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을까?

'목회자도 세금을 내야 한다', '내지 않아도 된다', '내서는 안 된다'.

최근 한국교회에 던져진 가장 뜨거운 이슈이다. 종교인 납세는 해묵은 논쟁이지만 오랫동안 해결되지 못한 상태에서 해를 넘기곤 했다. 그리고 다시 유예를 해 달라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종교인 납세에 대한 이슈가 처음 공적으로 제기된 것은 1960년대 후반이다. 그 시절은 천신만고 끝에 되찾은 나라의 기틀을 간신히 세워 가던 때다. 초대 국세청장은 하다못해 구멍가게 주인도 품팔이 노동자도 세금을 내는데, 유독 성직자들에게만 세금을 면제한다면, 이는 과세 공평의 원칙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는 취지를 천명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한국 개신교를 대표하던 영락교회가 자발적으로 목회자 납세를 행했다는 점이다. 한국교회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먼저 종교인 납세를 시작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반세기가 흐르고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2017년의 개신교는 종교인 납세 문제에 있어 가장 뒤쳐져 있다. 각자 소견에 옳은 대로 의견을 개진하고 관철하려 한다. 이러할 때일수록 기독교 신앙의 근본으로 돌아갔으면 한다. Ad Fontes! 목회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종으로서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엡 4:12) 사명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목회자 납세를 찬성하는 쪽이나 반대하는 쪽이나 성경 본문을 가지고 말한다. 하지만 종교개혁의 후예임을 자처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경을 제대로 읽어야 할 것이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말했듯, 그리스도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서만 중보자이시지 않다. 그분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모든 현실 사이에서도 중보자이시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마주할 수 있는 대상은 이 세상에 없다. 목회자의 납세 문제도 예외는 아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은 성전세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당시의 일반 세금에 대해 주신 말씀이 있다.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냐? 왕이 세금을 거두면 누가 세금을 내느냐? 왕의 자녀들이냐, 백성이냐?"

"백성입니다."

"그럼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 아니냐? 하지만 저들을 실족하게 할 필요는 없으니,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잡힌 고기의 입을 열어라. 거기서 한 세겔 동전이 나오면, 나와 네 몫으로 세금 징수원들에게 주거라."

아우구스티누스가 구분한 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도성'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면세의 자유가 있지만, '지상의 도성'에서는 평화와 건덕을 위하여 그 자유를 절제하고 세금을 '기꺼이' 내라고 권면하신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수제자 베드로에게 직접 주신 명령이니,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론하고 모든 기독교 성직자에게 해당될 것이다. 더 나아가 마태복음 22장에서 예수님은 적대적인 바리새인들의 교활한 질문을 받으셨을 때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응답하신 바 있다.

칼뱅의 세 가지 렌즈

이처럼 신약성경에는 특별히 목회자니까 세금을 면제해야 한다든지, 면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든지 하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극적으로 체험하고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은, 당시 이방 세계의 중심지였던 로마의 성도들에게 책임성 있는 훌륭한 시민으로서 조세와 관세를 양심껏 성실히 납부하라고 권면하였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그분의 일꾼으로 선한 일을 수행하는 세속 정부에게 말이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롬 13:7)

바울은 (목회자를 포함한) 그리스도인의 납세를 단지 개인의 양심과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와 정책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칼뱅이 말하는 율법의 세 가지 용법이다. 제1용법은 죄를 깨닫고 두려움을 갖게 하는 기능이고, 제2용법은 시민사회를 위한 강제적·수동적인 기능이고, 제3용법은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신자로서 하나님의 법을 적극적으로 지키는 기능이다. 목회자의 납세는 제도와 정책의 차원에서는 제2용법에 해당하지만, 자발적·적극적으로 준수하는 차원에서는 제3용법이 함께 적용될 수 있다.

목회자는 어디에 서 있을까.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교회를 위해 부름받은 종이다. 동시에 목회자는 국가 고유의 영역 주권을 존중하는 시민으로서 살아야 한다. 납세의 의무는 그것을 위한 필수적 조건이다. 그렇다면 국가와 정부가 교회를 탄압하는 도구로 납세를 악용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갖는 것이 온당한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사례비 중 일부를 근로소득세로 성실히 납부하는 일은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마땅한 일이다. 설령 국가와 정부가 납세를 교회 탄압의 도구로 남용한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이 심판하실 일이다. 목회자는 그저 율법의 제3용법을 순종하면 될 일이다.

이분법적 사고는 환상!

성경의 메시지는 모호하지 않다. 목회자를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이 세속 정부에 세금을 납부하는 것이 마땅하다. 세상에서 평신도가 하는 일은 세속적인 직업이고, 교회에서 목회자가 하는 일은 거룩한 직업일까. 그건 이방의 타 종교 스타일이나 중세 가톨릭 스타일인지는 몰라도, 성경 스타일은 아니다. 물론 종교개혁 스타일도 아니다. 기독교 영성은 물질과 영혼을 이분법으로 나누지 않고, 둘 다 하나님이 만드신 실재하는 피조물임을 인식한다. 물질과 영혼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모두 영적인 가치를 지니게 되듯 목회자가 하는 교회의 일과 신자가 하는 세상의 일은 모두 거룩한 소명이다. 그래서 종교개혁가 루터는 만인제사장의 메시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똑같이 거룩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종교개혁은 성직과 소명의 범주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던 중세 구조를 확실히 깨뜨린 사건이다. 신자들의 다양한 직업의 영역도, 목회자의 영역과 그 직책만 다를 뿐, 삶으로 드리는 '예배 이후의 예배'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일이다. 그래서 목회자의 일은 노동자의 일과 달리 근로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교회에서 받는 사례비는 근로소득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기타소득으로 분류해야 한다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루터와 칼뱅은 하나님이 교회와 국가를 그분의 양손으로 쓰신다고 말하였다. 카이퍼는 교회와 국가가 각자 고유의 영역 주권을 가지면서 구별되나 분리될 수 없는 협력 관계에 있다고 해석했다. 교회가 성령의 영적 임재라면 국가는 빵과 포도주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둘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 교회는 특별은총으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영적인 공동선(spiritual common good)을 위한 구원의 공동체이고, 국가는 일반은총으로 모든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사회적인 공동선(social common good)을 위한 창조의 공동체이다. 앙드레 비엘레는 이웃과 물질의 나눔이 없는 성찬은 실체 없는 환상(fantasy)에 불과하다고 혹평한 바 있다.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일을 위해 드리는 헌금과, 국가의 물리적인 일(physical work)을 위해 납부하는 세금은 사회적 성화(social sanctification)라는 동일한 효과를 갖는다.

은혜 있는 곳에 납세도 있어야

그 가운데 신자들이 땀을 흘려 장만한 연보로 조성된 사례비를 목회자가 일상생활에 쓰는 것은, 특별은총 영역이 아니라 일반은총 영역이다. 그러니 목회자 또한 납세를 통해, 시민으로서 세속 정부의 법을 따르고, 목회자로서도 교회의 건덕을 세워, 모범이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사회에도 유익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소득 있는 곳에 과세 있다고 말하지만, 성경에서는 은혜 있는 곳에 노동 있고, 노동 있는 곳에 소득 있고, 소득 있는 곳에 과세 있다고 본다. 목회자도 예외는 아니다. 값없이 은혜로 주의종이 되고, 그 은혜로 주의 일을 한다. 은혜로 받은 소득 중 일부를 다시 이웃을 위한 선물로 세상과 소통하는 영적인 기쁨에 목회자가 소외되지 말아야 한다. 칼뱅은 토지도, 노동도, 임금도, 상업도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다. 세금 또한 국가에 대한 무거운 채무가 아니라, 국가가 교회와 시민을 보호하는 선한 일을 하는 공무를 부탁하며 제공하는 공적이고 정치적인 선물의 순환으로 보았다.

다만 한 가지 조심스레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종교인의 납세는 가급적 평범한 시민들의 납세와 비슷하게 하되, 어려운 형편에 있는 목회자들도 어려운 처지에 있는 서민들이 국가의 지원과 혜택을 받는 자리에서 배제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고소득에 해당하는 일부 종교인 납세도, 일반 사회의 고소득자와 다르지 않게 세율을 적용하는 것이 덕이 된다고 본다. 종교인 납세를 적당히 포장하는 정도로 하거나, 구색 맞추기 식으로 하는 것은, 종교인의 도덕적, 영적 존엄성과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인은 비록 생활이 풍족하진 않다 해도, 정신적으로는 사회의 지도자다.

또한 종교인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 물질이 아니라 영혼,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을 보듬는, 사회적 존재다. 그러니 종교인들이 납부하는 근로소득세는, 가급적 국가에서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와 국제 평화를 위한 목적으로, 따로 사용처를 지정해서, 거기에만 사용하게 하면 어떨까. 그렇게 하면 종교인들은 자기가 내는 세금이 어려운 이웃과 소외되기 쉬운 이슈를 위해 전적으로 쓰인다는 사실에 더 감사할 수 있고, 일반인들도 종교인들이 사회복지와 국제 평화를 위한 정부의 노력에 적극 참여한다는 사실에 함께 더 기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500년 전, 종교개혁가들은 그들의 설교가 끝날 때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와 사회의 공익을 위하여!"라고 외치며 마치곤 했다. 그들은 시민사회에 등 떠밀려 공공성을 말하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공공성을 주도했다. 오늘날 21세기는 영성과 공공성이 융합하는 시대로 찾아왔다. 개혁의 후예인 개신교 목회자가 교회와 사회의 유익이 된다면 왜 납세를 마다하겠는가! 사도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에게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약한 자들에게 자신이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고전 9:20-22)이라고 고백했다. 종교개혁을 통해 갱신된 목회자의 3대 자격은 바른 신학과 덕성을 갖추고, 지식과 교양을 갖추고, 시민사회와 적극적으로 유연하게 소통할 수 있는 사회적 인격의 소유자가 되는 것이었다. 공적 교회의 지도자로서, 시민사회와 소통하는 사회적 인격을 갖춘다는 것은, 납세를 포함한 모든 이슈를 더불어 고민하고 기꺼이 나누고 참여하며 타자에게 희망을 주는 교회가 되게 하고, 사회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며 존경받는 풍경일 것이다.

*이 글은 문화선교연구원 웹진에 게재되었습니다. 문화선교연구원의 허락을 받아 싣습니다(원문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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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용원 / 목사. 은혜와선물교회에서 도시 목회를 하며,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초빙교수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예일대에서 미로슬라브 볼프에게 공공신학을 배웠고, 에든버러대에서는 칼뱅의 공동선 사상을 연구했다. 기독경영연구원에서 만난 분들과 엮인 덕에 '일과 영성'에 대한 책들을 틈만 나면 뒤적거려야 함이 예기치 못한 (부담이자)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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