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나쁜 하나님' 소개의 말
오늘의 한국교회는 정치적 타락, 종교적 부패, 신학의 허약함으로 인해 파산 직전에 몰려 있습니다. 이는 명백히 신학, 신앙, 교회의 위기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 너머에 치유를 위한 열망 또한 숨 쉬고 있음을 부정해선 안 될 것입니다.

치유와 소생의 가능성을 경험하기 위해 오늘의 한국교회를 지배한 기복과 왜곡된 순수의 풍경을 동시에 전망하는 문학적 시도는 어쩌면 필연이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이러한 시도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교회의 본령을 회복하는 사상적, 신학적 갱신 의지와 흐름을 같이한다고 확신합니다. <뉴스앤조이> 연재 소설 '나쁜 하나님'은 한국교회의 궤멸적 징후를 극사실적으로 해부하고 그 너머의 희망, 치유, 소망의 가능성을 함께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 소설가 주원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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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벽을 바라보며 누운 민규는 문득 겁이 났다. 자신만이 홀로 외딴 섬에 떨어진 고독감에 사로잡힌 것이다.

몸을 일으킨 민규가 주위를 둘러봤다. 구치소내 특별 관리대상자로 지정된 민규는 독방을 사용했다. 굳게 닫힌 짙은 녹빛을 머금은 철문과 온기라곤 전혀 느낄 수 없는 차가운 시멘트 바닥이 영 낯설기만 했다.

두터운 모포를 뒤집어 쓴 민규는 다른 곳에 시선을 둘 수가 없어 돌아누운 자세로 바로 보이는 푸른 벽면을 바라봐야 했다. 독방 구치소 벽면엔 그동안 거쳐 간 수많은 사람들의 낙서자국이 가득했다. 관리자가 수시로 낙서의 흔적을 지우긴 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의 심경이 담긴 오열과 울분의 상흔을 실감할 수 있었다.

'죽여 버릴거야!', '날 이렇게 내몬 세상', '김 XX, 정 XX, 내 손으로 반드시 심판한다.' 

죽음, 원망, 심판에 대한 결의, 거친 울분의 쏟아 냄이 체감되는 낙서들. 민규는 그 울분을 보며 뜻 모를 수치심을 느꼈다. 민규는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슬픔, 비탄, 그에 반해 정의를 실천하고 진실을 폭로한 것에 대한 최소한의 긍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심장과 머리, 모두 순식간에 굳어버리거나 메마른 듯한 건조함으로 다가왔다. 푸른 벽을 보고 있었지만 민규의 마음은 한없이 건조하고 막막한 광야를 걷는 기분이었다. 홀로 광야를 걷는 민규의 발걸음을 어느 누구도 지지하거나 반대하지 않았다. 민규는 한 걸음, 한 걸음 걷고 또 걸었다. 목적지도, 방향도, 최소한 자신이 왜 걸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조차 말소된 상태였다. 민규의 내면을 잠식한 무감각이 그 자신을 아연케 했다.

민규를 이곳까지 이끌어 온 힘은 자책과 충격, 그 자체였다. 민규가 선택할 수밖에 없는 기회와 야심, 그 근원에 자리 잡은 욕망에 대한 뼈아픈 후회가 자책이라면 충격은 신애원 아이들의 유기와 학대, 그리고 방치였다. 그 충격의 도가니 속에서 민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선택한 진실의 폭로 중 민규는 자신을 스스로 저주하는 길을 택해야만 했다. 악마와 함께 악마의 축제에 참여하지 않으면 이 악의 고리를 영원히 끊어낼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충격을 충격으로 맞서서였을까. 모든 걸 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민규는 충격 너머의 길,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은,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길을 걷고 있다는 느낌, 그 건조한 무감각에 스스로 치를 떨었다. 그렇게 치를 떨던 순간, 민규는 자신이 쓴 논문의 마지막 이야기를 떠올렸다. 창세기, 아브라함의 이삭 희생 이야기의 절정은 모리아산 정상에 선 아브라함과 이삭, 두 부자의 마주봄이었다.

제물이 존재하지 않는 제사, 이삭을 바라보는 아브라함의 눈빛, 그의 감각세계의 모든 것이 구치소 푸른 벽면과 마주하고 있는 민규의 내면으로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아들을 바라보는 아브라함의 무정함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신을 향한 무한의 존엄과 신뢰가 살아 숨 쉬는 아브라함의 무정함, 그 무정함은 신을 위해서는 썩 어울리는 것이었지만 살아있는 아들에게는 어울리지 못했다. 그 순간, 아브라함의 모든 것이 민규가 걸어가는 광야의 막막함과 동일시되었다. 아무 느낌도 가질 수 없는, 인간이라 하기엔 너무나 쓸쓸하고 고독하고 신이라 하기엔 여전히 부족한, 이곳도 저곳도 향할 수 없는 부조리의 늪에 빠져버린 아브라함, 그것은 바로 민규의 실존이었다.

일러스트레이터 주원태

무감각의 촘촘한 그물에 포박된 민규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건 손에 칼을 쥐는 것, 그뿐이었다. 칼을 쥐고 신을 향한 제물을 드리기 위해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도륙되어 피를 흘려 신에게로 바쳐져야만 하는 무감각의 상징을 향하는 것 외에 민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기억할 수 없어. 내가 쓴 논문의 마지막, 그 결론이 기억나지 않아.'

칼을 하늘 높이 쳐들고 아들 이삭을 이삭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과 인간다움의 껄끄러움도 걷어내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신의 길, 신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 절대의 명령, 절대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 민규는 그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라고 믿었다. 천형의 무게처럼 자신의 시야를 압도한 푸른 벽의 암담함이 그 증거였다. 민규는 이를 악다물며 마음 깊은 곳에서 소리쳤다. 냉혹한 한기가 몸 구석구석 파고들었지만 민규의 온몸은 어느새 격렬한 화마에 사로잡힌 불덩이 같았다.

'이것이 바로 신에게로 가는 유일한 길이야. 유일한 길이었어. 이랬어야만 했어. 이렇게 해서 진실을 드러내야 해. 저 악마로부터 우리 이웃들을 구원해야 해.’

그때였다. 악마의 울부짖음이 들렸다. 민규가 뒤돌아서서 악마의 음성을 들었다. 그 악마를 보는 순간 민규는 영혼의 숨이 막혔다. 숨이 막혀 견딜 수가 없었다. 울고 있는 악마는 악마가 아니었다. 아들 이삭을 똑바로 바라보라고. 그 살아있는 너의 혈육을 정신 차리고 보라고 애원하는 그 누군가는 악마가 아니었다. 하늘 높이 쳐든 칼을 거두게 하고 그 피의 살육제를 멈추게 하는 그 누군가는 날것의 감각이 살아있는 구원이었다.

갑작스런 혼돈이 민규를 아찔하게 했다. 그 사이 창문 틈새로 새벽 여명이 비쳐들었다. 민규는 잠시 동안 잃고 있던 영혼의 숨이 새롭게 고동치는 순간과 마주했다. 그 마주침 자체가 민규에겐 혼돈이었다. 신의 뜻을 집행하기 위해 무정함의 광야를 걷고 또 걷던 민규의 단호한 믿음을 일순간 멈춰 세웠기 때문이다. 민규는 자신을 멈춰 세운 그 울부짖음을 악마의 유혹이라 단죄하고 그것과 결별하려 발버둥쳤다. 자신은 신을 향한 속죄의 의식을 위해 모든 걸 쏟아 붓는 중이라고 믿고 또 믿었다. 하지만 마음의 결단과 다르게 민규를 멈춰 세우는 울부짖음이 그를 혼돈스럽게 했다. 민규는 자신의 마음 속 혼돈을 종식시키고 싶었다. 단순하고 분명한 심판과 단죄의 세계로 나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민규의 마지막 남아 있는 실감의 세계는 심판과 단죄의 세계를 원치 않았다. 그 무정하지만 정의롭고, 한없이 건조하지만 단호한 결기의 광야로 나아가는 것을 원치 않는 실감의 세계에서 누군가 전력을 다해 울부짖었기 때문이다. 민규는 그 오열 앞에서 멈춰 섰다. 그 울음 앞에서 민규는 자신의 논문, 그 마지막 결론을 스스로 망실해버렸다. 그와 동시에 이삭을 바치고자 했던 아브라함의 믿음, 그 건조하고 냉정한 믿음의 결론도 함께 잃어버렸다.

잠시 후, 독방 문이 열렸다. 교도관 한 명과 김상현 경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김상현은 몸을 잔뜩 웅크리고 괴로워하던 민규가 스스로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볼 때까지 기다렸다. 이후, 짧게 한 마디 남겼다.

- 이제 나가도 돼요. 고생 많았어요.

- 그게 … 무슨 말이야?

- 더 이상의 조사는 없다고요.

(계속)

*'나쁜 하나님'은 주 3일(월, 수, 금) 업데이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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