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 발정제, 강제 결혼과 같은 폭력이 사랑이란 이름으로 포장되는 현실에서 저는 자랐습니다. 저는 26살에 결혼을 했는데요. 당시 저는 결혼을 할지 유학을 갈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결혼하기 전 제게 그러더군요. 나와 결혼하지 않으면 우리 집을 폭파하고 자기도 따라 죽겠다고요. 기가 막혔어요.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의 표현 방식이 이렇다니…."

[뉴스앤조이-박요셉 기자] 현경 교수(61)는 자신의 결혼을 회상하며 말했다. 현 교수에게는 여러 이름표가 따라 붙는다. 기독교 해방신학자, 여성 신학자, 페미니스트, 불교법사 등. 현재 그는 미국 유니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다.

과거 현경 교수는 '전사'의 삶을 살았다. 학생운동을 하다 끌려가 고문을 당했고, 젊은 교수 시절 학교가 지정한 옷차림을 지키지 않았으며, 가부장제 사회의 모순과 폐해를 지적하다 남성들에게 '악마' 소리도 들었다.

그는 자신을 '교회 밖 신학자'라고 소개한다. 신을 설명하는 신학자가 되지 말고, 삶으로 신을 표현하자는 것이 현 교수의 다짐이다. 그는 도움을 구하는 이들의 손길을 전혀 마다하지 않는다. 지금도 한국·미국·프랑스·독일·영국 등 전 세계에서 그의 지혜와 조언을 구하는 이메일에 일일이 답장을 보낸다. 그것이 자신의 미션·목회·선교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즘 북카페 '두잉'은 6월 17일 저녁 7시, 현경 교수와 페미니즘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시간을 마련했다. 참석자 40여 명이 자유롭게 질문하면 현 교수가 답하는 식이었다. 참석자 중에는 남성도 있었지만 질문은 모두 여성이 했다. 페미니즘, 가부장제를 비롯해 육아, 개인 고민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현경 교수(가운데 서 있는 사람)는 페미니즘을 비롯해 육아, 결혼, 개인 고민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말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현경 교수는 편안한 복장이었다. 헤어 제품으로 짧은 머리를 살짝 올리고, 검은색 민소매티를 입고 카페에 나타났다. 온화한 표정으로 행사 내내 연한 미소를 지으며, 참석자들 질문에 성의 있게 답했다. 주최 측은 2시간을 계획했지만,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행사가 끝이 났다.

참석자들 질문과 현경 교수의 대답을 문답 형식으로 정리했다.

패미니즘 발견했을 때
가장 큰 행복 느껴
고통 상쇄할 수 있는
아름다운 것 찾아야

A / 선생님, 오래전 선생님 책을 읽었는데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되어 기쁘고 반갑습니다. 저는 모태신앙으로 자랐습니다. 오래 교회 생활을 하며 그 안에 가부장적 제도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더군요. 오히려 가부장제를 유지하기 위해 교회가 존재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지금은 교회를 떠났습니다. 선생님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성으로 태어나 행복하고 좋을 때가 있었나요.

현경 / 페미니즘을 처음 알게 됐을 때, 제가 여성으로 태어난 게 너무 기뻤어요. 마치 다시 태어나는 것 같았죠. 20세기 중반에 태어난 저는 현재 21세기를 살고 있어요. 격동의 시대였죠. 여러분에게 묻고 싶어요. 여러분은 오늘날 홍준표로 살고 싶나요, 강경화로 살고 싶나요? (웃음) 돼지 발정제 같은 폭력을 사랑으로 위장하는 의식 수준에서 살고 싶으세요, 아니면 세계를 누비며 분쟁을 해결하고 어려운 이를 도우며 평화를 일구는 여성으로 살고 싶으세요?

저는 문명사적으로 봤을 때, 백인이 아닌 게 감사해요. 옛 식민지 나라에서 태어난 것도 감사하고요. 분단국가에서 태어난 것도, 독재 정권과 싸워 이긴 나라에서 태어난 것도, 학생운동을 경험한 것도 모두 감사해요. 그런 청춘을 가질 수 있어 감사하죠. 아픔과 고통을 겪으며 제 자신이 깨지고 다른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피라미드에 금이 가는 시대예요. 가부장 제도가 깨지고 있어요. 이 시대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 전사로, 러버(Lover)로, 여성으로 태어날 수 있어서 감사해요.

B / 병원에 입원했을 때 선생님 책을 읽으며 위로와 힘을 얻었습니다. 저는 운동을 하면서 성폭력과 2차 가해를 당했어요. 지금은 치유 과정을 보내고 있는데요. 예전에는 주저앉아 울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대항하는 힘을 키우고 있어요.

활동가로 살다 보니 비관적인 생각을 많이 하게 돼요. 선생님께서는 문제를 지적하지만 말고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고 그려 보라는 말씀도 하시는데요. 어떻게 하면 그런 상상력과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요.

현경 / 저도 운동권 안에서 성폭력을 당했어요. 그래서 그 마음을 너무 잘 알고 이해해요. 자기 잘못이 아니라는 거 알죠? 너무 힘들 때는 혼자 울지 말고,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울고 말하면 돼요. 절대로 인생의 오점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저항은 굉장히 중요해요. 하지만 동시에 힐링도 중요해요. 저는 트라우마를 극복할 때 불교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불교는 '버려야 한다'고 말해요. 삶은 정말 그런 거 같아요. 불공평해요.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싶을 때가 많아요. 붓다가 이런 말을 했어요. "첫 번째 화살은 맞더라도 두 번째 화살은 맞지 말라." 스스로를 탓하며 자신을 비극적인 상황으로 몰지 말라는 의미예요. 두 번째 화살을 쏜 사람은 누굴까요. 바로 나 자신이에요. 거기서 벗어나는 게 중요해요.

연세가 지긋한 아메리칸 인디언 여성에게 배운 지혜가 있어요. 그들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평화롭게 문명을 이루며 살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유럽인들이 몰려와 수천 년 동안 존재해 온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고 말하며, 원주민을 몰살하고 땅을 점령했어요. 인디언들은 원자력 찌꺼기가 가득한 낙후된 지역으로 내몰렸죠. 만약 제가 인디언이었다면 테러리스트가 됐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들은 지금 어떤가요. 오히려 오늘날 외로움과 우울증에 괴로워하는 미국인을 위해 영성 치유 프로그램를 만들고 상담과 교육을 해요. 저는 인디언 여성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물었어요. 그분이 말했어요. "We know who we are." 외부인이 우리 땅을 빼앗고 종족을 몰살시켜도 우리는 우리가 누군지 알고 있다고. 그래서 자신들의 온전한 기운을 지킬 수 있다고요.

인디언들은 비참한 일이 생기면 그것을 상쇄할 수 있는 한 가지 아름다운 일을 한대요. 누군가 내 형제를 죽이면, 나무를 하나 심어요. 땅을 빼앗기면 아름다운 깃털이 달린 모자를 만들거나 옷에 예쁜 수를 놓아요. 그런 식으로 고통을 상쇄하는 거죠. 삶의 트라우마를 겪은 만큼, 아름다운 것을 찾아야 해요. 친한 친구를 만나거나 미술관에 가거나 시를 쓰는 거죠. 저는 아리아를 듣기 위해 오페라 극장에 가요. 온전하고 아름다운 내 모습이 회복될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게 중요해요.

현경 교수는 비참한 일이 생기면 그것을 상쇄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일을 하라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엄마가 먼저 행복하고
잘 사는 게 중요
혼자 괴로워 말아야

C /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랫동안 뵙고 싶었어요. 항상 선생님 강의를 기다렸는데 아이를 키우느라 갈 수 없었어요. 그런데 오늘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선생님을 뵐 수 있어 너무 기뻐요.

강의 신청서에는 이런 질문을 남겼어요. '내 딸이 어떻게 하면 선생님처럼 당당하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척박한 환경에서 용기를 내고 희망을 피우며 주변 사람들에게 힘을 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그렇게 키우기 위해 엄마인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데 이 자리에 오는 길에 질문이 변했어요. 오늘 낮에, 어머니처럼 여기는 분께서 갑자기 외아들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기가 막힌 상황을 겪은 분에게 제가 어떤 위로를 전할 수 있을까요.

현경 / 삶이 누구에게나 녹록지 않은 거 같아요. 제 스승이신 숭산 스님이 그러셨어요. 태어나는 것 자체가 이미 실수라고.

기독교는 사랑이라는 비전에서 시작한다면 불교는 현실에서 시작해요. 불교에 따르면, 인생에는 두 가지 고통이 있어요. 하나는 방금 말씀하신 것과 비슷해요.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없거나 갖고 싶은 돈·직업·물건을 얻지 못한 것에서 오는 고통이에요. 나머지 하나는 붓다가 경험한 고통이에요. 무엇을 해도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이죠. 이 마음에 자유롭지 못하는 사람은 계속 무언가에 끌려다니는 거예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여자나 남자나 노예나 자유인이나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재라고. 당시 계급사회였던 로마 시대에 예수님은 대자유를 선언하셨어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도 했어요. 인간이 된다는 것은 자유와 사랑을 누리며 살게 된다는 것 같아요.

인간은 미약한 존재예요. 일상 넘어 무언가를 향수하고 존재 근원을 물어요. 종교가 인간의 고통을 위로하고 이 물음에 답을 제시해 줘야 하는데, 현재 종교는 그 역할을 잃었어요. 제도 종교가 부패했기 때문이에요. 종교의 적폐는 말할 수 없어요. 불교를 보세요. 비구니가 비구보다 많은데 비구니에게 투표권이 없어요. 지금 21세기 아닌가요?

기독교도 마찬가지예요. 오죽하면 사람들이 개독교라고 부르겠어요. 물론 깨어 있는 성직자, 교인들도 있지만 부패가 심각해요. 종교가 일반인의 걱정을 덜어 줘야 하는데, 오히려 일반인이 종교를 걱정하고 있는 현실이에요.

원래, 딸을 어떻게 양육해야 할지 물으려 했다고 하셨죠. 저는 먼저 엄마들이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살림'이란 말을 좋아해요. 한국이 만든 가장 아름다운 단어인 것 같아요. 여성의 일과를 폄하하는 측면도 있지만, 살림이라는 말 속에는 밥 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설거지하는 여성의 모습이 담겨 있어요. 여성에게 있는 위대한 힘을 엿볼 수 있어요. 그래서 집안 살림뿐만 아니라 나라 살림, 경제 살림, 정치 살림도 여성의 몫이라고 생각하면 좋겠어요.

제가 미국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한 교회 유치부를 담당했어요. 신기하게 화장을 하고 예쁘게 꾸미고 가면 아이들이 제 말에 집중해요. 그런데 제가 바빠서 조금 신경 쓰지 않고 가면 아이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수업이 안 돼요. 제가 제 자신을 예쁘게 꾸미고 단장하면서 발산하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아이들이 느끼는 거겠죠.

엄마가 먼저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살아 긍정적인 에너지를 품어야 해요. 자신을 먼저 살펴서 좋은 에너지를 만드는 게 아이에게도 남편에게도 가정에도 중요하기 때문이죠. 가장 자기다운 삶을 살고, 딸에게도 자기다운 삶을 살도록 놓아 주세요. 그러면 멋진 사람이 될 거예요.

한 참석자는 교회 안에 있는 가부장적인 모습 때문에 교회를 떠났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D / 선생님. 제 아버지는 목사님이에요. 페미니즘에는 관심 없는 분이에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나마 최근에 페미니즘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궁금증이 생겨 이 자리에 왔거든요. 방금 하신 질문과 연결되는 거 같은데요. 나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해야 하는 건 저도 머리로는 알아요. 그런데 막상 그마저도 못할 때가 있어요. 어떻게 해야 하죠.

현경 / 일단 내가 현재 그런 상태라는 걸 받아들여야 할 거 같아요. 그리고 도움을 구하세요. 하나님이든, 소중한 친구든. 제게도 엄마 같은 친구가 있어요. 제가 육두문자를 쏟아 내며 제 감정을 털어놓아도 저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줘요.

미국에서 우울할 때가 많았어요. 성차별·인종차별 등에 시달리며 열등감과 우울증에 사로잡혔어요.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내가 다른 사람 말에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있었을까. 그들이 요구하는 모습에 나를 맞출 필요가 없겠더라고요. 그냥 나다워지면 되는 거예요.

세 가지만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나는 나에게 진실하게 사는지 △내가 이 진실을 그대로 표현하는지 △내가 이 표현에 책임질 수 있는지.

성취하지 못하는 부족한 자기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사람 내면에는, 분노가 많고 열등감이 가득한 어린아이가 있는 반면 이를 용납할 줄 아는 지혜로운 할머니도 공존해요. 할머니가 그 아이를 껴안고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한다고 상상해 보세요. '괜찮아, 괜찮아. 이 상황도 곧 지나갈 거야. 쨍하고 해 뜰 날이 곧 올 거야.'

친구를 만나세요. 그게 싫다면 움직이세요. 빨래를 하거나 청소를 하는 방법도 있어요. 슬픈 감정에서 벗어나야 해요. 아무것도 하기 싫은 거 알지만 그래도 계속 무언가를 해야 해요. 도움 받는 걸 절대로 부끄러워해서는 안 돼요. 혼자 괴로워하지 말고 남에게 자기를 보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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