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년 만에 누명을 벗은 목사들을 축하하는 감사 예배가 열렸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뉴스앤조이-이용필 기자] 1975년 11월 22일, 당시 중앙정보부(중정) 김기춘 대공수사국장은 '학원 침투 북괴 간첩단' 14명을 검거했다고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재일 동포 유학생들이 대학교에 침투해 학생들의 데모를 지시하고 사회불안을 조장해 국가 변란을 꾀했다는 것이다. 중정은 유학생뿐만 아니라 같은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도 붙잡아 갔다.

한신대에 재학 중이던 김명수·나도현·전병생 목사는 중정 발표 한 달 전, 서울 남산에 있는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한신대 재일 동포 유학생 김철현 씨의 지시를 받아 유신 철폐 시위를 벌였다는 혐의였다. 이들은 약 한 달간 폭행·회유·협박 등을 당했다. 고문 앞에 장사는 없었다. 하지도 않은 죄를 저질렀다고 거짓 자백을 해야 했다. 이들은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 간첩죄, 간첩방조죄로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후 김명수·나도현 목사는 4년 3개월, 전병생 목사는 2년간 옥살이를 한 뒤에야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역사 속에 묻힐 뻔한 사건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도움으로 재조명됐다. 세 목사는 민변 도움을 받아 2011년 재심을 청구했고, 5년 뒤 공판이 열렸다. 목사들은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42년 전 '그 일'을 끄집어내야 했다. 목사들 증언이 이어지면서 법정은 울음바다가 됐다. 구타보다 가혹한 건 옆방 동료의 비명 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단추 하나만 누르면 분쇄기에 떨어진다, 한강에 흘려보내고 월북했다고 하면 그만"이라는 협박도 들었다고 증언했다.

서울고등법원은 지난해 12월 15일, 세 목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법원은 수사 과정에서 고문과 구타를 당한 정황이 확인되고, 이에 따른 허위 자백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검찰이 즉각 상고했으나 대법원은 올해 3월 30일 무죄 확정판결을 내렸다. 42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누명을 벗고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1975년 '학원 침투 북괴 간첩단' 사건으로 중정에 끌려간 전병생, 김명수, 나도현 목사(사진 왼쪽부터). 뉴스앤조이 이용필

김명수·나도현·전병생 목사를 기억하는 이들이 축하 자리를 마련했다.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평화통일위원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 인권센터는 6월 20일, 한국기독교회관에서 '1975년 한신대 간첩 조작 사건 무죄판결 감사 예배'를 열었다. 세 목사를 포함 권오륜 총회장(기장), 김영주 총무(교회협), 권호경 이사장(한국기독교민주화운동), 이상희 변호사(민변) 등 80여 명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감사 기도와 찬양을 올리고, 명예를 되찾은 이들을 진심으로 축하해 줬다. 기장 원로 김상근 목사는 "당신들 뒤에 이런 동료·동지·교단이 있다. 당신들의 아내와 자제들은 당신들을 훌륭한 남편, 훌륭한 아버지로 평가하고 있으니, 그간의 고통을 잊길 바란다"고 위로했다.

20대 중반 영문도 모른 채 중정에 끌려간 세 목사는 은퇴를 목전에 둔 목사가 됐다. 이들은 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한편 다시는 이런 비극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김명수 목사는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김명수 목사 / (간첩 조작 사건으로) 한신대 민주화 운동이 위축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리고 전병생 목사님에 대한 짐도 있다. 전 목사님은 원래 엮일 분이 아니었는데, 100% 나 때문에 그렇게 됐다. 심지어 내가 '간첩'이 되는 바람에 전 목사님은 '간첩방조죄'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우리는 불법 납치돼 한 달간 중정 남산 지하실에 갇혀 있었다. 나 목사님은 요원들에게 두들겨 맞아 고막이 터지고 실명 위기까지 갔고, 전 목사님은 허리를 크게 다쳤다. 고문 후유증은 지금도 우리 삶에 고통을 주고 있다. 현재진행형 사건이다. 신학생 시절 순수한 신앙의 파토스를 갖고 민주화 학생운동에 참여했을 뿐인데 중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우리 사건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조작한 게 바로 김기춘 씨다. 작년 다큐멘터리영화 '자백'(최승호 감독)을 보면, 김 씨가 우리 사건을 간첩으로 조작한 것으로 나온다. 역사의 적폐는 한 번은 반드시 청산된다. 적폐 청산 없이 결코 새 세상이 도래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김기춘 씨는 제작진에게 "기억이 없다", "(재심 무죄판결에) 알지 못한다", "나는 간첩을 조작한 일이 없다", "사법부에서 한 일이고 나와 관계없다"고 주장했다. -기자 주)

전병생 목사는 "우리와 같은 희생자가 나오지 않게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전병생 목사 / 박정희 유신헌법 제정에 맞서 한신대는 가열차게 투쟁했다. 나도 그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학원 침투 사건으로 불법체포돼 한 달 가까이 고문과 폭력을 당했다. 감옥에서 나온 뒤에도 계속 감시를 당했다. 교회를 개척하고도 어려움을 당했다.

언제 또 이런 조작 사건이 일어날지 모른다. 물론 안 일어나야 한다. 우리와 같은 희생자가 다시는 나오지 않게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꿔야 정의·평화·생명의 꽃이 만발하게 피게 될 것이다. 국보법 철폐와 평화협정 체결을 위해 기도하고 마음을 모으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된다. 지금 이 순간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나도현 목사는 당시 학생운동을 안 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나도현 목사 / 민청학련 사건으로 한신대 지도부가 와해됐을 무렵 복학했다. 군대도 갔다 오고, 결혼도 했는데 (학생운동에 동참하라고) 동료들이 내 등을 계속 떠밀더라. 우리는 삶을 한신에서 배웠으니까. 학장과 선생님들이 머리 깎고 나가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는가. 한 번은 걸릴 줄 알았다. 어느 날 아침 세 사람이 와서 나를 남산으로 끌고 갔다. '후두둑' 까이는데 정신이 없었다. 저들이 죄를 엮으려고 사건에 대해 종이에 쓰라고 시켰다. 열 번 쓰니까 내 기억과는 분명 다른데, 종이에 기록된 게 참이 되어 버리더라. 참 묘하더라.

김 목사 말대로 전병생 목사는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었다. 하루는 중정이 문을 열어 놓고 옆방에서 들려오는 전 목사의 비명 소리를 듣게 하더라. 마치 소가 죽을 때 내는 우는소리 같았는데, 미치겠는 거다. 갖가지 방법으로 고문하니 저들이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없는 간첩도 만들어질 수밖에 없겠다 싶더라.

참석자들은 무죄를 선고받은 세 목사와 함께 기쁨을 나눴다. 감사 예배 이후 기념 촬영을 했다. 뉴스앤조이

군부독재 시대가 끝났지만, 국가 폭력은 계속되고 있다. 다큐멘터리영화 '자백'이 다루는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만 봐도 알 수 있다. 국정원과 검찰은 유우성 씨를 간첩으로 몰기 위해 유 씨의 동생을 회유·협박하고 문서까지 위조한 것으로 드러났다. 증거를 조작한 사실이 밝혀졌지만, 제대로 처벌받은 이들은 없다. 대법원은 2015년 10월, 유 씨의 국가보안법 위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민변 이상희 변호사는 감사 예배에서 "국가 폭력은 권위주의 체제에서 일어난다. 이 사회에 어떤 폭력이 있었는지 서로가 깨달아야, 극복하고 일어날 수 있다. 특별히 조선족·재일 동포 중 국가 폭력을 당한 분이 많다. 1970년대 세 분의 목사님과 함께해 줬던 것처럼 이들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여 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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