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영화 '세일즈맨'(The Salesman, 2016)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편집자 주

2017년 1월, 막 미국의 4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가 이란을 포함한 이슬람 7개국 국민의 입국 및 비자 발급을 금지하는 반이민 행정명령 조치를 발표해서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마치 세상을 "그들"과 "우리"라는 이름으로 두 동강 내려는 듯 말입니다.

제89회 아카데미상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른 이란 출신의 아쉬가르 파르하디 감독 역시 입국 금지 대상자에 포함되었죠. 그는 트럼프 대통령의 특별 조치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아카데미 참석을 공개적으로 보이콧했지만, 그의 영화 '세일즈맨'은 오스카를 거머쥠으로써 오히려 트럼프가 정권 초기 야심 차게 시도한 반이슬람 정책의 야만성을 널리 알리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파르하디 감독의 수상이 반트럼프적 정서를 가진 할리우드의 정치적 계산이라는 해석도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세일즈맨'이,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2011)라는 작품으로 이미 아카데미의 영광을 누린 바 있는 파르하디 감독의 명성에 걸맞은 수작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 같습니다.

특히나 '세일즈맨'은, 연극 연출을 전공한 파르하디 감독의 예술적 본향이라고 할 수 있는 연극 무대와 그 연극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에 참여하는 배우들의 일상을 교묘히 엮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다층적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엘리에 관하여'(2009),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2011) 그리고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2013) 등의 전작에서 보여준 섬세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이 영화는, 익숙한 인물들과 꾸밈없이 평범한 대화를 비범하고 독창적인 영화적 구성 속에 담아냄으로써, 가장 일상적인 순간에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섬뜩한 인간 관계의 본질을 탐구하는 영화라고 하겠습니다.

이란 영화라 하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나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담담하고 동화적인 영화를 기대했던 저이기에, 파르하디 감독의 영화들을 보고 나서 느낀 서늘함은 쉽게 떨쳐 버리기도, 설명하기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다만, 이란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공간이 갖는 의미에 충실하면서도, 사회적 환경과 개인적 욕망, 그리고 이 두 인위적 요소를 지배하는 듯한 시간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명제가 겹쳐져 만들어 내는 비극적 운명의 보편성을 놓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영화들은 소소한 일상의 균열들이 빚어내는 현대의 비극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네요.

'세일즈맨'의 첫 장면에서 공연을 준비 중인 텅 빈 연극 무대를 정적인 몽타주로 잡아내면서, 파르하디 감독은 이 영화가 캐릭터의 개별적인 삶을 사실적으로 보여 주기보다는 그들의 운명이 만들어지고 결정되어지는 공간에 더 관심이 있음을 시사합니다. 잠시 암전이 있은 후, 소란스러운 소음이 어수선한 분위기로 장면을 전환하면서, 영화는 이야기의 주인공인 라나와 에마드가 사는 아파트 내부로 관객을 안내합니다.

전쟁이라도 난 듯, 한밤중에 주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다급히 아파트를 빠져나가느라 아우성입니다.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아파트 유리창에 불길한 균열이 생기자, 카메라는 갈라지는 유리창 너머를 응시합니다. 긴박하게 대피를 해야 할 만큼 위태롭게 금이 가기 시작한 아파트 건물 바로 옆에서는, 늦은 시각까지 불을 밝히고 건물 기초공사가 한창인 불도저가 바삐 땅을 파내고 있지요.

그러니까, 영화는 처음부터 건설과 붕괴가 한 덩어리가 된 채, 사람들을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 일순간 거리로 몰아내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이란의 실상을 꼬집습니다. 불도저식 개발, 그리고 사람과 환경보다는 투자가치를 먼저 생각하는 재개발로 얼룩진 도시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말 없는' 카메라의 응시 속에 담긴 원망과 후회가 결코 낯설지 않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시에 폐허로 변해 버린 아파트에 짐을 챙기려고 돌아온 라나와 에마드의 분주한 모습 사이로, 집주인들의 예술적 기질과 지적인 취향을 고스란히 표현하는, 단정했던 보금자리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에마드는 고등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인기 있는 젊은 선생님이자 극단 활동을 하는 연극인이고, 라나는 그의 부인이자 예술적 동지입니다. 극단에서 준비하고 있는 아서 밀러의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에서도 둘은 주인공 부부인 윌리와 린다를 맡아 연기하죠.

살던 집을 잃은 라나와 에마드에게 같은 극단에서 연극을 하는 바박이 자신이 소유한 옥탑방을 빌려줍니다. 몹시 낡고 좁지만 달리 대책이 없던 젊은 부부는 곧장 이사를 하기로 결정합니다. 이전에 살던 세입자가 작은 방에 짐을 잔뜩 쌓아 놓은 채로 이삿날에 나타나지 않자, 집주인인 바박은 무자비하게 방문을 뜯고서 찾아가지 않은 그녀의 짐들을 집 밖에 내놓기로 합니다. 라나와 에마드는 다른 사람의 사적인 영역에 손을 대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속히 짐정리를 끝내고 싶은 마음에 바박을 말리지 않고 방관합니다. 그리고 그 밤, 허락도 없이 집 밖으로 버려진 이전 세입자의 짐은 세차게 퍼붓는 비에 속수무책 젖어 버리죠.

불운의 시작은 이 영화가 계속해서 지적하고 있는 바로 이 지점입니다. 소멸과 생성이 자연스럽게 순환 고리를 만들어야 하는, 옛것과 새것, 혹은 과거와 미래가 서로를 침해하지 않고 자리바꿈을 해야 하는 운명의 접점. 크고 작은 인간의 탐욕이 그 접점에 끼어 들어 원치 않는 운명을 만들어 내는 바로 그 지점 말입니다. 더 빨리 더 많은 것을 얻기에 급급한 성마른 자본주의적 선택으로 인해 건설과 붕괴, 건축과 재건축이 마구 뒤엉킨 그 공간 안에서 사람들 또한 서로에 대한 배려보다는 자신의 편리와 이익을 위해 무심히 타인의 공간을 침범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야 맙니다.

이사 다음 날, 공연을 마치고 홀로 집에 돌아온 라나는 이전 세입자와 그녀의 어린 아들이 남겨 놓은 흔적을 부지런히 지워 버립니다. 여러 남자들과 수시로 관계를 맺었던 이전 세입자의 고객 중 한 사람은, 다음 세입자에게 자리를 내어 주지 못한 '그녀'의 물건들과 아직 깨끗이 비워지지 않은 공간에 밀고 들어온 라나와 에마드가 어색하게 공존하는 아파트를 불쑥 찾습니다. 그는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있던 라나를, 전부터 자신이 찾았던 '그녀'인 줄로만 알고 범하려다가 크게 부상을 입히고 황급히 사라지죠.

이웃들의 도움으로 구출되어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고 돌아와 두려움과 수치심에 사로잡힌 라나와, 아내의 상처보다는 괴한의 공격에 정신을 잃은 라나가 벌거벗은 채 욕실에서 피 흘리는 모습을 이웃에게 보인 것 때문에 더욱 괴로운 에마드는 이제 더 이상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결국, 지각없는 난상 개발이 아파트 벽에 만들어 놓은 균열은 이 부부 사이를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갈라놓은 듯합니다. 따뜻한 시선을 주고받던 둘은 이제 서로의 시선을 어색하게 피합니다. 둘 사이의 명랑하고 지적인 대화는 서로를 향한 날카로운 비난으로 변하죠. 아내는 남편을, 남편을 아내를 소리 없이 원망하고 각자 자신을 분노와 절망 속에 고립시키고 가두어 버립니다.

복수심에 불타는 에마드는 당황한 범인이 흘리고 간 단서를 가지고 범인 찾기에 집착하고, 그런 에마드를 지켜보는 라나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기회가 점점 사라지고 있음을 절감합니다. 두 주연배우의 거듭되는 실수로 공연은 엉망이 되어 가고, 이제 연극은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 윌리의 고독과 소외, 그리고 때 이른 죽음이 아니라, 느닷없이 닥친 불행에 몸부림치는 라나와 에마드를 위한 무대가 된 듯합니다. 파르하디의 영화는 첫 장면에서 암시한 것처럼 두 개의 세계가 성급히 하나로 모아지는 지점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갈등과 비극을 세밀한 필체로 그려 냅니다. 무대 위의 비극과 무대 밖의 현실이 하나가 되는 순간을 어느 편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담아내는 감독의 치밀함은, 거듭된 난개발로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이 곳곳에 균열이 드러난 이란의 도시 풍경과는 대조를 이룹니다.

이야기가 중간 지점에 도달할 즈음, 연극 출연을 잠시 중단한 라나는 극단에서 함께 연극을 하고 있는 이혼녀 사남의 어린 아들을 돌봐 주기로 하고 아파트로 데리고 옵니다. 이 작은 아이는 라나가 내동댕이친 이전 세입자의 이삿짐 사이를 헤집고, 전에 살던 아이가 벽이 그려 놓은 낙서에 정성스레 덧칠을 합니다. 이제 오래되고 잊혀지고 지워져서 창백해진 나무에 진한 초록색을 덧입힙니다. 마치 옛 시간의 흔적을 깨끗이 지워 버리는 데 집착하던 라나와 에마드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소멸과 생성이 하나의 고리로 연결된 하나의 운명임을 보여 주려는 듯 말입니다. 일상적 이미지에다 독창적인 구성으로 새로움을 불어넣는 '세일즈맨'은 사소한 균열들이 치명적인 비극을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의 반환점에 벌써 해답을 숨겨 놓은 것 같네요. 어디서 멈추고 숨을 고를지는 개인의 선택으로 남긴 채 말입니다.

*이 글은 웹진 <제3시대>에도 실렸습니다.
웹진 <제3시대> 바로 가기: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

이희승 / 뉴질랜드 오클랜드대학 강사 및 정신분석가. 동 대학 미디어영화학과에서 '각색 영화에 관한 정신분석학적 고찰'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현재 아시안학과에서 한국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다. 호주정신분석학회 정신분석가 과정을 수료하고, 국제라캉포럼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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