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택에 무색무취한 진공상태는 없다

한국교회동성애대책협의회가 주최한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은 동성애 반대 구호를 외치며 서울역광장에서 시청 방면으로 행진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지난 6월 2일(금)부터 4일(일)까지, '한국교회동성애대책협의회'가 주최한 '제1회 생명·가정·효 세계 대회'(Seoul Global Family Convention)가 열렸다. 그들이 붙인 그럴듯한 제목과는 무관하게 이 대회는 '대규모 동성애 혐오 및 차별 집회'였다. 한국 정치 1번지인 여의도에 위치한 국회의원회관과 많은 사람이 오가는 서울역광장에서 교회 이름을 걸고 혐오와 차별을 확산하는 집회가 열린 것이다.

아무리 살펴봐도 이 행사는 반인권적이고 몰염치하다. 이들은 반인권이 성서와 신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더 가진 사람들을 위한 사회, 극단적 양극화를 강화하는 신자유주의 논리를 금과옥조처럼 주장하는 사람들의 공모 관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이번 행사를 진행하도록 대여를 도와준 사람은 자유한국당 전희경 국회의원(비례대표)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자유경제원 사무총장 출신이다. 자유경제원이 어떤 곳인가. 박근혜 정권 내내 한국 사회가 불공정과 무능으로 망가지고 부정부패가 만연하도록 조장한 주요 고리인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주는 지원금으로 운영된 곳이다. 전경련이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논리 전파와 여론 형성에 가장 앞장선 곳이다.

'한국교회동성애대책협의회' 대표회장은 소강석 목사다. 그는 2016년 3월, 박근혜 씨가 참석한 국가조찬기도회 설교에서 '국정 역사 교과서 지지' 입장을 밝히는 등 극우 개신교 그룹이 내세우는 차세대 주자로 알려져 있다. 국민 다수가 반대하던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자유경제원이 앞장서 펼쳤던 대표적인 주장이니, 그들의 공모 관계는 끈끈하게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최자들은 이 행사가 한국에서 최초로 열리고 세계적인 강사를 초대해 진행하는,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대규모 행사라고 홍보했다. 그런데 이분들 주장을 하나씩 살펴보면 실소가 나오다가 나중에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난감함을 접하게 된다.

첫째, 왜 '이 따위 대규모 행사'가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까. 다른 나라 사람들은 이게 '혐오와 차별을 노골적으로 조장하는 행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국에 자리 잡은 일부 극우적 개신교회가 보여 주는 협조와 공감대를 얻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대규모 행사라고 자랑할 게 아니다. 작년 여름에 시청광장 주변을 듬성듬성 메웠던 북과 부채춤만큼이나 창피한 일이다.

둘째, 왜 한국에서 가장 처음 열리게 되었을까. 이는 이 땅의 일부 보수 개신교회가 그만큼 인권 의식도 떨어지고 사회와의 소통에서도 숫자만 많고 목소리만 크면 된다고 굳게 믿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들은 수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혐오와 차별의 깃발을 펄럭이며 자신들의 부끄러운 행동과 주장을 '성서와 신의 뜻'이라고 포장하고 있다. 그나마 문제의식이 있는 양심적인 또 다른 보수 개신교회나 신자들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셋째, 반인권적인 구호와 주장을 성서와 신의 뜻으로 포장하기 바쁜 이들은 전혀 다른 것을 쉽게 등치한다. 그들에게 하느님과 하느님나라는 이성애 남성 중심으로 작동하는 가부장적인 정상 가족 담론과 너무 당연하게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쉽게 '성서와 신의 뜻=반동성애=반페미니즘'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에게는 그 각각의 결이 얼마나 다르고, 그 층위가 얼마나 복잡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깃발을 펄럭이고 사람과 돈만 모인다면 무엇이든 주장할 수 있다.

이 행사에 대한 기사들을 읽다가 한참 웃었던 대목은 그들이 초대한, 소위 '국제적인' 강사들의 면면이었다. 일단, 그들이 주장하는 "미국의 세계적인 신학자 피터 존슨"은 개신교-근본주의자로 유명한 호모포비아다. 그들이 "영국의 인권 활동가"라고 이름 붙인 안드레아 윌리암스 변호사도 대표적인 반동성애 활동을 하는 근본주의자다. 더군다나 그녀는 영국과 영국 기독교 상황을 왜곡해서 전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의학적인 사실과 개념도 신앙의 이름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들

신기하게도 성소수자 혐오나 차별을 당연시하는 사람들에게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지향'(指向, orientation)과 '취향'(趣向, preference)을 모르는 척하며 살짝 바꿔 놓는다. 일관된 방향성을 가진 성소수자의 성적 지향(性的 指向, Sexual orientation)을 그와는 결이 다른 성적 취향(性的 趣向, sexual preference)으로 취급한다. 그들은 의학적인 사실과 개념도 왜곡된 신학이나 신앙 논리로 얼마든지 뒤바꿀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한다.

한 존재를 구성하고 말해 주는 지향은 '좋다, 나쁘다'를 말할 수 없으나, 언제든 뒤바뀔 수 있는 취향은 '좋다, 나쁘다'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 사람이 가진 누군가를 향한 성적 끌림이 지향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을 인정한다면, 그를 반대하는 순간에 자신들이 인종차별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와 동급이 된다는 점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 그들에게 성소수자들의 성적 끌림은 어떻게든 지향이 아닌 취향이 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그들의 '나쁜 취향'에 대해 반대하거나 교정해 주는 게 가능해진다.

내 취향이 바뀔 수 있으니, 네 취향도 바뀔 수 있는 게 된다. 더군다나 그게 '나쁜 취향'이라면, 짐짓 도덕군자나 돕는 사람이 되어 그의 잘못된 선택에 대해 꾸짖거나 안타까워하며 바뀌길 요구하거나 돕는 것도 가능해진다.

물론 누군가의 취향에 대해 관여한다는 게 엄격한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문제이긴 하다. 그러나 한국교회 대다수 신자나 지도자들은 엄격한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문제될 게 없다. 우리는 한국교회에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일어나는 숱한 억압적 일상을 잘 알고 있지 않던가. 심지어 "교회는 하나님이 독재하는 곳"이라는 웃지 못할 선언이 큰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는 게 일부 한국 보수 개신교회의 민낯이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이 주장하고 오용하던 '하나님이 독재하는 교회'라는 논리와 이미지를 슬쩍 성소수자들에게 뒤집어씌웠다. 최근에 나오기 시작한 '동성애 독재'라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사회에서 동성애자들이 독재를 일삼고 있고, 자신들은 그에 저항하는 존재들이라는 허구적인 주장이다. 이들의 주장이 너무나 웃긴 이유는, 자신들이 만든 '독재자 하나님이 다스리는 교회'에서 감사한 마음으로 아무렇지 않게 살면서, 있지도 않은 '성소수자들의 독재 사회'에 맞서 싸우겠다는 분열적이고 허구적인 주장을 뻔뻔하게 펼치고 있다는 데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호모포비아적인 주장과 태도'도 하나의 취향이자 선택인 것처럼 포장한다. 혐오와 차별도 하나의 취향이니 여러 선택 가운데 하나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위장한다. 한 사람의 지향과 취향은 다르게 논의되어야 할 부분인데, 모르는 척 뒤섞어 놓고는 본인들의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서 비난하기 바쁘다. 자신들의 무모하고 무지한 상상력 때문에 존재가 부정당하고 인권이 심각하게 침해당하는 사람들이 있는 현실은 안중에도 없다.

사랑과 은총의 예수 낯설게 만드는 사람들

혐오와 차별마저도 개인 선택이자 취향이 되어 버린 대다수 한국교회와 신자들이 사는 세계. 그런 세계를 만드는 데 공모하고 앞장선 한국교회 일부 목회자와 지도자. 그런 사람들을 반복적으로 찍어 내고 있는 몇몇 신학 기관들. 이들에게는 그리스도교가 오랫동안 강조해 온 '사랑과 은총'이라는 종교적 언어와 프레임은 유효하지 않은 지 오래다. 이들에게는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세계와 공모해 온 '공포와 불안'이라는 언어와 프레임이 더 유효하고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사랑과 은총이 강조되는 교회와 신자들이 사는 세계에서는 항상 '나와 다른 타자, 이어지고 얽힌 관계'가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공포와 불안이 강조되면 모든 게 뒤바뀐다. 무엇보다 내 생존과 안위가 우선하기 때문이다. 오직 '생존과 안위를 위해 살아가는 나, 내가 승인한 존재와 경계'만이 중요하다. 공포와 불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다르거나 낯선 것들은 언제든 삭제할 수 있다. 그들은 내 생존과 안위 바깥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래야만 한다.

여기서 '다름'이나 '관계'는 자리 잡기 어렵다. 그런 세계에서는 '너'라는 존재도 나와 비슷할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 내가 승인할 수 있고 내가 정한 경계까지만 존재한다. 나와는 다름으로 존재하는 너는 그 경계 바깥에서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내 관심사가 아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내가 알 필요가 없는 세계다. 내 생존과 안위만 위협하지 않는다면, 내가 승인하고 정한 경계 바깥에서 일어나는 '어떤 존재나 사건'도 내게는 중요하지 않다. 말 그대로 '나만 불편하지 않으면' 된다.

내가 배우고 따르는 그리스도교 이야기에서 앞선 이들이 가르친 그리스도교 신앙은 '저항과 넘어섬'이다. 그 저항과 넘어섬을 위해서는 내게 익숙하고 당연한 것들에 머물지 말고 '낯섦과 다름'을 마주하며 부딪혀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신자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많은 이에게, 신앙은 그저 취향에 따라 내게 익숙하고 당연한 것들 가운데 고르는 문제일 뿐이다. 어느새 그리스도교 신앙은 '개인 선택'의 문제가 되어 있다. 그것도 개인이 승인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만 가능하다.

예를 들어, 교회는 '신정 일치 사회'인 것처럼 포장되어 '신의 대리자'인 몇몇 목회자나 지도자가 '신의 뜻'을 대언한다. 그런데 이때 신의 뜻은 내게 익숙하고 당연하게 여기는 맥락 안에서만 유효하다. 그러다 보니, 겉으로는 신의 대리자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목회자나 지도자들은 '낯선 것이나 다른 것'을 말하지 않는다. 익숙하고 당연한 것 안에서만 자신들이 유효한 존재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승인하고 정한 경계 안에 있는 몇몇 목회자나 지도자가 '신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모든 이야기는 검증이나 반론 없이 "아멘!"이다. 그것이 내가 살고 있는 익숙하고 당연한 세계를 승인하고 강화하는 것이니, 그게 뭐든 좋다. 그 이야기가 혐오나 차별을 옹호해도 상관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사랑과 은총에 위배되는 배제와 소외를 당연시해도 아멘일 뿐이다. 내가 승인하고 정한 경계 안에 있으니, 내게 익숙하고 당연한 것이니 그것으로 됐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내 삶에 존재하는 '배경'이 된다. 내 취향을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소비하기 위해, 하느님은 그저 내 선택과 경계를 옹호하기 위한 배경 설명이 된다. 다만,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내 내면에서 작동하는 내재화된 추동 원인이 '하느님'으로 표현된다. 좀 더 살펴보면, 이 하느님은 다른 표현으로 바꿀 수 있다. 이때 호명되는 하느님은, 사실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기 위한 발판이자 적절한 변명의 '다른 표현'일 뿐이기 때문이다.

개인 취향과 경계 안에 갇힐 수 없는 은총과 사랑의 하느님

성서는 한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하느님을 대신해 하느님 자리에 위치시키는 것들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며 저항하라고 가르친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앞선 이들은 주류 사회에 편입해야만 생존과 안위를 보장받는 세계에 대해, 온몸으로 '다른 이야기'를 증언하며 살라고 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그런 주류 사회의 혐오와 차별, 소외와 배제의 피해자였음을 기억하라고 가르쳤다.

그런 맥락에서 내가 속한 성공회를 비롯해 세계 교회에 속한 많은 그룹이, 우리가 주류이자 다수였을 때에 혐오와 차별을 쉽게 승인하던 과거를 반성하고 있다. 그런 반성에 근거한 신앙적 성찰 가운데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이루고자 인종 혐오와 차별에 반대하고 저항하고 있다. 여성 혐오와 차별에 반대하고 넘어서는 과정에서 여성 사제 서품과 주교 선출로 나아갔다. 오늘날 주류 사회나 교회에게 낯선 존재인 성소수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에 반대한다. 그 가운데 극심한 진통을 겪으면서도 성소수자 사제와 주교 선출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이는 단순히 인권을 옹호하는 문제가 아니다. 하느님의 영원하고 보편적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증언하기 위해서 '열린 신앙과 질문하는 신학'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혐오와 차별로 고통받고 배제와 소외를 경험하는 낯선 사람들을 편드는 사랑은, 교회와 사회에서 영원하고 보편적인 사랑이 계속되도록 신학적이고 신앙적으로 실천하는 저항이다. 물론, 이 과정이 완전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드러내고 전하는 길이 무엇인지 계속 질문하며 실천해야 한다.

하느님의 정의에 기반한 사랑을 산다는 건, 개인 취향과 경계를 무조건 우선하는 교회가 된다는 게 아니다. 오롯이 홀로 서는 개인을 인정하지만, 그 개인에 머물지 않고 낯설고 다른 타자와 이어지고 얽힌 관계로 나아가도록 안내하는 게 그리스도교의 또 다른 이야기다. 그 가운데 정의를 이루고 사랑과 은총이 이뤄지도록 함께하라는 게 그리스도교의 오랜 가르침이다.

"'의'는 히브리어 sadiq 또는 공정함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의로운 사람이란 공정한 사람, 하느님의 명령을 따름으로써 하느님의 정의의 빛을 세상을 향해 반사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분의 계명은 모두 하느님과 또 이웃과 바른 관계 속에 살아가라는 명령이므로 정의로운 사람은 전적으로 세계를 향해, 다른 사람을 향해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의'는 관계적이다. 의로운 사람은 모든 관계를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거나 살고자 한다. 성서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을 칭찬하고 그가 복 있는 자이며 그의 갈망이 채워지리라고 선언한다. 초점은 하느님을 그리고 하느님께서 뜻하시는 삶을 살기 원하는 데 있다."
-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 비아, 128~129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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