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신대S교수성폭력사건피해자지원을위한대책위원회는 5월 30일 기자회견을 열어, 제자에게 성범죄를 저질러 재판을 받고 있는 ㅅ 전 교수 사건 진상 공개와 후속 대책 마련을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촉구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기독교여성상담소 채수지 소장이 연대 발언을 맡았다. 채수지 소장의 '감신대 S 교수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원을 위한 연대 발언' 전문을 싣는다. - 편집자 주

 

최근 감리교신학대학교 내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허무맹랑한 루머가 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폭력이 사랑으로 둔갑할 수 있는지, 그 기저에 있는 지배자의 담론을 고발하고 피해자의 인권을 보호하여 더 이상 피해자가 2차, 3차의 거듭되는 피해를 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서로 사랑했다'라는 '반성 없는 생각', '개념 없는 인식'은, 권력과 구조에서 피해 여성이 느끼는 감정적 혼란을 역이용하여 다시 가해자를 옹호하고 악한 구조의 문제를 두 개인 간의 사적인 문제로 축소시킴으로써 저항을 무화시키고 억압의 구조를 지탱하고자 하는 명백한 공범죄입니다.

피해자가 겪었을 고통을 헤아리기는 어렵지만, 교수와 제자, 남성과 여성이라는 권력의 차이가 중첩되고 극대화되어 그에게 이중 삼중의 억압이 되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논문 지도 교수로서 가해자는 논문을 사이에 두고 피해자의 진로와 생존에 영향을 미치는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었다는 점에서, 피해자와 갑을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갑을 관계에서 을의 위치에 있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자신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감정적으로 불평등하게 위치 지어졌습니다. 가해자는 자신의 감정을 거리낌 없이 표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만 피해자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억압, 소외시키는 감정 노동을 강요받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이 사회에 진출하기 위해 남성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불평등한 현실은 권력의 남용으로 인한 성폭력과 그러한 성폭력을 당해도 저항하지 못하게 하는 감정 억압을 발생시킵니다.

피해자가 저항할 수 없었던 두 번째 이유는 가해자는 교수이며 신학자, 목사라는 면에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고 그의 말을 신뢰하게 만드는 막강한 상징 권력을 지니고 있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가해자가 성적 요구를 하면서 '신학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다'라고 설득했을 때, 피해자는 성추행에 저항하지 못하게 하는 내적 혼돈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남성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신의 대리적 권위를 입고 교회와 학교에서 종교적 상징과 신학의 언어를 재생산함으로써 교인들의 세계관과 신앙관을 의미 있게 주조하는 '상징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상징 권력을 이용하여 가부장적 지배 구조를 마치 신의 뜻처럼, 자연의 필연적인 질서처럼 천명함으로써 그 악한 구조를 영속화하는 상징 폭력을 행사해 왔습니다.

대표적으로 "하나님 아버지" 상징은 남성 지배를 공고히 해 왔습니다. 남성은 그리스도, 여성은 교회, 남성은 머리, 여성은 몸, 이런 식의 위계적 상징은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합리화하기도 합니다. 특히 "여성이라면 몸가짐이 어떠어떠해야 한다"라는 성차별적 교육은 불평등의 감각이 의식의 범주를 벗어나 여성의 신체 안에 새겨지게 하고, 성폭력의 책임이 자신의 몸가짐에 있다는 식으로 여성을 사회화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빌미로 여성들에게 내면화된 지배, 자발적인 복종을 강요해 왔습니다. 피에르 부르디외에 따르면, '상징 폭력'은 지배자가 피지배자의 무지와 오인으로 인한 공모를 이용하여 피지배자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하는 '부드러운' 폭력입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는 현시대의 가장 큰 상징 폭력으로 기능하는데, 우리 모두가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나지 못하는 자본주의의 굴레를 생각한다면 잘 이해가 되실 것 같습니다. 상징 폭력은 문화 안에 있는 차별화하는 폭력이며, 문화적 무의식 속에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에서 피해자가 성폭력에 저항할 수 없었던 세 번째 이유는 남성, 아버지에게 순종하라는 가부장적 신학과 교회가 부과한 상징 폭력에 의해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가해 남성은 교회와 사회에서 인정과 존경을 받는 상징 권력을 가진 교수인데 비해, 피해 여성은 권력을 가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희생양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수님이 설마 그럴 리가 없어"라고 생각하는 반면, 피해자의 말은 곧이곧대로 믿어 주지 않고 그에게서 견책 사유를 찾는 것은 두 사람의 권력의 차이를 잘 말해 줍니다.

가해자는 최후 변론에서 "낭만적 사랑 이야기가 이런 추행, 추문으로 변질되어 가슴 아프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남성의 공격적 태도와 여성의 수동적 태도를 자연스럽게 여겨서 여성의 저항을 무효화시키는 낭만적 사랑은 자연적인 것이 아닌 문화적 구성물이므로 그 전제와 타당성을 의심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낭만적 사랑은 남성 지배를 영속화하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것이 여성들의 경험을 통해 밝혀지고 있습니다.

여성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주체이며, 성적 대상이 아니라 성적 자기 결정권을 지닌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사랑이란 상호 인격적, 상호 주체적 만남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유의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힘이 공정하게 분배되고 평등한 관계를 이룰 수 있는 구조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평등은 내면의 감정에서 느껴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폭력을 '사랑'이라고 이해하는 순간, 남성 지배의 가부장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피해자의 목소리보다는 권력을 지닌 가해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성폭력이라는 명백한 죄에 공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억압당한 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들의 입장에 서서 들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지배 구조에 도전하시고 억압당한 자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이제라도 남성 중심의 교회와 신학이 휘두르는 상징 폭력에 의해 스스로의 내면에서부터 억압당하고, 억울해도 저항할 수 없었던 피해자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듣고 그의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합니다. 학교 측은 이 사건이 두 개인 간의 사적 문제로 오해받지 않도록 진실을 정확하게 규명하고 이 자명한 구조적 죄의 피해자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채수지 / 기독교여성상담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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