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최유리 기자] 수원 ㅎ교회에 다니는 A는 2015년 교회에서 진행하는 단기 선교를 반년간 다녀왔다. ㅎ교회가 후원하는 불가리아 이승재 선교사의 사역지였다. 20대 중반인 A는 선교지에서 이상한 일을 겪었다. 이 선교사는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라 하고, 어깨에 손을 올렸다.

불쾌했지만 그때는 표현하지 못했다. 한국에 돌아와 알아보니 이 선교사는 상습적이었다. 이 선교사에게 비슷한 일을 당한 사람이 더 있었다. 성추행으로 볼 수 있는 피해를 당한 사람도 있었다. A는 ㅎ교회 담임목사에게 사건을 이야기하고 해결해 달라고 요구했다. 일은 잘 진행되지 않았다. 그는 기독교 상담소를 찾아가고 <뉴스앤조이>에도 제보했다.

ㅎ교회 청년 B는 A를 도와 교회에서 목소리를 냈다. 책임 있는 해결과 재발 방지 대책을 요청했다. 교인들이 정확한 팩트를 알 수 있도록 공청회도 요구했다. ㅎ교회는 이승재 선교사 후원을 중단하고, 올해 1월과 3월, 교인을 대상으로 두 차례 간담회를 열었다. 보도 한 달 만에 이승재 선교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예장통합·이성희 총회장) 총회 세계선교부에 사임서를 제출했다.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됐다. 표면적으로 보면, ㅎ교회는 이번 사건을 제대로 다뤘다. TF팀도 만들고 교회가 두 청년의 요구 사항도 대부분 들어줬기 때문이다. 다른 교회에 다니는 지인들이 "너희 담임목사처럼 사건을 처리하는 사람이 드물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지금 '가나안 교인'이 되었다. 지난 6개월간 이승재 선교사 성희롱·성추행 사건을 해결하려 노력하면서 교회에 대한 회의가 깊어졌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기자에게 사건을 통해 체감한 한국교회의 민낯을 이야기하고 싶다며 연락해 왔다. 6월 4일 일요일 저녁, 서울 사당역 근처에서 둘을 만났다. 쌓인 것이 많아서였을까. 두 시간 넘도록 쉬지 않고 이야기가 오갔다. 현장에서 나눈 이야기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했다.

A와 B는 지난해 말부터 교회에 불가리아 '이승재 선교사 성추행' 건을 알리고 문제 제기했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피해자 A를 도왔던 B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다이어리에 내용을 미리 적어 왔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 교회에서 사건을 공론화하기가 어려웠을 것 같다.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은 계기가 있다면.

A / 교회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를 비롯한 교회 청년들은 교회가 후원한다는 것 하나 믿고 선교를 떠났다. 그런데 거기서 성희롱을 당했다. 교회가 청년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는데, 선교지에서 전혀 케어받지 못했다. 전에는 내가 어른들에게 알리지 않아서 사건이 해결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내가 이야기하기 전에, 담임목사를 포함해 몇몇 어른은 이승재 선교사가 문제가 되는 행동을 반복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회개를 권면하기도 했다. 그 이후 별다른 조치 없이 다시 청년들을 보낸 것이다.

알면서도 해결하지 않은 게 화가 났다. 상식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담임목사는 이승재 선교사가 성폭행처럼 무거운 죄를 짓지 않았다는 이유로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했다. 동의 없는 손 잡기, 하이파이브, 어깨에 손 올리기 등을 '가벼운 스킨십' 정도로 여겼다. 담임목사 역시 교회 홈페이지에 최초 입장문을 올릴 때 '스킨십'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그건 가벼운 스킨십이 아닌 성희롱이고 성추행이었다. 이 선교사는 젊은 여성들에게 손깍지를 끼거나 하이파이브를 강요했고 하이파이브를 하면 손을 꼭 잡았다. 머리를 쓰다듬고 안기도 했다. 이런 사람이 10명 가까이 됐다. 한 명에게는 운전 중 졸리다고 손을 잡아 달라고 하고 손을 주무르고 손등에 뽀뽀도 했다. 자기 집에서 자고 가라고도 했다. 이건 선교사로서 할 수 없는 짓이다. 그래서 교회에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B / 나는 피해자가 아니다. A가 선교지에서 겪은 이야기를 듣고 돕고 싶었다. 이 교회 출석한 지는 7년 정도 됐다. A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교회가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담임목사가 해결해 줄 거라는 신뢰가 있었다. 그래서 한번 이야기해 보자고 A를 설득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 교회에 이승재 선교사 사건을 이야기한 지 7개월이 지났다. 상황은 어떻게 마무리됐나.

A / 이승재 선교사는 총회에 사임서를 제출했고, 소속 선교회도 떠났다. 지금은 안식년을 간 것으로 알고 있다. 교회에서는 공청회를 2회 열었다. 3월에 있었던 두 번째 공청회에서, 우리는 이승재 선교사를 사법 처리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담임목사는 당회를 열어 법적 처리에 드는 비용을 지원할 것인지 논의하겠다고 했다. 결국 사법 처리까지는 가지 못했다. 당회에서도 모호한 답변을 줬고, 경찰 역시 명확한 증거가 없고 이승재 선교사도 해외에 있기 때문에 조사가 어렵다고 말했다.

B / 담임목사가 지난 5월 불가리아에 가서 이승재 선교사를 만나고 왔다고 한다. A가 불가리아 상황이 궁금해 담임목사에게 먼저 만나자고 연락했다. 귀국한 담임목사가 며칠 뒤 우리를 만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 선교사가 우리에게 사과 의사를 전달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승재 선교사가 기도 끝에 안식년을 갖기로 했다는 말을 들으면서 서로 어이없어 했다.

담임목사를 만나고 얼마 뒤 ㅎ교회 한 청년이 A에게 연락했다. 담임목사가 설교 중 이승재 선교사에게 사과문을 받았다면서 사건이 잘 마무리 됐다고 했다는 것이다. 담임목사는 불가리에 다녀온 직후 우리를 만났을 때, 사과문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A가 담임목사에게 메시지로 "이승재 선교사에게 사과문을 받았느냐"고 물었다. 담임목사는 그제서야, 이 선교사가 사과문을 써 왔는데 그 문건을 우리가 법적으로 이용할까 봐 받지는 못하고 보기만 했다고 답했다.

사과문은 이승재 선교사가 여러 여성들을 추행했다고 자백하는 증거다. 우리는 이 선교사를 고소하고 싶었지만, 증거가 없어 하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 상황을 모두 알고 있는 담임목사는 증거를 봤는데도 이 선교사가 부탁했다고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황당했다. 내가 담임목사였다면, 싸워서라도 사과문을 뺏어 왔을 거다. 담임목사는 아직도 피해자는 생각하지 않는구나라고 느꼈다.

- 담임목사가 공청회도 열고 TF팀을 구성하는 등 나름대로 노력하지 않았나.

A /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다. 그러나 피해자 입장에서는 아닌 게 더 많다. "담임목사가 우리를 만나지 못하게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몇 있었다. 담임목사는 초반 3개월은 우리 이야기를 아예 듣지 않았다. 소셜미디어 친구 차단하고, 설교 중에 우리를 부정적으로 표현했다. 공청회 때 본인이 말하기도 했지만, 우리가 자신을 공격한다고 느꼈다고 한다. 언론사에 사건을 제보하니 더 그렇게 느꼈다는 것이다. 그런데 확실히 할 것은, 나는 제보 전 목사에게 여러 번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했다. 그게 되지 않아 제보까지 하게 된 거다.

B / 냉랭하던 목사가 두 번째 공청회에서 태도가 확 바뀌었다. 우리를 돕겠다고 했다. 기도 중에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났다는 것이다. 공청회 끝나고 직접 만나 "목사님을 공격할 의도는 없었다"고 말하자, 목사가 바로 "내가 오해했다"고 말했다.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느껴졌다. 우리는 지난 3개월간 목사의 설교와 배타적인 태도로 교인들에게 오해를 받고 있었다. 그렇게 3개월을 버텼는데, 목사는 "오해했다"는 한 마디로 상황을 마무리지었다. 허무했다. 목사에게 "우리가 듣고 싶은 말은 '미안하다'는 말뿐이다. 사과해 달라"고 했고, 그제서야 미안하다고 했다. 그때 처음 사과를 들었다. 전에는 오해라는 말만 반복했다.

- 교회 안에서 반응은 어땠나.

A / 교회에서 우리가 신천지라는 말이 나왔다. 한 교역자 입에서 처음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분이 "이거는 딱 신천지가 하는 수법"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처음에 이승재 선교사만 잘못한 게 아니라, 선교사를 케어해야 할 교회도 책임이 있다고 말한 걸 가지고 그런 거다. 다른 목사도 우리 사건을 언급하면서 "교회에 신천지가 있다는 걸 항상 생각하면서 목회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이 일에 침묵한 목회자와 리더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리더는 내 삶을 포기하고 공동체를 위해 헌신한다는 사람이다. 공동체 일원을 위해 힘써야 한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우리에게 연락할 시간은 없다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들과는 만나 커피 마시고 나눔은 하더라. 일주일에 한 시간, 아니 30분만이라도 통화할 시간이 없었을까 묻고 싶다.

B / 지금 생각해 보면, 대놓고 신천지라고 말하는 교인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은 "응원한다", "나는 너희 편이야", "뒤에서 기도하고 있어"라고 말했다. 그 말이 고맙지만 동시에 참 듣기 싫었다. 기도해 주는 건 고마운데, 행동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목사의 태도가 바뀌었을 때, "너희들 행동 때문에 목사님이 변한 게 아니라, 우리의 기도로 목사님 마음이 변한 거다"라고 말했다. 황당했다. 하나님은 기도로만 상황을 이끌어 가시는 분이 아닌데, 교인들은 자신의 기도 때문에 상황이 진척됐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기도도 우리가 더 많이 했을 텐데.

나도 A에게 "응원하고 기도한다"는 말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건 당사자에게 전혀 힘이 되지 않기 때문에 함께 목소리 낸 거다. 기도하겠다는 교인들은 행동하지는 않았으면서, 오히려 잘해 보겠다는 사람들을 질책했다. 몇몇 교인은 교회 TF팀이 하는 일이 없다고 비난했다. 화가 났다. 그 이야기를 한 교인들은 그동안 뒷짐만 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 과연 TF팀을 질책한 권한이 있을까. 물론 TF팀이 구성된 후 된 제대로 일처리가 된 건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사람들이 모였다는 사실만으로 고마웠다. 그런 사람들을 격려하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힐난하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자기들이 발 벗고 나설 것도 아니면서.

- 청년들은 어땠나. 공청회 때 지지 발언해 준 청년도 몇 있었는데.

B / 지지해 준 사람은 일부였다. 대부분 자기 삶 사는 게 벅차서 도와줄 수 없다고 말했다. 이해는 간다. 지금 우리가 배우는 기독교 신앙은 자기 삶에만 매몰되도록 가르치니까.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이게 과연 교회의 모습인지' 고민했다. 교회 안에 아파하는 사람이 있는데 자기 삶이 바쁘니까 도와주지 못한다? 한 사람은 그럴 수 있는데 장년 포함 1,000명 넘는 교회에서, 이 일을 자기 일처럼 여기고 행동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건 교회로서 기능을 상실한 모습 같았다. 성경은 "아파하는 사람을 보아도, 네 삶을 먼저 살아라", "고통당하는 사람 있어도 너희들끼리만 예배 드려라"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 어디에 그렇게 나와 있나. 이런 교회는 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아니다.

청년 중에는 밤을 새워서라도 목사님을 설득하라고 말했던 이도 있었다. A를 만나서 얘기를 나눠 보지도 않은 청년들이 주로 그렇게 말했다. 똑같이 그들에게 되묻고 싶다. 그렇다면 왜 직접 나서서 담임목사를 설득하지 않았나. 왜 교회에서는 침묵하면서 우리가 하는 행동만 잘못됐다고 지적하는가. 누군가 밤을 새워서라도 A 얘기를 들어 줬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 다른 단체들에도 도움을 요청했다고 들었다.

A / 쉽지 않았다. 단체는 한 세 곳 정도 찾아갔는데, 발 벗고 나서는 곳이 거의 없었다. 피해 과정을 설명하는 것도 그렇다. 현지에서 겪은 일을 떠올리는 것도 고통스러운데, 기관을 찾아갈 때마다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야 했다. 외국은 가해자가 자신이 무죄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면, 한국은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문제는 증거가 없는 경우가 대다수라는 거다. 의지할 수 있는 게 기억과 말뿐인데, 그 정황조차 클리어해야 한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각 단체에서 들었던 말 중 하나가 "진술의 앞뒤가 맞지 않으면 피해자에게 불리해진다"는 거였다. 결국 내가 말 한 번 잘못하면 스스로 무덤 파는 이 구조 자체가 답답했다.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고, 기억이 혼동될 수도 있는데, 그 모든 책임이 피해자에게 돌아가는 거다. 정황이 인정되지 않으면 오히려 가해자는 고개 빳빳이 들고 다닌다는 게 답답했다.

B는 교회와 담임목사를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A 핸드폰에는 그간 담임목사, 현지 선교사, 이승재 선교사와 나눈 대화들이 저장돼 있다. 뉴스앤조이 최유리

-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신앙에 변화가 있었을 것 같다.

A / 가장 큰 변화는 더 이상 목사를 믿지 않게 됐다는 거다. 6개월간 이번 사건을 해결하려 노력하면서 목회자의 민낯을 본 것 같다. B와 공론화하기 전까지는 나도 기대가 있었다. 5년간 이 교회에 다녔고 목사가 책임감 있게 해 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담임목사도, 현지 선교사도 이승재 선교사를 두둔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적극적으로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 반복되자 기대가 깨졌다.

교회에 나가지 않고 있다. 공동체가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상실했으니, 더 이상 나갈 이유를 찾지 못했다. 사람들이 노숙인이나 해외 아동은 후원하면서, 정작 교회 안에서 아파하는 사람은 돌보지 않는다는 모순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B / 신학대학원을 가려는 마음을 접었다. 신대원에 가더라도 꼭 목회자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은 아니었지만, 이번 사건으로 확실해졌다. 교역자들을 보면서 '저렇게는 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도와주겠다던 목회자들이 "다 자기 입장이 있으니까"라고 뒷짐 졌다. 그 모습을 보면서 '왜 저 사람들은 목회자의 길을 갔을까. 돈 벌려고 하는 건가'라는 생각까지 했다. 매일 성경 강해하는 것보다, 공동체 안에서 어려움 겪는 사람 한 번 도와주는 게 목회자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배웠는데,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실망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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