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 - 역사적 자료에 기초한 초대교회 모습> / 로버트 뱅크스 지음 / 신현기 옮김 / IVP 펴냄 / 80쪽 / 6,000원

성경에서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를 가장 확실하게 보여 주는 비유는 목자와 양의 비유일 것이다. 예배의 회복을 아무리 외치고 교회의 회복을 간절히 원한다 할지라도 목자와 양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교회의 온전한 모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선명한 진리가 선포되고 그 진리로 사람이 변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목자와 교회에 들어온 양과의 어떠한 인격적인 만남과 교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성경적인 교회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진리에 갈급하고 지친 영혼들이 말씀을 통해 심령의 변화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목자를 세우셔서 영혼을 맡기심은 교회에 세우신 하나님의 질서이고 그 교회를 말씀으로 세워 가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표적인 목자와 양의 관계를 보면, 여러 이유로 교회와 목회자에게 상처를 받아 폐쇄적인 관계로 익명성을 가지고 교회를 다니고 목자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맹목적인 관계로 교회를 드나든다.

이 둘은 현대 교회의 타락으로 발생한 안타까운 죄의 결과이지 결코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대형 교회에서 열리는 예식장과 콘서트 문화를 반영하는 예배와 1~7부까지 붕어빵 찍어 내듯 진행되는 예배 속에서 우리는 성경적인 목양을 꿈꿀 수 없다. 잘 정돈된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고 영혼의 변화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리고 진리의 영의 역사로 그에게 필요한 말씀이 들리겠지만 건강한 목양권에서 이루어지는 예배라 하기에는 부족할 것이다.

교회는 무엇인가. 물러설 수 없는 전통적인 의견으로는, 교회는 진리로 영혼이 변화되고 그리스도께 접붙여지는 곳이다. 영혼이 거듭나야 하고 생명이 살아나는 곳이다. 십자가의 선명한 복음과 하나님의 존재가 선포되고 그 앞에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와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곳이다. 이런 역사가 필수적이다. 이것과 함께 교회는 교제하는 곳이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의 짐을 지는 곳이며, 어둔 세상에서 나그네요 동역자로 살아가는 곳이다.

본 책은 현대 교회가 잃어버린 그 무엇을 은밀하면서도 여운이 남게 드러낸다. 빌립보 출신의 푸블리오스 형제가 한 가정의 저녁 식사에 초대된다. 그곳에서 일어난 예배와 성찬, 교제와 나눔과 의견 조율, 여자와 남자, 종과 주인 그리고 아이와 어른 등 그가 본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로마 시대 한 가정의 모습인데, 그곳은 교회였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생명 공동체였으며 불같은 논리의 말씀은 없어도 성령의 인격적인 사귐이 있는 따뜻한 곳이었다.

필자는 사실 이 책을 읽어 나갈 때 좀 당황했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로마 시대 가정 교회 현장과 성도의 모습과 달랐기 때문이다. 대개 황제숭배와 제국의 논리를 부정하며 생명 바쳐 예배하는 모습을 그린다. 물론 유대인 문화 속에 손 대접과 체면 문화, 마을의 명예를 지키는 전통이 있어 그러한 환대의 풍습이 있다는 사실도 안다. 그러나 황제와 그리스도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고 세례는 곧 사자의 밥을 의미하는 시대에 이런 일상의 예배가 드려진다는 것이 놀라웠다.

어쩌면 이러한 선입관은 필자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하지만 우리는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카타콤을 만들어 예배했고 로마의 법을 따르기보다 어린양 예수의 법을 따라 인간 횃불이 되어 로마의 도시를 밝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성경에서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돌과 톱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학대를 받았다는 말씀도 들었다. 그래서 1세기 교회 예배를 바로 떠올리면, 그런 삶과 죽음 사이에서 절박하게 예배하고 성찬을 나누며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주를 따르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또한 1세기 교회들이 다 책에 소개된 것처럼 예배했다고 우리는 생각할 수 없다. 성경에 나오는 고린도교회를 보아도 대형 버스가 비탈길을 내달리는 것처럼 교회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고 음란과 부패와 죄의 종노릇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야고보서처럼 작은 교회더라도 세상성이 교회 안에 들어와 세속적 가치가 교회를 장악한 것을 볼 수 있다. 요한계시록처럼 이단에 넘어가거나 주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들도 있다.

이 책은 1세기 교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부수고 원초적인 교회와 예배의 모습을 보여 준다. 너무 자연스럽고 평화롭고 인격적이다. 또한 목사와 성도라는 평신도의 구분도 없고 서로가 서로에게 평등하다. 주인과 종이 같은 대접을 받고 남녀가 똑같이 존중받는다. 모든 위계질서는 무너지고 경직되고 긴장하는 것 없고 일체의 위화감이나 경계도 없다. 예배하는 데 어떠한 정해진 순서와 형식도 없고 설교에도 중간에 질문하고 대화하고 토론하며 함께 결론을 얻는다. 이처럼 평화로울 수 있을까. 과연 1세기 예배가 이러했단 말인가.

예배란 무엇인가. 우리의 생각으로는 1세기 예배를 이해할 수가 없다. 예배는 진리의 전달자가 있어야 하고 회중의 간절한 마음과 무엇보다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드려져야 한다. 그중에서도 개신교는 말씀의 권위를 최고로 여기며 그 시간에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에게 말씀을 주신다고 생각한다. 예배가 끝난 후에 설교를 듣고 나눌 수는 있어도 선포되는 시간에는 질문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필자는 과연 이 작은 책이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 주기 원하는 것인지 고민했다. 이 책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리고 이 시대 교회에게 무엇을 요청하는지 듣고 싶었다. 1세기 때 예배로 돌아가자는 것인가. 내가 볼 때는 불가능하다. 역사적으로 예배는 변화해 왔고 그 시대와 공동체에 적합한 모습을 갖추었다. 시편 찬송이라는 것도 그 시대 속에서 불러진 것이지 그것만이 합당한 예배라고 이 시대 모든 교회가 그렇게 부를 필요는 없다.

예배란 이전에 했던 것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도 아니고 이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니라 성경이 가르쳐 주는 대로 하나님을 그 시대의 역사와 문화에 맞게 경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1세기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그것만이 참된 예배라고 주장하며 그대로 돌아가자고 할 수 없다. 1세기 교회는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과 사회적 배경 속에서 가장 합당한 모습을 지닌 것이고 우리 시대도 부족하지만 많은 고민과 토론을 거친 예배의 모습일 것이다.

글을 맺으며 그래서 필자는 1세기의 교회 예배를 보며 여러 자료를 찾아가며 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분석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 책은 이 시대 교회가 잃어버린 소중한 가치를 안겨 준다. 필자가 볼 때 그것은 바로 인격적인 사귐이다. 예배라고 할 때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상태에서 최선을 다해 최고의 효과를 만들어 내려는 현대 교회가 따라갈 수 없는 자연스러운 역동성이 있다.

현대 교회에서 목자와 양이라는 인격적인 관계는 무너진 지 오래다. 서로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 신앙의 모습은 개인적인 양태로 축소됐다. 이 책은 이런 현실에서 인격적인 관계가 반영되는 예배가 무엇인지 깨우쳐 준다. 목자와 양의 분명한 기준은 없지만 모두 목자 되신 그리스도를 향해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은 분명하다. 그것만으로도 이 시대가 잃어버린 목자와 양의 바른 관계가 성립되고 이 시대가 배울 수 있는 모델이 된다.

또한 1세기 교회는 건물이 없다. 가정교회는 교회일 뿐이지 가정이라는 말이 붙지 않는다. 앞으로 이 시대에 교회가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예측해 볼 때 더 이상 예배와 경건을 소비하는 구조는 오래가지 못할 것 같다. 그러면 1세기 교회를 통해 우리는 공동체에 인격적 사귐이 풍성하여 건물을 넘어 이웃과 화목하고 연대하는 모습을 그려 나가야 되지 않을까. 이제는 건물 교회보다 사람 교회를 세워 감으로 하나님나라를 펼쳐 가야 하지 않을까. 푸블리우스가 들려주는 '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 우리의 예배와 일상과 신앙을 점검한다.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방영민 /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열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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