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어르신들, 손주가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아이고 또 왔네. 덥지, 여기 와서 수박 좀 들어."

[뉴스앤조이-박요셉 기자] 구미시니어클럽 이원재 관장과 할머니들이 유쾌하게 인사를 나눴다. 경북 구미시 도량동 한 주공아파트. 이곳은 구미시니어클럽이 운영하는 '은빛둥지'라는 사랑방으로, 할머니들이 박장대소가 끊이지 않는 곳이다.

이원재 관장과 7월 4일 은빛둥지를 방문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머리가 희끗한 할머니 십수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뼉를 치며 일행을 맞이했다. 한 할머니가 기자에게 "예쁘게 생겼네. 색시가 있냐"고 묻자, 다른 할머니들이 모두 자지러졌다.

이곳 할머니들은 대부분 연령대가 70~80대로, 혼자 산다. 거의 매일 같이 은빛둥지를 찾는다. 삼시 세끼를 해결하고, 식후에는 달달한 믹스 커피와 함께 담소를 나눈다. 관광버스를 타고 인근 산과 바다로 야유회를 다녀오기도 한다. 한 할머니는 "여기 오면 이웃도 만날 수 있고, 집에서 못 먹는 음식을 실컷 먹을 수 있다"며 웃었다.

은빛둥지는 얼핏 보기에 노인정 같다. 하지만 조금 다른 면이 있다. 여기 오는 어르신들은 모두 '일'을 한다. 같은 사랑방 할머니를 데리고 병원에 같이 가거나, 약 먹을 시간을 제때 챙겨 준다. 거동이 불편해 밖에 나오지 못하는 분을 위해 집으로 도시락을 갖다 주기도 한다. 이원재 관장은 "주민들이 사랑방을 중심으로 서로 보살피고 돕는 돌봄 관계를 형성한다"고 말했다.

이원재 관장(사진 왼쪽)이 은빛둥지 어르신들에게 안부를 묻고 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어르신들이 이동할 때마다 이용하는 보행기. 구미시니어클럽에서 사랑 고리로 대여할 수 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봉사나 노동을 하면 적절한 보상도 주어진다. 돈을 주는 건 아니다. 구미시니어클럽이 자체 개발한 '사랑 고리'를 제공한다. 어르신들은 봉사 성격에 따라 1~2고리를 받는다. 사랑 고리는 일종의 지역 화폐다. 시중 돈으로 환산하면 하나당 5,000원이다. 어르신들은 사랑 고리로 구미시니어클럽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물건을 사거나 미용, 청소, 교육 등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다른 곳에 기부도 할 수 있다.

사랑 고리는 구미요한선교센터 설립자 김요나단 신부(85·김장호)가 국내에 처음 도입한 개념이다. 그는 미국 성공회 소속으로 1994년 사제 서품을 받고 한국에 와 구미요한선교센터를 만들었다. 초기에는 무의탁·호스피스 환자와 중증장애인을 돌봤다. 2002년부터는 구미시니어클럽을 위탁 운영하며 지역 내 노인 복지·일자리 사업을 펼치고 있다. 지금은 센터 창립 초기 때 자원봉사자로 함께했던 이원재 관장이 실무를 맡고 있다.

국비 유학생 1호→성직자
오늘날 교회 역할은
불평등·빈부 격차 해소

김요나단 신부는 원래 사제가 될 생각이 없었다. 그는 1959년 이승만 정부 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국비 유학생 1호다. 서울대학교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하고 미국 오클라호마대학교에서 화학공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미국 석유 회사 BP-AMOCO 연구소에서 근무하다 1991년 59세에 조기 은퇴했다.

사제가 되겠다고 다짐한 때는 1988년, 일주일간 서울을 방문했을 때였다. 1959년 한국을 떠난 뒤 두 번째 방문이었다. 김 신부는 옛날과 달라진 서울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과거 볼 수 없었던 높은 빌딩이 거리에 즐비했고 도로에 차가 가득했다.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실망감도 컸다.

"1980년대에는 한국 기독교가 급성장을 이루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교회의 성장이 사회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사회 안에 불평등은 이전보다 더 커져 있었다. 자본주의 시대에서 교회는 불평등을 해소하고 인권을 보호하며 취약 계층을 돌봐야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을 하는 교회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때부터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동료들은 65세에 은퇴하면 대기업 고문이 되어 고액의 자문료를 받으며 골프를 치거나 해외로 여행을 다닐 생각을 하는데, 나는 그런 탐욕스러운 생활을 꿈꿀 수 없었다. 사제가 되어 한국에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겠다고 다짐했다."

김 신부는 은퇴 후 캐나다 토론토성공회신학교에서 신학을 배웠다. 1994년 미국 성공회 서부 뉴욕 교구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대한성공회 부산교구에 파견됐다. 이후 부산에서 빈민·철거민 등 어려운 이를 돕다 이듬해 구미로 사역지를 옮겼다.

김요나단 신부는 어려운 이를 돕겠다는 마음으로 회사를 나와 늦은 나이에 성직자가 됐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일방적 봉사는
또 다른 폭력 될 수 있어

구미요한선교센터를 설립하고 10년이 지났을 때, 김 신부는 지금까지 해 온 봉사 활동에 문제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봉사를 받는 이들의 의존성이 커진다는 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환자나 장애인들이 점점 무기력해졌다. 한쪽은 시혜를 베풀고, 한쪽은 서비스를 받는, 수직적인 구조로 이뤄지는 봉사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런 관계는 오히려 폭력이 될 수 있겠더라. 서비스로 그 사람을 제한하고, 인간소외를 야기하는 것 같았다. 수평적이고 협력적인 구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미국에서 '타임 달러'라는 개념을 알게 됐고, 이를 한국 실정에 맞게 고쳐 '사랑 고리'를 도입했다.

사랑 고리는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는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남에게 도움을 받는 사람도 충분히 다른 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사랑 고리는 모든 노동에 동일한 가치를 부여한다. 의사든 무직자든 누구나 일정량 봉사 또는 노동을 하면 1고리를 지급한다. 이는 사랑고리은행에 적립된다. 이후 자신이 필요할 때 사용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기증할 수 있다."

사랑 고리는 외로움과 실의에 빠진 이들을 회복하기도 한다. 동네에는 1급 중증 장애와 심한 우울증을 갖고 있던 40대 여성이 있었다. 또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던, 앞 못 보는 할머니가 있었다. 구미니시어클럽은 40대 여성에게 도움을 부탁했다. 할머니에게 매주 두세 번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어 달라는 부탁이었다. 이 일은 당사자들에게 큰 변화를 가져왔다. 3개월 후, 평소 사람들과 만남을 꺼렸던 40대 여성은 마을 행사에 참석해 이같이 말했다.

"봉사를 통해 나는 다시 태어났다. 지금까지 나는 받기만 할 줄 아는 쓸모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전화를 걸 때마다 할머니께서 즐거워하고 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자의식이 달라졌다."

김 신부는 말했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을 섬기러 오셨다. 쓸모없고 무시당하는 사람들 곁에서 함께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의 이웃이 되라고. 이제 우리가 그 말씀을 순종해야 한다."

구미시니어클럽은 노인 일자리 창출을 위해 20여 개 작업장, 미용실, 농식품 가게 등을 운영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1시간 봉사하면 1고리(사진 왼쪽 하단)를 받을 수 있다. 1고리는 구미시니어클럽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사용할 수 있다. 사진에 나오는 상품은 모두 1고리로 살 수 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사랑 고리 운동은 다른 지역으로 서서히 확산하고 있다. 서울 노원구, 경기도에서 비슷한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특히 노원구 '타임 뱅크'는 지역 주민들의 봉사 시간을 적립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이들은 아이 돌보기, 어르신들 은행 업무 대신하기, 가게 일 돕기 등 지역 안에 일손이 긴급히 필요할 때 서로 도우며 타임 뱅크를 실험하고 있다. 김 신부는 말했다.

"우리들의 봉사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지역사회를 구성원들이 서로 돕고 함께하는 공동체로 회복할 수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 한국교회는 바알의 하나님을 믿는 교회가 많은 것 같다. 교회가 어떤 하나님을 믿는지 다시 살펴볼 때다. 우리를 위해 섬기고 돌아가셨던 예수님의 삶을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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