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복음이다> / 톰 라이트 지음 / 백지윤 옮김 / IVP 펴냄 / 270쪽 / 1만 1,700원

'복음(福音)', 기독교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 하나다. 그런데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고 통일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용하고 있다. 자유주의와 현대 신학에서는 더 다양한 정의가 있어 모호한 어휘가 되었다. 그럼에도 복음을 사랑하는 열기는 식지 않는다. '복음'이란 어휘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에게 명확한 개념을 정립하고 사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를 통해 복음을 설명하는 연구자들의 복음을 잘 이해할 수 있다.

필자가 정의하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다. 이런 개념 정의로 톰 라이트의 <이것이 복음이다>를 읽었다. 좋아하는 문양호 목사님께서 '나는 깜이 안 된다' 말씀으로 쓴 톰 라이트 서평을 보았다. 필자는 2017년 톰 라이트를 비평하는 독서를 목표로 하고 있어, '깜이 안 되지만' 무모한 태클을 시도하려고 한다. 축구 경기에서 실력이 딸리면 반칙을 한다. 탁월한 선수는 반칙하는 선수를 동료로 좋아할 것이고, 예민한 선수는 반칙하는 선수를 밉게 볼 것이다. 라이트는 반칙하는 선수를 "어리석거나 거리끼는" 것으로 제시한다고 생각한다.

라이트는 기존의 복음 이해를 '충고'로 정의한 뒤, '이스라엘을 구출한 하나님의 계획'으로 새로운 자기 정의를 제시한다. 하나님의 계획이 한 계획(single plan)인 것을 강조한다. 출애굽의 성격을 정치적(노예 해방)으로 이해하고, 예수 사역도 차이가 없는 것으로 제시한다. 정치는 생활에서 가장 실제적이고 결정적인 행동이며, 영적 부분이 아닌 육적 부분이다. 라이트의 복음은 실재 하나님의 해방이 실현될 것을 확신하고 현재를 사는(정치적으로 평등을 실현) 것이라고 한다. 예수가 죽음으로 악 자체를 해소하는 복음을 제시한다(75-76쪽). 이 부분을 읽으면서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II/2, 하나님의 선택>이 생각났고, 정일권 목사의 <붓다와 희생양>이 생각났다.

라이트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제시한다. 그런데 부활을 강조하는 특징이 있다(76쪽 이하). 그런데 부활한 주님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86쪽에서 "부활은 다른 무엇보다 하늘에 가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라이트의 복음은 죽음과 부활 그리고 종말이 되는 도식이다. 필자의 복음은 죽음(속죄제사), 부활, 승천, 우편에 앉으심(통치), 재림주로 오심(종말)이다.

라이트는 복음을 하나님 진노가 사라짐, 아브라함 가계의 회복, 창조 회복, 희생제사보다 대관식으로 제시했다. 라이트는 종교개혁, 계몽철학 등 자기 앞에 제시된 복음 이해를 '왜곡되고 상충된 복음'들로 제시한다. 그리고 이 세상을 바로 잡을 메시아가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것(과거)으로 제시하는데, 하나님 행동이다(156쪽).

라이트는 자기 이전의 이해를 '신화' 이해로 규정한다(159쪽). 그런데 1세기 유대인은 신화 이해가 아닌 바른 복음 이해를 했다고 주장하는 특징이 있다(161쪽). 그리고 낭만주의와 낙관주의를 배척하지만, 결국 과학과 정치의 혁신을 기대한다. 라이트는 예수 죽음을 가능성 개방으로 해석한다(173쪽). 라이트가 그런 의도는 하지 않았겠지만, 175쪽에 하나님이 하신 일을 경축한다는 표현해서는 '예수 죽음까지' 포함한다고 느끼기도 했다. 라이트는 3세기 기독교 지역의 흔적에 대해서 비판하지만, 정작 영국의 기독교 상황에 대해서는 심각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176-177쪽).

라이트의 <이것이 복음이다>에 대한 평을 칼 바르트와 '복서와 검객'을 통해서 비교해 본다. 총평은 "라이트가 바르트의 선택론을 느슨하고 쉽게 설명한 것"으로 평가한다. 바르트는 예정을 '복음의 총화'라고 했고, '인류에서 유일하게 유기된 예수'에 대해서 제시했다. 바르트와 라이트의 차이점은 바르트의 글은 "웅장한 헤비급의 메머드 펀치"이고, 라이트의 글은 "세련되고 살랑거리는 예리한 스침"(스쳐도 사망)으로 분류하고 싶다. 바르트의 글은 강한 자극을 주고(맞으면 머리가 멍한 상태), 라이트의 글에서는 예리한 자극(뼛속까지 뚫은 비수를 맞은 기분)을 느낀다.

독자가 저자와 적대적 관계에서 씨름하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거의 독자가 무참하게 패배를 당한다. 그러니까 세계 챔피언과 링 위에서 한 판 뛴다는 것은 신인에게 챔피언의 한 방을 맞고 죽어도 좋다는 자세여야 한다. 세계 챔피언도 무명의 한 신인으로 시작했다. 나는 무명의 한 야인이다. 세계 챔피언의 무서운 한 방이 무섭지만, 세계 챔피언에게 굴복하고 싶지 않다. 오늘도 링 위에서 무참하게 맹폭을 당하고 내려간다. 그래도 한 방 옆으로 스치는 모습을 보니 매우 기쁘다. 무참하게 맞다보면 한 방은 때릴 수 있겠지? 나는 맞을 때도 눈을 뜨고 맞았고 한 방도 때리지 못했다. 그러나 내일 다시 링 위에 올라가 한 판 뛸 것이다. 나는 올라가고 싶지 않는데 감독이 자꾸 올라가라 한다.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고경태 /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주님의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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