화를 걸어 왔다. L의 성추행 사실을 폭로했고, 열악한 선교 시스템 때문에 발생한 의사소통 장애로 1년 이상 성추행이 방치돼 있다고 말했다.

A는 성추행을 용인, 방치하는 H교회의 남성 문화에 문제 제기했고, L 선교사 성추행 사실을 여러 번 성토했으나 교회 지도자들은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A는 이들에게 대단히 실망했다. A는 가해자 처벌, 성폭력 재발 방지, 선교 시스템 정비 등 6개월간 '사건 해결의 주체'로서 고군분투했으나 결국 실망한 채로 교회를 떠났다. 만족스럽게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는 A 말이 한참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트라우마적 경험에 매몰되지 않은 A는 '피해자다움'과 전혀 거리가 멀었다. A가 연약하고 무력한 '피해자'임을 거부했기에 교회의 공감과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한 것일까. 도덕적으로 착하고 권력의 속성을 모르는 무력하고 순수한 '피해자 서사'를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남성 문화와 언어에 익숙한 우리들의 한계다.

우리는 오랫동안 남성 언어를 합리성을 담보한 보편 언어로 믿고 '상식적'으로 살아왔다. 그래서인지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난 생각을 하지 못한다. 교회 성폭력은 'H교회 내 공청회' 같은 형식적 민주주의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의식과 문화의 깊은 차원에서 성찰해 봐야 할 문제다. 나는 이 사례를 오랫동안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었다.

'피해자 서사' 거부할 수 있을까

여성에 대한 보편적 가치 절하와 남성 동질성을 보여 주는 사회를 지탱해 주는 '팔루스 로고스 중심주의'(Phallogocentrism)는 가부장제의 이항 대립적 사고방식이다. 이런 경직된 사고방식은 성폭력 사건에서조차 예외가 아니다. '여성 대 남성'을 '피해자 대 가해자'라는 대립항으로 설정해 가부장적 이원 구도와 남근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한다.

피해를 입증하기 위한 목적에서 여성이 계속 무력하고 연약한 피해자 입장을 고수한다면 어떻게 될까. 여성은 모두 동일한 젠더 범주로 간주될 것이다. 여성들이 다양한 개인, 다양한 주체가 되는 사회를 열어 나갈 수 없다. 그러므로 고정된 '피해자 서사'를 거부하고, 전략적으로 다양한 '생존자 서사'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누가 그들 말에 귀 기울여 줄 수 있을까. 신뢰가 무너진 교회 공동체에 A처럼 다시 희망을 걸어 볼 수 있을까. 솔직히 염려스럽다. 교회 공동체 역시 강간 문화에 깊이 젖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 진술을 부정하고 행실을 비난하는 강력한 강간 문화(Rape Culture)에서 아무 문제의식 없이 살아가는 교회 공동체가 참 걱정스럽다.

거짓말이거나 미쳤거나

내가 지켜본 교회 성폭력 사건 중 피해자가 성폭력 사실을 폭로했을 때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순순히 인정한 사례는 단 1건도 없었다. 피해자가 어렵게 꺼낸 이야기는 낭만적 사랑 이야기로, 스킨십으로 미화됐다. 사법적 정의로 가해자를 처벌하고자 할 경우에는 거짓말이나 미친 말로 치부되었다.

성폭력 사건 지원을 위해 변호사와 상담하다가 피해자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정신과 기록부가 필요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란 적이 있다. 법의 보호 대상이 섹슈얼리티를 완전히 탈각한 무성(無性)적 존재인 '착하고 순결한 여자'일 뿐이라니…. 그런 여자는 없다. 성별·계급·권력이 교차하고 직조되는 복잡다단한 성폭력 사건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법의 심판자는 피해 여성에게 오로지 남성 언어만 사용해서 말하라고 요구한다. 여성은 성폭력 피해를 입증하기 위해 그들이 요구하는 '사실'을 제시해야 한다.

가해 남성에게 보복하기 위해 사법적 정의에 기대는 피해 여성은 법이 오히려 여성에게 폭력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법의 심판자는 이렇게 여성을 정죄한다.

"당신은 밤에 거기 있지 말았어야 하며, 그런 옷차림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죽을힘을 다해 저항했어야 하므로 그렇게 하지 않은 당신은 그를 유혹했고 성폭력을 욕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폭력과 법이 공모하는 남성 문화에서 피해 여성은 거짓말쟁이거나 정신에 문제 있는 사람으로 간주된다. 여성이 성폭력을 욕망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여성을 은밀한 쾌락으로 소비하려는 사법기관 태도야말로 남성 섹슈얼리티와 포르노그래피를 대변한다.

강간 문화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는 유아기 유혹 이론(seduction theory)에서, 여성의 히스테리 원인으로 유혹을 지목했다. 프로이트는 여성 환자들이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당했다는 근친 성폭력 이야기가 사실은 유아기의 소망과 바람에 불과했다고 결론을 내린다. 자고로 히스테리 여성은 성적 욕구 불만이 신경증으로 발현되는 '환자'인 동시에 도덕적으로 '나쁜 여성'이자 '죄인'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강간을 여성의 '성적인 환상'으로 전치하는 유혹 이론은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프로이트는 성폭력을 '여성의 범죄'로 구성해 냈다.

신학·정신분석학·성과학 이론을 바탕으로 성폭력을 합리화 및 정당화하는 강간 신화는 '성폭력, 성폭력 피해자, 가해자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 찬 그릇된 신념 체계'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강간 신화는 성폭력을 '학습'하고 '정당화'하는 사회의 집단적 환상이다. 모든 여성을 '사냥감'이나 성적 대상으로만 보는 시선은 오늘날 데이트 문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국처럼 군대의 폭력 문화를 당연시하는 사회일수록 남성은 데이트를 '성적인 목적을 위한 전략적 전투'로 여기고 여성을 이기도록 학습한다. 더군다나 여성의 몸이 '섹스 자본'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데이트는 남녀 간의 물질적·성적 거래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여성은 과거에도 아버지와 남편의 재산이나 전쟁의 전리품 등 항상 '몸'으로만 환원돼 왔다. 특히 오늘날 여성의 몸은 '상품'이자 자본과 권력이 싸우는 암투장(暗鬪場)이 됐다. 자본주의적 가부장제하에서는 남성·여성 할 것 없이 힘·돈·권력을 추구하기 때문에 성희롱과 성폭력이 더 빈번하게 나타난다. 희생자는 거의 대체로 약자인 여성이다. 여성은 권력 관계에 의해 쉽게 '성 상품'으로 전락한다. 여성이 '인간'이었던 적이 없다. 성폭력은 어떤 형태로든 여성을 비인간화하는 데 목적을 두기 때문이다.

성폭력은 원죄의 결과?

가부장제 역사는 성폭력의 역사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원죄의 결과로 욕망, 곧 리비도가 성생활의 일부가 되었고, 그것이 유전되어 모든 자손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모든 인간은 '성적 욕구의 악'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성을 죄와 연결해 성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게 하고 금욕적 태도를 지향하는 '죄론'은 이제 다른 해석을 필요로 한다.

'원죄 의식'은 정신분석적으로 본다면 미분화 상태에서 깨어난 자아의 '분리 불안'일 수 있다. 인간 존재는 이런 분리 불안을 상쇄하기 위해 '사랑'을 필요로 하는데, 그의 왜곡된 욕망이 '소유욕'이다. 자유를 지닌 타자를 나의 소유물로 만든 후, 그를 통해 내 자손을 퍼뜨려 죽음에 대한 불안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성'과 '폭력'이 사용된다. 사랑을 소유하고 잉여로 만들려는 가부장제 '성과 폭력'의 항구적 결합에 의해 사랑은 의미를 상실하고야 말았다. 여성은 원죄의 결과 '사물'의 위치로 격하했다. 단순히 자녀 생산의 도구, 쾌락의 도구가 되었다.

여성은 남성의 두려움, 수치심, 원죄를 담당하는 '희생 제물'이기도 했다. 중세 시대에 많은 여성은 악마와 성교를 한다는 명목으로 마녀로 지목돼 재산을 몰수당하고 갖은 고문으로 신체가 훼손당한 상태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여성에 대한 강간·살인은 합법화됐다.

가부장제 역사 속에서 여성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저질러 왔던 남성 집단은 자신들이 저지른 폭력에 대한 보복 공포[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 1882~1960)식으로 말하면, '박해 불안']를 상쇄하려고 여성에게서 폭력의 이유를 찾아 왔다. 폭력에는 이유가 없는데도 남성 가해자는 항상 여성이 잘못해서 폭력을 쓴다고 말한다.

여성은 이처럼 남성의 부정적 환상이 투사되는 대상이었고, 그것의 '재현'이었다. 여성은 남성의 성폭력 피해자로서 존재하도록 세뇌돼 왔고, 그것이 강간 문화가 됐다. 아무래도 '마녀사냥'을 하던 여성 혐오적 기독교가 강간 문화의 주범이지 않을까 싶다.

성폭력에서 살아남는 길

여성을 '피해자화'하는 강간 문화 속에서, 여성이 피해자를 넘어선 주체가 될 수 있을까. 다시 A 사례로 돌아가 보자. A는 피해자인데도, 피해자 정체성을 넘어서려고 노력했고, 교회의 회복을 꿈꾸었다. 그녀는 H교회가 성폭력으로 인한 상처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반면 H교회 목사와 교인 대다수는 '법적 처벌'과 '교회 분열'을 우려했고 두려워했다. 그들은 두려운 나머지, 성폭력 문제를 대충 얼버무리고 회피해 버렸다. 그러나 성폭력 문제를 에둘러 덮으려 할수록 교회 공동체는 '자기 처벌'과 '자기 분열'로 몸살을 앓을 것이다.

결국 정신분석가 비온(Wilfred Bion, 1897~1979)의 말처럼 교회는 "기억·욕망·이해 그리고 선입관을 버리고" 피해 여성의 말을 들어야 하고, 충분히 오랫동안 그래야 한다. '사실'보다는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 친밀한 관계와 성폭력을 구분할 수 있는 잣대는 결정적으로 "전인적인 관계가 있는가 없는가", "'너와 나'의 관계인가, '나와 그것'의 관계인가"에 달렸다. 피해 여성이 생존할 수 있는 교회 공동체를 만드는 것만이 교회가 성폭력에서 살아남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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