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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치
[서평] 요람 하조니 <에스더서로 고찰하는 하나님과 정치>(홍성사)
  • 크리스찬북뉴스 (cbooknews@cbooknews.com)
  • 승인 2017.07.14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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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

깊은 흑암 중 수면 위에 영(Spirit)으로 운행하고 있던 하나님은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한다. 광활한 온 우주 공간에서 시작하여 땅 위의 작은 생명체들까지,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절대적인 능력이 펼쳐진 후, 하나님은 안식한다. 올바른 목적의 참된 지배 의지(Spirit)를 지닌 유일한 존재인 하나님이 창조 행위를 지속하지 않고 안식하였으며 그 안식을 복되고 거룩하게 하였다는 사실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엿볼 수 있다.

창세기 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그들이 바다의 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 위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고 말씀하셨다"(창세기 1장 26절, 35쪽)라고 전해 준다.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

인간도 지배 의지를 갖는다. 통제하려는 욕구는 본성이다. 인간이 다스리는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 지배욕을 구현하므로 인간은 생존 영역을 확장하고 문명을 이루며 더 편리하고 안전하게 살아왔다. 반면 치우친 지배욕은 전쟁을 불러오고 자연환경을 파괴하며 여러 비극을 유발하였다.

개인 역시 지배욕이 적절히 충족될 때 성취감을 느낀다. 이것이 저해될 때에는 질투, 죄의식, 우울증 등을 겪는다. 이렇게 실패한 존재감은 부적절한 권력욕, 물질 소유욕, 타인에 대한 통제 욕구 등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지배 의지가 타당하게 작용하려면 올바른 목적으로 이끄는 이성이 필요하다.

지배 의지와 이성이 적절히 균형을 이루는 행위는 창조와 안식처럼 하나님의 형상을 따르는 인간의 올바른 모습이다. 구약성서는 인류 최초의 형제인 가인과 아벨의 제사부터 유다 멸망 후까지 이 지배욕과 이성의 균형을 이룬 인물과 그렇지 못한 인물의 행위를 꾸준히 소개한다.

구약성서가 가르치는 이성이란 협소한 기계적 사고 체계가 아니다. 오히려 자연법을 따르고 윤리적 삶을 고수하는 능력이다. 자연법이란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형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세계의 질서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의지로서 세계의 질서가 인간의 언어로 남은 것이 토라, 구약성서이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 중 유일하게 인간만이 그릇된 마음으로 잘못된 가치관을 형성하여 우상을 만들고 영원을 꿈꾼다. 변질된 윤리에 근거하여 사회를 구성하고, 그 사회를 유지할 법과 신분을 만들어 인간 스스로 소외당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회가 옳은지 의심하고 질문하며 제자리로 찾아가려는 능력이 성서가 추구하는 이성이다. 권력 욕구를 지배 의지의 본성으로 지닌 인간은 이성이라는 능력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부여받았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성원으로 속한 사회 안에서 구약성서가 가르치는 보편적 윤리를 추구하고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에덴을 떠난 인간은 더럽고 타락한 세상 속에서 산다. 이성만으로 살아가기에 많은 제약이 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실현 가능한 것을 추구하는 방법이 정치이다.

그러므로 자연법을 따르는 궁극적인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정치적 행위가 요구된다. 단지 사회의 통념이 아닌 보편적이고 성서적인 윤리가 기준이 되어야 하고, 이 올바른 기준을 추구할 이성적 능력이 필요하다.

<에스더서로 고찰하는 하나님과 정치> / 요람 하조니 지음 / 김구원 옮김 / 홍성사 펴냄 / 372쪽 / 3만 2,000원

구원 이루는 유대주의, 정치

에스더서에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이 언급되지 않는다. 심지어 에스더는 유대인 신분을 숨기고, 히브리 이름인 '하다사'가 아닌 고대 페르시아의 우상이었던 별이란 뜻의 '에스더'라는 이름으로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가 된다. 이후 페르시아 총리 하만은 유대인을 몰살할 모략을 세운다. 하나님이 사라진 것과 같은 사회에서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에스더와 그녀의 삼촌 모르드개는 정치적으로 계획하고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이들의 정치 행위는 인간의 본성인 지배 의지에 의한 것이었지만, 꾸준히 하나님의 뜻을 찾았다는 점에서 아하수에로 왕이나 하만과는 궁극적으로 다르다. 아하수에로 왕은 자신의 존재감을 뒤흔든 와스디 왕비를 폐위하고, 국가 전체에 펼치려는 통제력이 신하들로부터 저해당하자 자신의 모든 권력감을 투영한 하만을 총리로 세워 스스로 독재자가 된다.

왕으로부터 최고의 권력을 위임받은 하만은 자신에게 절하지 않는 모르드개에 분개한다. 권력에 도취되어 인간성을 상실한 하만은 모르드개 개인이 아닌 유대인 전체를 복수 대상으로 삼는다. 특히 페르시아 내 잔존하던 반유대주의자들의 적개심을 이용한다. 우상들과 거짓 권위를 거부하는 유대 정신을 핍박하는 반유대주의자들은 곧 우상숭배자이다.

모르드개는 제국의 잘못된 정책에 공개적으로 항의한다. 왕의 측근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에스더를 압박하고, 대중에게는 불의의 상황에 의심하도록 촉구한다. 마침내 신분을 감추었던 에스더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유대인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페르시아 제국의 법을 깨고 하나님이 정해 놓은 도덕적 한계선 안에서 인간의 목숨을 중시하는 자연법을 따라 행동한다.

이후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펼치는 정치적 책략은 흥미진진하다. 특히 획득하는 권력과 비례하며 대담하게 발전하는 에스더의 언어들은 <에스더서로 고찰하는 하나님과 정치>(홍성사)를 고스란히 보여 주는 묘미이다.

공동선

저자인 요람 하조니는 초기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하만의 몰락 이후 유대인들의 반유대주의 척결 등을 공동선이 이루어지는 과정, 영광과 영예의 날에 하나님의 뜻이 구현되는 것이라고 본다. 이 구원과 이스라엘의 존속에도 깊은 연관성을 부여한다. 이스라엘이 성서 윤리에 근거하여 세상 속에서 옳은 정치적 행위를 했을 때 자유로웠고, 그렇지 않을 때 멸망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세대를 거쳐 공동선을 유지하는 것이 문명과 인류를 보호하는 것보다 성서적이며, 인류의 구원을 위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비폭력'과 같은 고등 도덕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정치적 행동인 무차별 살육을 비판하는 도덕적 우월감이 오히려 지역 윤리이며 우상숭배라고 지적한다.

하조니 설명에 의하면, 공동선을 목적으로 하는 무력은 순수하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하조니 논리를 따라갈 때 인간에게 남은 하나님은 누구일지 되묻게 된다. 정치적 행위로 이루는 구원의 타당성과 함께 꾸준히 주장하였듯이, 목적을 위한 수단의 정당화는 우상숭배자들이 범하는 가장 큰 오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에스더서에 숨겨진 정치철학적 담론만큼 흥미로운 것은 하조니의 내러티브다. 하조니는 유대 정신이란 단지 민족적 경계가 아닌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태도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지역 윤리에 의해 이러한 정신을 핍박하고 멸시하는 사상을 반유대주의, 유대혐오주의라고 일컫는다. 그는 전작인 <구약성서로 철학하기>(홍성사)에서부터 꾸준히 이런 유대혐오주의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 내내 무리에서 뒤쳐지는 자들을 괴롭히는 아말렉 족속에 대한 비난을 에스더서에서는 아각 자손 하만과 연결한다. 그리고 이후 역사에서 지속된 우상숭배와 반유대주의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면서 우회적으로 근대 이후 유럽의 계몽주의 지식인들에게 20세기 중반 나치 인종주의에 함구한 책임을 묻는 듯하다. 그의 내러티브는 현대의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대척점까지 지속된다.

본서의 결론인 "텔아비브로 날아드는 미사일"(280~301쪽)에서 텔아비브로 날아오는 미사일이 공중 폭파된 것은 하나님의 기적적 간섭이 아닌 숙련된 이스라엘의 군사적 능력이며, 이렇게 구체적으로 노력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인간 이성의 가능성을 제안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의 의도가 어떠하든지, 에스더서 한 권을 통해 성서적 보편 윤리대로 반유대주의자들의 핍박에 맞서 유대인의 구원을 이룬 사건을 설명한 후, 텔아비브로 미사일이 날아온다는 소식을 전한다면, 대다수에게는 이스라엘에게 미사일을 날린 팔레스타인을 유대 혐오자로 인식하는 과정이 선행한다. 매우 정치적이다. 저자인 하조니는 우상숭배에 반대하는 전 인류적인 성서 윤리를 그저 민족적 유대주의로 적용하려 한다.

기독교 영성

하조니는 <구약성서로 철학하기> 277~322쪽에서 서방 교회 아버지인 터툴리안이 철학의 도시 아테네와 성서의 도시 예루살렘을 구별한 것을 지적한다. 기독교가 이성을 무시하고 맹목적으로 계시를 따른다고 비판한다. 이렇게 성급한 일반화의 태도는 에스더서를 정치적으로 고찰할 때 여전히 비춰진다.

특히 하만에게 불복종한 모르드개의 행위를 분석하면서 이와 대조적으로 초대교회 신자들의 순교를 체념의 행위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로마제국에 의하여 순교하기까지 초대교회 신자들이 고수한 신앙을 맹목적으로 제국에게 순종한 체념으로 보기 어렵다.

유대인과 이방인, 노예와 자유인, 남자와 여자, 불평등한 경제구조로 구분되는 극소수 귀족층과 다수 하층민의 장벽을 넘어 이웃을 나의 몸과 같이 여기는 행위는 다분히 정치적이다. 이러한 성향은 기독교가 확장되는 근거가 되었다. 이는 로마제국과 복잡한 관계에 놓이는 것을 의미했다.

"유대주의에서는 유대인의 신에 머무는 한 로마의 신들과 경합할 일은 없었던 것과 달리, 기독교의 신의 보편성에 대한 주장은 로마제국의 질서와 기독교 사이에서 긴장을 유발했다. 그 결과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중요한 사상적 과제로 떠올랐다. 이런 과제에 대해 바울은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이 세상의 온간 권위는 신이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세속의 권력 또한 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니 기독교도는 이에 따라야 한다고 말이다. 로마서에 담긴 바울의 생각은 수동적 복종이라고 불린다. 복종을 긍정한 것이 아닌 현세를 초월한 종교적 의미와 눈앞의 현실 간의 긴장감이 그 전제로 존재한 것이다."1)

수동적 복종, 하조니 표현을 따를 때 이 수동적 순종(53쪽)은 일종의 처세술과 같다. 체념이 아닌 주체적으로 결정하여 행동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정치적 힘을 쌓아 두는 행위다. 이는 에스더서 초반에 모르드개가 페르시아의 관리로 살며 반역자들로부터 아하수에로 왕의 목숨을 구하는 일, 에스더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왕비가 되었던 과정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인간성을 파괴하는 우상과 이를 조장하는 세상 권력에게 불복종하는 저항의 영성은 기독교 역사에서 큰 역할을 차지해 왔다. 기독교는 이 저항의 영성을 성례전 속에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2)

"성찬은 종말론적 저항과 전복을 꿈꾸게 한다. 필자는 이미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고 계급과 남녀와 민족의 차이가 없어지고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된다는 바울의 표현을 어퍼파시스적(Apophasis)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기존의 세계 질서와 로마의 권력에 대한 간접적인 저항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 저항이 종말론적으로 구현되는 구체적 시간과 장소는 바로 성찬식이다. 교섭과 전이, 반전과 전복이 이루어지는 제3의 공간이다.

(중략) 세례가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의 확인과정과 인준의 절차라면 성찬은 그 구체적 결과물로서의 실행이다. 탈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성찬은 세례로 시작된 무언의, 간접적인, 그러나 결연한 의지를 담은 어파퍼시스의 구체적 실체다. 로마의 지배하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꾸며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은 발칙한 항거이기 때문이다. 결국 탈식민주의 이론을 차용함으로서 어파퍼시스적이며, 혼종적이고, 제3의 공간을 추구하는 세례와 성찬의 연속성이 분명하게 드러난다."3)

불복종의 정치 행위가 반드시 폭력과 권력 추구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을 포함한 자연을 위협하는 세태를 인식하고 옳은 가치관을 추구하며 소외된 이들을 돌보고자 평화적으로 연대하는 정치 행위도 분명히 존재한다.4) 거대하고 복잡하게 존재하는 정치 구조를 떠나 고요히 영성을 추구하고 빈자의 모습으로 사는 등 비정치적 행동을 선택하는 것 역시 하나의 정치적 의사 표현이다. 예를 들어 초대교회의 사막 교부들이나 탁발수도회의 초기 모습은 하조니가 그토록 강조하던 양치기 영성에 가깝다.

예수

무엇보다 우상에 불복종하고 구원의 길로 되돌아가는 진정한 저항의 모습은 예수 자체에 있다. 예수의 활동은 로마제국과 유대 율법주의에서 구별되는 정치적 행보다. 특히 변질된 율법 적용을 강조한 유대교 지도자들과 달리 예수의 가르침은 율법을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는 이들과 평민들에게까지 널리 받아들여졌다. 율법 체제에서 소외당하는 이들은 구원에 참여할 수 있었다. 율법을 준수하는 것과 생존 문제가 전혀 부딪히지 않는 부자들에게는 끊임없이 올바른 구원이 무엇인지 고찰하도록 도전를 줬다.

자연법을 찾아가는 이성의 역할을 강조하는 예수의 가르침은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 잘 드러난다. 여행길에서 강도를 만나 상해를 입은 유대인을 유대교 성직자인 랍비조차 그대로 방치한다. 그런 그를 돌본 이는 당시 유대인이 멸시한 사마리아인 장사꾼이었다. 자기 역시 괴로운 처지에 있는 인간이 눈앞의 버려진 이의 고통을 공감하고 함께 짊어진 것이다.5) 인간의 편협한 감정과 사고를 극복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따라 사는 모습이다. 욕심 많은 세상에 도전하는 하나님의 뜻이다.

예수는 이 정신을 '사랑(agape)'이라고 설명한다. 결국 이러한 활동을 위험시한 유대교 지도자들과 로마제국의 정치적 야망이 맞물려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반역자로 몰리고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당한다. 그의 죽음은 율법주의와 제국에 불복종한 결과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의 행동도 저항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으로 이 땅에 온 성육신보다 더 큰 일은 알지 못한다. 아버지에게 철저히 순종한 성육신은 신으로서 스스로를 부정한 사건이 된다. 타락 가운데 있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그 인간과 동일한 존재로 제한된 시공간 속에 들어온 일은 하나님 관점에서는 전복에 가깝다.

이뿐만이 아니다. 십자가에 달린 아들이 고통으로 아버지를 찾을 때 아버지인 하나님은 침묵한다. 아들의 읊조림을 불복종한다. 하나님은 결국 원하는 대로 구원 계획을 성사하고야 만다. 그리하여 신의 아들인 예수가 인간의 죄를 한 몸에 모두 지고 처형당하게 둔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서로에게 전적으로 순종하는 동시에 불복종한다.

무엇보다 예수의 진정한 저항은 바로 부활이다. 예수는 죽음에 불복종하였다. 질투심과 열등감, 전 세계를 통제하려는 비뚤어진 권력 욕구 등, 이성이 사라진 지배 의지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그는 3일 만에 다시 살아났다. 궁극적인 필멸에 불복종하고 하나님의 형상의 원형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죽음으로 죽음을 이긴 새 창조의 모습을 초대 교부인 요한 크리소스톰은 다음과 같이 찬양했다.

"죄 사함이 무덤에서 부활하였으니, 아무도 거듭 실패한다고 애통하지 말지어다. 우리 구세주의 죽으심이 우리를 해방하셨으니, 아무도 죽음을 두려워 말지어다. 주께서 죽음을 이겨내심으로써 그 죽음을 쳐부수셨도다. 주께서 저승에 내려가시어 그곳을 멸하셨도다. 저승이 그분의 살을 맛 봄으로서 괴로움을 겪게 하셨도다."6)

초대 교부도 지적하듯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죄로부터의 인간의 해방이다.

구원

하조니는 이전과 같이 매우 현실적이고 지독한 신학의 고민을 던진다. 보편적이고 성서적인 윤리 기준을 지닌 채 자유롭게 살아가고 싶지만 어쩌면 우리는 현실 속에서 그저 차악을 선택하는 삶을 지속하는지도 모르겠다. 실제 인식과 언행 사이의 괴리가 존재하는 것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핑계도 대지만, 책임을 회피하기에는 여전히 남아 있는 지배 의지가 너무 눈에 띈다.

이성과 균형을 이루는 정치적 판단은 사실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목격하듯이 세상은 약한 자가 아닌 강한 자를 돕는다. 정결과 도덕 사이에서 적절한 상태를 유지하는 이를 성서 밖에서 찾는 것도 쉽지 않다. 폭력과 부정부패가 난무하는 현실에서 승자가 된 집단은 구약성서의 윤리를 언급할 때 어디까지 동조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구약성서를 단순히 정치철학적으로만 볼 수 없다. 정치철학적 지혜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뜻이 구원으로 연결될 것이다.

랍비인 저자의 타당한 통찰력과 논리의 전개에도, 결국 발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궁극, 참 하나님의 형상이란 사실이다. 강한 자만 돕는 세상에서 약하고 소외당한 이를 찾는 예수와 그가 설파한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정치적 한계를 뒤덮을 것이다. 이성으로 정결과 도덕의 균형을 찾아야 올바르게 살 수 있는 율법의 가르침을 예수는 완성하였다.

오히려 구약성서의 윤리는 끊임없이 반유대주의를 찾아 없애는 정치적 처세를 사랑으로 극복하라고 가르치는 듯하다. 성스러움과 정의의 문제를 고민하며 모순 속에 살아가는 인간을 긍휼히 보고 격려한다. 매일 스스로를 부인해야 살 수 있는 인간의 정체성이 결국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위로한다.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이민희 / <크리스찬북뉴스> 명예편집위원

각주

1) 우노 시케키, <서양 정치사상사 산책 - 소크라테스에서 샌델까지>, 신정원 역(파주: 교유서가, 2014), 70쪽.
2) 최근 예배학자 안덕원 교수는 세례와 성찬에 대하여 기존의 평면적인 고찰을 뛰어넘어, 호미 바바(Homi Bhabha)가 주장하는 제3의 공간의 개념으로 세례와 성찬이 갖는 사회·정치적 저항의 의미를 연구하였다.
"탈식민주의 이론으로 바라보는 기독교 세례 예식: 저항과 어파퍼시스(Apophasis) 그리고 제3의 공간을 중심으로," <신학 논단 Theological Forum>, 79(2015): 257-282,
"탈식민주의 이론으로 바라보는 기독교 성찬: 혼종성(Hybridity)과 제3의 공간(The Third Space)으로 구현하는 프롤렙시스(Prolepsis)," <복음과 실천신학 The Gospel and Praxis>, 38(2016): 146-178.
3) 안덕원, "탈식민주의 이론으로 바라보는 기독교 성찬," 165-166쪽.
4) 전 세계적으로 탈핵 운동을 해 온 NGO 그린피스가 고리원전 1호기 영구 정지 시 벌인 퍼포먼스를 예로 들 수 있다.
조정호, "'고리1호기 영원히 잠들다' 그린피스 영구정지 퍼포먼스," <연합뉴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6/19/0200000000AKR20170619001600051.HTML", 2017년 7월 9일 접속.

5) 우노 시케키, <서양 정치사상사 산책>, 67쪽.
6) "성 요한 크리소스톰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의 설교," <한국 정교회 예식서: 부활주일 의식>, 44-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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