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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의 가장 위대한 작품
[서평] <자유의지>(새물결플러스)
  • 크리스찬북뉴스 (cbooknews@cbooknews.com)
  • 승인 2017.06.04 23:01

<자유의지> / 조나단 에드워즈 지음 / 정부홍 편역 / 새물결플러스 펴냄 / 736쪽 / 3만 5,000원

에드워즈가 죽은 지 300년이 지났는데도, 그의 전집 수십 권이 예일대학을 비롯한 유수한 대학에서 출판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생애와 저술과 사상이 여전히 목회자와 신학자의 학위논문 주제가 되고, 탐구와 연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또 무엇 때문일까. 이에 대한 분석은 신학적이고 심리적이며 철학적인 역사 선상에서 각 연구자에 의해 다양하게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신학사적으로 본다면 우선 그는 자신이 살던 시대에 거대한 계몽주의와 경험주의에 저항하여 기독교 교리를 지켜 냈다. 그는 그들의 핵심과 원리를 이용하여 모순을 드러내며 지혜롭게 반박했다. 그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깊은 경건과 예리한 지성을 갖춘 인물이다. 그는,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그리스도와 신학이 아니라 충분히 알 수 있고 풍성하게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그리스도와 진리를 전한 탁월한 존재로 평가된다.

현대에 들어 2003년을 기점으로 에드워즈의 작품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정말 감사한 일이다. 그동안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한국교회가 양적인 성장을 이루었지만, 이면에 숨겨져 있었던 피상적인 복음 이해와 같은 다양한 질병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제는 이전처럼 감상적인 방법과 권위를 이용한 맹종으로는 도저히 이 난관을 돌파할 수 없다. 사회는 그만큼 복잡해졌고, 문제는 더 심각해졌으며, 사람은 그만큼 영악해졌다.

교회와 신학교와 목사와 교인이 많아졌지만, 여전히 기독교는 시끄럽고 사회를 병들게 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불합리와 부조리와 병폐가 있다. 현대신학은 발전하고 사회와 인간을 이해하는 것에 도움을 주었지만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것 같다. 물론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앞으로도 발전해야겠지만 여전히 큰 벽을 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 듯하다.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에 있어서 인간에게 노력론과 의지론으로 말미암아 희망을 주는 고문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실제 19세기 이후 복음주의의 일반적인 추세는 기독교 기본 진리에 대한 의지적 수용이 구원 얻는 믿음이라고 인정해 주는 것이었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펠라기우스와 중세의 알미니우스, 그리고 근대의 찰스 피니와 같은 부흥주의 계보를 이어 간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복음에 대한 지적 동의도 구원 얻는 믿음에 부족하며, 의지적으로 그 지식을 수용하는 것도 구원 얻는 믿음이라 보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정통적인 수호자로서 인간이 결코 구원의 은혜를 자기 결단에 의해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구원과 사역에 대하여 영적인 눈이 열리는 체험과 감격 없이 단지 인간의 의지와 결단만으로 복음을 믿을 수 있다고 하는 알미니안 교리를 부정한다. 실제 복음의 진리는 믿고 싶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게 해 주시는 성령님의 조명과 하늘로부터 비춰 주시는 신령한 빛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영접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사역에 근거하여 구원을 얻는다. 이것은 오직 은혜로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것이다.

이 책은 어렵기로 소문난, 하지만 그의 작품 중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알려진 <의지의 자유>이다. 이 책은 편역자께서 300년 전 언어를 현대어로 재번역하여 가독성을 높였고, 단락마다 소제목도 달아서 에드워즈의 주장을 잘 따라가도록 해놓았다. 그리고 본서는 원서를 바탕으로 한 유일한 논문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고, 반론과 재반론과 논증과 요약 등 편역자가 독자의 이해를 위해 노력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본 글에서 책에 대한 짧은 요약과 본서를 통해 빛이 났던 부분을 소개하고 결론을 맺도록 하겠다.

책은 총 4부 38장으로 구성이 되었다. 1부는 5장에 걸쳐 의지의 본질과 의지가 어떻게 작용하고 활동하는지 다룬다. 그리고 필연, 불가능, 불능, 우연의 의미를 설명한다. 이어 자연적 필연과 도덕적 필연, 자연적 불능과 도덕적 불능을 예로 들어 설명해 간다. 2부는 13장에 걸쳐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의 자유의지를 소개하고 그들의 주장을 보여 주는데, 그들은 의지가 단독적으로 자기 결정력과 자유를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에드워즈는 신체 동작의 원인과 발생, 건축자와 건축된 집 등을 예로 들며 반박하고 제1활동만이 의지의 활동 없이 결정하는 활동임을 증명한다.

제3부는 7장에 걸쳐서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의 자유의지가 필수적인 것인지를 다루고 있는데, 그들은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거룩하시고 선하며 덕이 있기에 찬양과 감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사람과 하나님의 칭송은 다르며 우리가 하나님을 칭송한다고 해도 충분할 수 없고 제대로 된 보상이 될 수 없다고 반박한다. 또한 죄의 내버려 둠은 하나님의 심판이므로 죄를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기에 순수한 능력이 없어 책망받는 것이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제4부는 13장에 걸쳐서 에드워즈는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의 보편 상식과 칭송과 책망과 필연과 관련된 주장에 반박하고 논증한다. 그리고 덕과 악덕의 본질은 그 성향과 활동의 원인에 있지 않고 그 본성에 있다고 반박한다. 또한 하나님은 자기 의지로 가장 선한 것만 선택하시고 도덕적 필연에 따라 결정하시는 신적 의지를 다룬다. 이어 칼빈주의 5대 교리가 하나님의 도덕적 특성과 모순되지 않고 무신론과 방종을 부추기지 않으며 형이상학적이고 난해하지 않다고 설명한다.

필자는 철학적 분석의 방대한 책을 하나님의 주권과 의지라는 차원에서 간단히 요약했다. 그리고 이제 필자가 볼 때 여기서 빛나는 것은 도덕 행위자의 의욕에 대한 하나님의 확실한 예지를 성경적으로 논증하고 설명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은 인간이 무슨 의욕을 가지고 있으며 또 무슨 행동을 할지 미리 다 알고 계신다고 주장하고 지존자의 선지에 대해 입증한다.

실제 하나님은 예지하지 못하시면 예언할 수 없고 사람의 의욕을 예지하지 못하면 사람의 미래 행동도 예언할 수 없다.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하나님은 그것들을 모른다고 하지만 이 세상은 도덕 행위자들의 의욕의 결과이고 연속이다. 성경을 봐도 하나님은 사람들의 도덕 행위와 자질과 선과 악과 악독과 선행과 상벌과 징벌에 대해 미리 말씀하셨다. 바로와 모세와 요시아와 아합과 고레스와 다니엘과 베드로 등 무수한 성경 속 예가 있다.

또한 사람들의 도덕 사건과 사람들의 장래 행위와 사건에 대하여 하나님은 예언하셨다. 하지만 사람들의 죄악이 원인이 되어 하나님께 징벌을 받는다. 이스라엘의 애굽에서의 타락 예언과 바벨론의 멸망과 심판에 대한 예언, 유다의 바벨론 포로 귀환 그리고 그리스도의 수난과 핍박에 대한 예언과 그것에 대한 그리스도 자신의 예언이 있고 그 외에도 사람들의 미래 행위와 사건에 대한 예지와 종말론적 사건에 대한 예지와 예언 등이 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충분한 성경적 증거와 예를 들어 하나님이 사람의 의욕을 예지하시는 분임을 논증한다.

또 하나 눈부신 것은 하나님이 어느 한편에 대한 선호를 가지고 있고 필연을 따라 행한다는 것이다. 보통 하나님께는 편애같은 것이 없고, 무관심과 중립 상태와 균형만 있을 것이고 그래야 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선택 대상에는 차이가 없다고 믿게 된다. 그러나 한 원자의 당김으로도 천체가 이탈할 수도 있고 태양의 둘레를 도는 한 행성의 공전이 가장 미세한 원자 때문에 잘못될 수도 있으며 사람이 몸과 정신에 있는 극미한 입자가 몸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선택과 선하심은 우연이 없고 하나님의 의지는 목적에 따라 그분의 의욕은 동기에 따라서 결정된다. 하나님의 선택과 선하심이 우발적이고 무작위이며 어떤 목적이나 계획도 없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본질이 손상될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인간 수준의 차별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도덕성을 보고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와 목적을 가지고 선택하신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의 선택하심은 은혜의 풍성함을 더 돋보이게 한다.

마지막으로 빛나는 것은 하나님이 죄의 제공자라는 에드워즈의 반박이다.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인간이 하나님이 정하신 필연에 따라 범죄하고 하나님이 사람을 돕지 않아서 사람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기에 하나님이 죄의 작자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죄의 행위자가 되신다는 것을 부정하고 죄의 결정자이며 허용자라는 것은 인정한다. 그리고 바로와 요셉의 형들과 시므와 가롯 유다 등의 예를 통해 설명한다.

즉 악한 목적을 가지고 죄를 짓는 사람이 악한 것이지 허용하신 하나님이 원인자이거나 악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태양이 현존으로 대기의 빛과 열이 있고 태양의 퇴거로 어둠과 차가움이 있듯이 하나님의 부재는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고 하나님의 내버려 두심은 인간이 필연적으로 죄를 짓게 된다. 또한 십자가나 요셉의 형을 보듯이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를 제약하지 않고 도덕적 악을 선한 목적을 위해 이용하며 하나님의 의지에 부합하게 할 수 있다.

끝으로 우리는 의지와 필연 교리가 우리로 하여금 죄를 멀리하고 거룩에 이르는 경건을 헛되게 만들 수 있고 사람을 도덕과 신앙 문제에 단순한 기계로 전락시킬 수 있다고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인간의 선택이 하나님의 주권을 좌절시키지 못하는 것이 우리에게 희망이다. 그런 인간의 의지와 선택의 불완전함이 우리가 주어진 삶을, 하나님의 주권을 더욱 신뢰하며 걸어가게 한다.

에드워즈가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의 의지결정론을 반박한다고 해서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지 않고 인정한다. 필자가 볼 때 그는 하나님 주권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유를 허용하고 받은 것이다. 예를 들면 바둑을 둘 때 고수와 하수가 있고 하수는 자신의 마음대로 하는 것 같지만 고수의 설계 속에 움직이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바둑의 흐름과 결과는 고수에 의해 만들어지듯이 하수는 고수에게 의존되어 있다.

어느 시대나 인간은 자유를 원하고 갈망한다. 인간 본성이 그것을 원하고 사회와 국가는 그것을 지켜 주어야 한다. 그러나 신의 설계론이라는 것이 이 자유를 침해하고 인간의 실존과 정체성을 묵살한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에드워즈의 주장도 죄와 사망과 천국과 지옥에 대한 설교가 풍성하던 시절에 인간의 의지를 꺾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필자는 한편으로는 에드워즈가 그런 청교도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 조화를 추구했던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여기, 난해하지만 가장 위대하다고 소문난 에드워즈의 작품, 그의 핵심 사상이 드러난 걸작품, 생애 마지막까지 준비하였던 작품, 당대의 철학을 이용하고 부정하며 신의 주권을 지켜 낸 작품, 회심과 중생과 마음의 변화와 구원과 인간의 부패와 하나님의 은혜 등 중요한 주제를 생각나게 하는 작품이 있다. 이 시대에 우리의 언어로 우리 손에 주어진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선물이라 여겨지며 이것을 통해 더욱 풍성한 진리와 구원을 누리게 되길 소망해 본다.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방영민 /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열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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