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은 참 아름답고 뜻이 깊으며 또 그 표현이 넓고 다양하다. 꽃 하나를  표현할 때도 화사하다, 눈부시다, 영롱하다, 아릿답다, 소담하다, 등등이 있다. 심지어 맛을 표현하는 우리말은 39가지나 된다고 한다. 또한 사람의 기질을 표현 할 때도 맛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저 사람 질기구먼, 되게 짜게 구네, 신거운 사람 같으니라고."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아름다운 우리말, 님
  
우리나라 말은 영어나 일본말, 한자 보다 그 표현하는 세계가 넓고 깊다. 한 예로 일본말에는 없는 '모시다'라는 말은 우리나라 말만이 가질 수 있는 참으로 뜻이 깊고 아름다운 말이다.

  "나는 평생을 그대를 내 마음에 모시고 살아 왔오."

  "주님을 내 안에 모십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깊은 뜻을 담고 있는 말인가. 이러한 아름답고 살아있는 우리말 가운데 으뜸은 '님'이라는 말이다. 우리말이 참 재미있는 것은, 몇 해 전에 유행한 노래 가사 중에,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붙이면 남이 되는 아, 야속한 사람"

  "돈이라는 글자에 바침 하나 바꾸면 돌이 되는 아, 야속한 세상"이라는 노래가 있다. 그래서 점 하나에 울고 점 하나에 웃는다는 것이다.

님! 이 말을 듣기만 하여도 설레고 가슴이 뛰는 말이다. 그대는 어떠한가. 님! 이 소리만 들어도 그대 가슴이 마구 뛰는가. 그대 가슴에 아직 님이 살아 계신가? 아직도 그대가 부를 님이 계시다면, 그대의 인생은 눈부시게 빛나리라.

한국인에게 님은 모두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만 나의 님인가?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가장 귀한 이를 높여 '님'이라고 불렀다. 하늘과 임금과 조상과 어른을 님이라 불렀다. 이렇게 윗사람에 대하여 님이라 부르지만, 또 아랫사람이라 해도 우리는 아드님, 따님, 아우님, 벗님이라고 불렀다. 그 중에서도 나그네를 손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여기서 말하는 '손'은 '신'의 다른 말이라고 하지 않는가? 집도 없고 정처 없이 떠도는 사람을 일컬어 손, 즉 신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놀라운데, 거기에다 '님'자를 붙어 그리움과 설레임의 대상으로까지 여긴다는 것은 참 대단한 민족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내가 존경하는 선배 중에 이보철 목사님이 계신데, 그 분은 꼭 공적인 것은 물론이고 사적인 모임에서도 나를 부를 때는 후배님, 채 후배님, 이렇게 부른다. 처음에는 그것이 어색했는데, 서로간에 따스한 느낌, 또 풋풋한 그 무엇을 주고받는 것 같아 좋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 이름이나 직함을 부를 때, '님'자를 붙여서 부르기를 원한다. 병원에서, 은행에서, 교회에서 누구누구를 부를 때면 어김없이 '님'자를 붙여 부른다. 교회에서도 누구 목사님, 누구 집사님, 누구 성도님이라 부른다. 누가 나에게 '님'자를 빼고 내 이름을 부르면 그 사람이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 기분이 몹시 상해지는 게 한국 사람이다.

이처럼 '님'자를 붙여 부르는 것과 '님' 자를 빼고 부르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이다.

외국말은 상대방을 존대하거나 우대하는 표현들이 그리 많지가 않다. 영어는 애나 어른이나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하지 않는가. 옛날에 일제 초기에 우리나라에 서양 사람들이 오기 시작했을 때, 어린 손자 녀석이 자기 할아버지 이름을 함부로 부르며, 그 이름 뒤에 아무것도 붙이지 않고 친구 부르듯이 부르는 것을 보고 우리나라 할아버지가 배은망덕한 놈들이라고 호되게 꾸짖었다는 얘기가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자기 이외에 모든 이웃은 님이 된다. 자기와 만나고 자기와 이웃으로 지내며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님이다. 모든 사람을 자신의 님으로 여기는 마음, 그것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신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신 주님의 이웃사랑을, 우리민족은 오래 전부터 님으로까지 승화되어 사랑하고 공경하며 애타게 불러왔던 것이다.
  
우리는 '예수'(Jesus)라는 이름에다가 '님'자를 붙여 '예수님'이라고 하고, 주인 '주'(主)에다가 '님'자를 붙여 '주님'이라고 부른다. 주님은 우리의 주인 되시는 님, 구원의 주인 되시는 님이시다. 또 유일하다는 의미로 '하나'에다가 '님'자를 붙여 '하나님'이라 부르고,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의미로 '하늘'에다가 '님'자를 붙여 '하느님'이라 부른다. 만약에 '님'자를 붙이지 않았다면 어찌되겠는가. 그냥 '주', '하나', '하늘'이라고만 부른다면, 그것은 우리가 신앙하는 神의 표현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한국 사람들은 사람이나 혹은 신앙의 대상인 신적 존재에게만 '님'이라 부르지 않는다. 우리 선조들은 심지어 들에 핀 들꽃은 '꽃님'이라고 부르고, 또 이름 모를 여러 풀은 '풀님'이라 부르며, 밤하늘에 떠오른 '달님', 아침 하늘에 '해님', 심지어는 농사도구인 쟁기님, 삽님, 괭이님, 장을 담그는 항아리님 등 모든 사물을 '님'이라고 부른다. 참으로 놀라운 민족이며, 정신과 혼이 살아있는 민족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우리는 어찌하여 이렇게 사람뿐만 아니라 사물,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에 대하여 '님'이라 부르는가. 님은 사랑스럽고, 달콤하며 향기롭지만, 또한 님은 그리움이며 애달픔이며, 떨어짐이다.
  
옛날 고려시대에 악장가사에 실린 가요 중에 '가시리'라는 노래가 있다. 그 노래는 '설운 님 보내옵노니 가시는 듯 도셔 오소서. 얄리 얄리 얄라셔 얄라리 야알라'라고 했다. 시인 김지하는 "가시리 가시리를 부르며 보내는 이의 마음 속 님은 서러운 그리움, 가시는 듯 그렇게 돌아오시는 이의 마음 깊은 곳, 그것을 님"이라 풀었다.
  
님은 사랑스러운 존재이지만, 그리웁고 애달픈 존재이다. 가시는 듯, 그렇게 돌아오시는 님, 또 나에게 다가오다가도 또 점점 멀어지는 님, 이렇게 우리 민족은 이 님이라는 말에 많은 뜻과 깊은 의미를 담고, 인생을 아름답고 멋지고 가슴 뜨겁게 살아왔다.

'주'는 나의 '님'이시라

특히 구약의 아가서는 달콤한 님의 입술을 노래한다. "뜨거운 님의 입술, 포도주 보다 달콤한 님의 사랑, 님의 향내, 그지없이 싱스럽고 님의 이름, 따라 놓은 향수 같아.... 님을 따라 달음질치고 싶어라"(아가서 1:1-4).

시무언 이용도 목사는 예수님을 신랑 되는 '님'으로 생각하며, 신랑과 사랑을 나누는 신부가 곧 신앙인라고 말했다. "그의 품에 안기라. 그리고 세상을 다 버리라. 주님의 사랑의 유방을 잡으라. 그러면, 신의 사랑과 그 애무를 받게 된다. 주의 사랑의 손이 그대를 만지시나니 주의 사랑의 입술이 그대를 접촉하시나니, 오 그대여 즐거워하고 기뻐하라. 그대의 옛사람은 변하여 새로운 사람이 되리니 그대의 혼은 변하여 거룩해 지리라."
  
아가서 기자는 야훼 하나님을 신랑으로, 이스라엘을 신부로 생각하고 야훼 하느님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뜨거운 사랑을 그리고 있다. 이용도 목사 또한 신랑 되시는 주님과 서로 사랑을 나누는 것을 참 신앙의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랑하는 님과 사랑을 나누는 그 아름답고 달콤한 사랑을 신앙이라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님과 영원히 사랑하고 달콤한 향기를 맡으며 영원히 살아갈 수 없다. 님과의 만남은 그렇게 달콤하며 아름다우며 행복하지만은 않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듯이 님은 헤어짐이며 그리움이며 애달픔이다.
  
예수님는 십자가에 달려 우리 곁을 떠나가셨다. 무덤 맞은편에 막달라 마리아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제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님을 떠나 보내고, 가슴 아파했다. 떠나간 님, 다시는 볼 수 없는 님, 저 멀리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돌아가신 님, 그 사랑하는 님을 어찌 볼 수 있으랴, 그들은 예수의 무덤 맞은 편에 앉아 떠나간 님을 그리워하며 슬퍼하고 있었다.
  
이처럼 님은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어찌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저 애타게 그리워만 해야하는 존재. 영원한 내 마음의 사랑, 그 애달픈 사랑, 그것으로 우리는 살아간다.
  
우리가 떠나간 님을 애타게 그리워하고 부르면, 님은 내 마음 속에 다시 되살아 나 나를 깨우고 나를 살린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님은 우리가 그리워하고 애타게 부르면, 다시 내 마음 속에 부활하시어 우리의 영원한 님이 되신다.  

님은 나의 생명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 손을 잡을 수 없고, 입맞춤을 할 수 없지만, 그는 우리 안에 영원히 살아있는 우리의 님이다. 우리가 그 님을 애달프게 그리워하고 사랑한다면 우리는 매일 님을 만날 수 있고 님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이처럼 님의 얼굴은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어도, 님은 우리 안에 언제나 살아있고, 또 앞서서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한다.
  
7, 80년대 그 암울했던 시절, 군사독재의 서슬퍼런 탄압과 압제 아래 떨고 있던 우리는 모두가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르고 일어섰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 없고 깃발만 나붓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끝없는 함성
  앞서서가나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가나니 산자여 따르라
                                            (님을 위한 행진곡)

이 노래처럼, 님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새날을 위해 자신을 받치고 떠나간 님, 세월은 흘러가도 언제나 깨어나 외치는 님, 우리 보다 앞서 가서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부르는 님, 그것이 님이다.
  
그래서 우리 가슴속에는 우리 보다 앞서서 역사와 민족을 살아가신 김구 선생, 윤동주 시인, 문익환 목사 같은 분들을 우리의 님으로 그리며 살아간다.
  
님의 존재는 사랑하는 사람만을 지칭하지 않다. 우리가 가야할 앞선 세계로 인도하는 그 무엇. 우리가 깊이 잠들어 현실의 세계에 빠져 헤매이고 있을 때, 우리를 흔들어 깨워주는 그 무엇. 찬바람 불고 눈보라 몰아치고 쓰러지고 쓰러져 일어설 수 없을 때,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그 무엇. 그래서 님은 우리의 혼, 님은 우리의 사랑, 님은 우리의 구원, 님은 우리의 희망, 님은 우리의 미래, 님은 우리의 꿈, 님은 우리의 영원, 님은 우리의 주님이다.
  
새해에는 예수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그리워 해 보자. 그리고 마침내 우리 자신이 누군가의 '님'이 되어 보자. 우리가 사랑하는 아내, 사랑하는 남편, 혹은 교인, 이웃, 꽃과 바람, 바위와 강, 이 모든 존재의 힘이 되고, 희망이 되고, 깨어나게 하는 아름다운 님이 된다면, 우리의 인생은 참으로 복되고 아름다운 존재가 될 것이다.
  
그대는 나의 님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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