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자들이 보여 주는 여유나 너그러움의 역설

나는 새로운 만남과 접속을 통해서 연대와 확장을 경험하고자 소셜미디어를 적극 활용하는 편이다. 하지만 '열려 있기에 누구나 언제든 접속하고 참여할 수 있는 세계'라는 소셜미디어의 특성상, 항상 연대와 확장만 경험하는 건 아니다. 종종 여러 이견을 가진 사람들과 부딪친다. 그들 가운데 일부와는 꽤 격렬한 논쟁을 벌일 때도 많다.

그럴 때마다 나는 꽤 여유 있는 모습으로 대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공격적이고 신랄한 표현들이 오가는 중에도 너그럽고 재치 있게 대응하는 인물로 보인다. 그러면 그런 나를 칭찬하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주는 분들이 생긴다.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과도 인격적이고 수평적인 대화를 하려는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그런 칭찬이나 반응은 나를 난감하게 만든다. 그분들과 조금 더 대화를 나눠 보면, 그런 사람은 상대적으로 뛰어난 인격 수양을 했거나 어떤 깨우침을 얻었다며 짐작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것들과는 큰 상관이 없다.

나는 내가 속한 세계에서 내가 가진 것들이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런 여유나 너그러운 모습이 가능하다. 나는 한국 사회나 교회에서 상대적으로 가진 게 많은 쪽이다. 나는 한국 사회나 교회에서 '나의 위치'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원을 졸업한 40대의 결혼한 남성 성직자. 나는 한국 사회나 교회에서 상대적으로 가난한 편이나, 어떤 맥락에서 내게는 가난함도 '가진 것'으로 작동한다. 이 말은 내가 속한 세계에서 나는 작든 크든 일정한 인지도나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의미다. 그런 나는 가부장적이고 이성애 중심적인 정상 가족 담론이 주류인 세계에서 '가진 자'에 속한다.

그러니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도 내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위협하듯이 다가오지 못한다. 간혹 누군가 내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위협하듯이 다가와도, 나는 내가 '가진 것들 덕분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나와 함께 살아가는 성소수자들이나 여성들이 경험하는 세계는 전혀 다르다. 그들은 사회나 교회, 가정과 일상적인 관계에서 다른 의견을 드러내면 쉽게 부정되고 위협당한다. 심지어 '다른 의견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도 일상에서 매 순간 존재 자체가 부정되거나 위협당한다.

그렇게 일상에서 존재 자체가 부정되거나 위협당하는 경험을 한 사람들은 '가진 자들처럼' 여유 있거나 너그러운 모습으로 살기 어렵다. 하나라도 더 가진 사람들이 보여 줄 수 있는 가진 자의 겸손과 경청은 그들에게 사치일 뿐이다. 현실 세계에서 상대적인 약자나 사회적 소수자는 '자신의 목소리'나 '다른 모습으로 살 수 있는 기회'를 갖기 어렵다. 그런 사람들에게 일상에서 항상 여유 있고 너그러운 모습을 보이거나 겸손과 경청을 갖추라는 건, 매우 비현실적이고 잔인한 요구다.

주류가 모든 규칙을 만들거나 규칙 그 자체가 되는 세계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류가 되고자' 애를 쓸 수밖에 없다. 그게 자신의 목소리를 갖거나 다른 모습으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얻는 현실적인 길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그렇게 규칙의 일부가 되거나 어떤 식으로든 규칙에 영향을 줄 수 있어야 지속적인 생존과 의미 있는 삶이 가능한 게 현실 세계다. 그러니 스스로 상대적인 약자나 소수자라고 인식하더라도 주류가 되고자 최선을 다한다. 아니면 본인도 주류라고 '착각'하며 살거나, 주류가 아니라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 온갖 '은폐'와 '흉내 내기'를 하며 산다.

한국 사회나 교회에서 전해지고 유통되는 '좋은 지도자상'이나 '훌륭한 인간상'을 가만히 들어 보면, '완벽한 남성상'에 가깝다. 하지만 그 완벽한 남성상은 현실 세계에서 만나거나 볼 수 있는 남성이 아니다. 그보다는 아름답게 꾸며진 '환상'에 가깝다. 그런데도 그 환상을 기준으로 여성들은 부족하거나 열등한 존재 취급을 받는다. 대다수 남성들도 끊임없는 자기 계발과 검열을 통해 완벽한 남성상을 쫓아야 한다는 강박과 경쟁으로 내몰린다.

이처럼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는 세계. 구조적으로 그런 세계를 강요하고, 심지어 영혼에게 속삭여 스스로 그렇게 살도록 만드는 사회와 교회. 우리는 이런 세계를 원했던 걸까. 당신과 나는 이런 세계에서 살기 위해서 그토록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건가.

'신본주의'라는 명분으로 이용당하는 신의 이름

"공동선을 위한 관심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창조자께서 의도하신 대로 인간이 번성할 수 있는 정의롭고 조화로운 사회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학의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교회와 신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폴 에이비스, <성공회 신앙의 길: 성공회 교회론의 핵심>, 비아, 9쪽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관상과 행동, 기도와 정치, 그리고 신비와 예언은 본질적으로 일치한다. 복음을 떠나 '영성'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복음을 떠나서는 '사회 복음'도 없다. 달리 말하면, 기독교의 하나님은 사회적인 하나님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사회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고, 그 본성을 인류와 공유하는 하나님이다."
- 케네스 리치, <사회적 하나님: 교회는 왜 사회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는가>, 청림출판, 10쪽

2017년 한국 사회는 몇 가지 긍정적인 변화와 시도에도 커다란 문제에 부딪혔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단 한 번의 실패로 다시 도전할 기회마저 잃어버릴 수 있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그러니 운이 좋아서 '가진 자'로 사는 사람들은 갖고 있는 건 꽉 움켜쥐고, 하나라도 더 가지기 위해 반칙이든 뭐든 모든 걸 동원한다. '못 가진 자'로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가진 자가 되려고 노력하며 온갖 수를 쓴다. 과정은 결코 중요하지 않다. 오직 결과로만 말할 뿐이다.

결국 가진 사람이나 못 가진 사람이나 '공포와 불안'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고 전념하는 현실. 많은 전문가가 짚어 주듯이, 이 문제는 다양하고 촘촘한 사회적 안전망이 있어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생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그런 논의는 늘 뒷전이다. 공포와 불안은 늘 개인이나 '연장된 개인'인 가족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된다.

'거리의 철학자'라고도 불리는,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는 최근 출간한 <네가 나라다>(길)라는 책에서 이런 한국 사회의 현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가 보기에 현재 50대 이상은 전쟁 전후에 경험한 생존 자체의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혔다. 30~40대는 IMF 이후에 경험한 사회 주류에서 탈락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혔고,ᅠ20대 이하는 기회 자체를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그렇게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혀 있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 거기에는 파편화된 개인과, 저항하거나 조정할 수 있는 상상력과 힘을 상실한 껍데기 사회만 남게 됐다. 그리고 파편화된 개인과 불능 상태의 껍데기 사회만 남은 세계에서는, 모든 걸 독점한 소수와 생존 이외에는 그 무엇도 상상할 수 없는 다수로 나뉜 게 점점 당연한 현실로 굳어지고 있다.

그런 독점을 조정할 수도, 함께 연대하여 저항할 수도 없는 사회. 사회적 안전망을 위한 조정은 끊임없이 유예되고 저항의 상상력은 계속 거세당하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오늘날 한국교회는 '또 다른 희망'일까, 아니면 '왜곡된 희망'일까.

내가 보기에 아직까지도 대다수 한국교회는 불공정하고 무능한 한국 사회에서 왜곡된 희망으로 존재하는 것만 같다. 그들은 '변혁적 희망의 유예'를 통해 생기는 빈틈에 기생해서 자신들이 희망인 척하며 '가짜 복음'을 판매하고 있다. 그들은 '신본주의'를 들먹이면서, 실은 저 하늘 너머에 신을 가두어 놓고 자신의 욕망을 덧입혀서 '이것이 진짜 신이다'라며 판촉하기에 바쁘다.

그들은 '기업가적 주체성'을 가진 '자기 계발하는 개인'(self-empowering individual)이자 똑똑하고 능동적인 '소비자'(consumer)로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사회에서 생존하고 성공하는 게 제1의 목표다. 그리고 그 목표를 위한 발판이자 합리화의 좋은 명분으로 '신의 이름'이 필요할 뿐이다.

그런 교회나 신자들은 '나중에' 만날 저 하늘 너머에 계신 주님 마음이 중요하다. 그 주님 마음에 합당하고자 오늘도 끊임없이 '노오력'하는 게 중요하다. 그렇게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을 계속 유보하는 인간과 사회가 되어야 한다. 바로 그런 가르침이 신자유주의적 인간관과 사회관을 강화한다는 비판은 중요하지 않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자신들이 강조하는 왜곡된 신본주의가 신자유주의적 인간관과 사회관을 강화하는 게 '좋은 일'일 수도 있다. 그게 자신들의 생존과 성공을 담보해 주니, 그것이야말로 그들에겐 '진짜 복음'일 수도 있다. 신의 이름이나 신의 뜻은 자신들의 성공을 위해 필요할 뿐이다. 나와 내 가족, 내가 사랑하는 몇몇 범주에 속한 사람들의 행복과 성공을 약속하지 못한다면, 그건 신이 아니다. 말 그대로 신은 그저 자신들의 성공과 행복을 거들 뿐이다.

신은 낯선 존재의 얼굴과 삶으로 다가오신다

"성서에 의하면 타락은 해일처럼 갑자기 들이닥치지 않았다. 천천히 한 방울 한 방울 조금씩 시작되다가 지구를 완전히 뒤덮는다. 성서의 역사가 그러하듯 세계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중략) 하나의 행동은 다음 행동의 문을 열며 점점 더 타락하게 된다. 이런 이유에서 많은 인생의 법칙들이 날마다 양심적인 행동을 하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중략) 우리는 실수를 저지른다. 수치심과 죄책감은 변명과 합리화와 정당화로 이어질 뿐이다. (중략) 한때 유행했던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은 틀렸다. 사랑은 '미안해'라고 과감히 말하는 것이다."
- 데스몬드 M. 투투, 음포 A. 투투 공저, <선하게 태어난 우리>, 122~123쪽

'임마누엘'(Immanuel).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와 그리스도교 전통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 즉 임마누엘이라는 신앙고백에 기대어 시대마다 교회와 신자들에게 끈질기게 질문해 왔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하느님나라를 맛볼 수 있도록 안내하는가. 어떤 지옥에 저항하도록 이끌며 함께하는가. 이런 질문에 응답하는 교회와 신자들에게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나와 다른 타자. 그들과 이어지고 얽힌 관계와 구조'가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물론 그런 질문을 마주하더라도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구체적이고 위협적인 공포나 불안을 쉽게 무시하고 추상적인 사랑과 은총으로 급조한 판타지적 세계를 만들 수 있다. 그렇게 허술한 판타지적 세계에서 하느님나라를 안내하는 척하며 지옥과 싸우는 것 같은 쇼를 할 수도 있다. 이는 분명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그런 '멋진 쇼'야말로 이 시대의 대형 교회나 그처럼 되기를 갈망하며 흉내 내는 많은 교회가 가장 잘하는 부분이다. 그들은 다양하고 촘촘한 사회적 안전망은커녕, 그나마 있는 사회적 안전망으로부터도 보호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임시 피난처' 역할을 할 때가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일정한 규모나 관계를 갖춘 교회'가 제공하는 또 다른 형태의 사회적이고 정서적인 안전망이라도 간절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존 교회로 인한 온갖 고통과 괴리감에 시달리면서도 '일말의 기대와 관계'를 버리지 못하고, '아직은' 교회에 다니거나 교회 주변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남성, 이성애, 가부장적인 정상가족 담론, 더 가진 사람을 위한 성공지상주의가 지배하는 교회와 사회. 그곳에서 여성, 성소수자, 또 다른 형태의 가족 구성, 가진 게 없어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삶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임을 자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 나 또한 정상 가족 담론이 뿌리내린 사회와 교회에서 꽤 오랫동안 소수자였고, 그 이뤄질 수 없는 정상 가족 담론의 피해자였다.

남성, 이성애, 가부장적인 정상가족 담론, 더 가진 사람을 위한 성공 지상주의가 지배하는 교회와 사회 안팎에는 그런 피해자이면서 아직은 교회를 떠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맥락에서 그들은 '생존자'다. 그런 생존자들이 읽는 성서는 더 이상 '이전의 성서'가 아니다. '성서 너머의 성서'이자, 우리에게 '다른 세계'를 안내해 줄 성서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우리 각자가 또 한명의 생존자라는 자각을 가져야 한다. 그런 생존자의 오감과 삶으로 성서를 읽고 그리스도교 전통을 마주해야 한다.

무엇보다 또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성서를 읽고 재해석하며 다시 구성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교 전통을 재해석하여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새로운 꿈으로 나아가는 디딤돌로 삼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모르는 세계'가 있다는 걸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생존자의 관점과 맥락으로 함께 읽는 성서와 그리스도교 전통. 그 과정을 함께하는 생존자들끼리도 서로에게 모르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걸 인정하는 태도와 입장. 바로 이렇게 '다르고 낯선 빈틈'을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그 과정에서 맛보는 주님의 정의와 은총, 환대와 연대를 통해 우리는 참된 교회와 그리스도인으로 세워진다.

익숙한 것들의 사회와 교회에서 '우리들의 하느님'은 낯선 존재의 얼굴과 삶으로 다가오신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은 낯선 존재라는 구체적인 얼굴과 삶으로 다가오신다. 우리에게 익숙한 존재와 방식을 넘어, 우리에게 낯선 존재와 방식, 사실은 우리가 낯설게 만든 존재와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관구장들은 동성애 혐오와 관련된 편견과 폭력에 반대하며, 개인의 성적 성향과 관계없이, 필요한 사목적 보살핌을 제공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러한 편견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적 권리로부터 발현된 것이 아니며, 모든 관구장들은, 동성애자에 대한 어떠한 범죄적인 처벌들에 대한 거부의사를 재확인한다.

관구장들은, 세계 성공회를 포함한 그리스도교 교회 내에서 사람들의 성적 정체성에 따라 그들을 차별 대우하는 일이 있었으며, 이에 따른 깊은 상처가 발생하였던 점을 인지한다. 이러한 모든 상황에 대하여 관구장들은 그들의 깊은 슬픔을 표명하며, 신의 사랑은 그들의 성적 정체성과 관련없이 모든 사람들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재천명하며, 교회는 이와 다른 어떠한 의미도 전달하지 않아야 한다고 확신한다."
- 2016년 1월 중순, 영국 캔터베리대성당에서 개최된 세계 성공회 '관구장 회의'에서 발표한 성명서, <Communiqué from the Primates’ Meeting, 2016>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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