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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와 차별, 소외와 착취 조장하는 성서 해석은 가짜
상대적 약자와 사회적 소수자 편드시는 '언저리의 하느님'
  • 자캐오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7.05.23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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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과부·나그네·더부살이의 하느님

"고아와 과부의 인권을 세워 주시고 떠도는 사람을 사랑하여 그에게 먹을 것, 입을 것을 주시는 분이시다." (신명 10:18, 공동번역개정판)

"고아들의 아버지, 과부들의 보호자, 거룩한 곳에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시편 68:5, 공동번역개정판)

지난 이야기에서도 강조했듯이 신약학자이자 온건한 성공회 신학자인 마커스 보그는 우리가 성서와 그리스도교 이야기를 대할 때에 두 가지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첫째, 성서와 그리스도교 이야기가 간직하고 있는 풍성함을 '천국과 지옥 해석 틀'로 축소하거나 왜곡하지 않아야 한다. 성서와 그리스도교 이야기에서 사용되는 '그리스도교 언어'에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것보다 더 풍성하고 다양한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를 특정한 해석 틀에 가둬 축소하고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특정한 해석 틀을 강제해서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성서와 그리스도교 이야기를 곡해하는 부분에 대해 의심하고 질문해야 한다.

둘째, 성서는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게 아니라, 은유적이고 역사적으로 읽고 해석해야 한다. 문학적·상징적·신화적 요소와 같은 다양한 렌즈로 성서와 그리스도교 이야기를 읽고 해석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역사적이라는 말은 공동체나 제자들의 기억과 증언을 통해 과거의 특정한 사건들이 구성되어 전해진다는 말이며, 동시에 시대적 한계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성서에서 말하는 '고아·과부·나그네·더부살이'라는 그리스도교 언어는 문자 그대로만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우리와 우리 이웃들이 겪는 현실과 삶에 맞게 다시 해석되고 적용되어야 한다. 그래서 성서가 말하는 '고아·과부·나그네·더부살이'는, 오늘날 사회구조와 일상 관계 속에서 언저리로 밀려난 상대적 약자나 사회적 소수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포괄적인 그리스도교 언어'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 상대적 약자나 사회적 소수자들은 이 시대와 사회, 교회에서 '다양한 형태와 맥락의 가난'이라는 언저리로 내몰려 살아가고 있다. 많은 사회학자가 이들이 겪는 다양한 상실과 고통의 밑바닥에 '빈곤과 불평등, 소외'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 우리는 우선적으로 '경제적 빈곤'을 떠올린다. 그만큼 가난의 문제를 다룰 때에 경제적 빈곤, 다시 말해서 물질적 토대를 건드리지 않고서는 말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다만, 오늘날 빈곤과 불평등, 소외 문제는 경제적 빈곤을 해결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조금 거칠게 표현해서 밥만 먹고산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빈곤과 불평등, 소외는 '밥'이라는 생존 욕구를 넘어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정치·사회적 욕구까지 포괄하는 문제다.

그리고 하느님나라가 온전히 임할 때까지 시대와 사회마다 존재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갈망하는 생존 욕구와 사회·정치적 욕구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존재가 바로 하느님이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들을 편들며, 하느님 당신과 그들의 전복적 소망이 이뤄짐을 통해 당신의 나라를 맛보게 하는 존재가 바로 하느님이다.

고아·과부·나그네·더부살이의 하느님
그리고 자캐오의 주님

"예수께서 그곳을 지나시다가 그를 쳐다보시며 '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자캐오는 이 말씀을 듣고 얼른 나무에서 내려와 기쁜 마음으로 예수를 자기 집에 모셨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구나!' 하며 못마땅해하였다. (중략) 예수께서 자캐오를 보시며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루가 19:5-7, 9-10, 공동번역개정판)

성서에서 예수님을 먼저 찾은 인물로 묘사되는 사람 가운데 자캐오가 있다. 개역성경에서 '삭개오'라 부르는 그는 지나가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와 마주친 예수께서는 그를 내려오게 한 뒤 그가 사는 집에 묵겠다고 선언하셨다.

자캐오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터부시되고 조롱받던 세관장이었다. 그는 먹고사는 생존 욕구를 해결할 수 있을 만큼은 부유했다. 오히려 그는 사회·정치적 욕구가 더 강렬했다. 같은 시공간에서 살아가지만 그 사회에서 터부시되고 조롱받던 존재였던 그에게는 사회·정치적으로 인정되고 존중받는 문제가 더 중요했다.

그런 자캐오가 예수님과 마주치기 위해 나무에 올랐고, 그와 눈이 마주친 예수께서 '죄인' 취급을 받던 그가 사는 집에서 머물겠다고 하셨다. 사회·정치·종교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던 자캐오에게 구원을 선포하셨다.

예수께서는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부르셨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신 예수께서 자캐오가 그토록 갈망하던 사회·정치적 욕구에 응답하셨다. 그가 오랫동안 간직했던 소망에 응답하신 것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주류 사회가 기겁할 만한 전복적 소망을 이루고 선포하셨다.

그렇게 히브리 성서가 고백하고 따르던 '고아·과부·나그네·더부살이의 하느님'은 문자적으로 이해되는 고아·과부·나그네·더부살이뿐 아니라, 한 시대와 사회에서 공존하고 있는 '상대적 약자와 사회적 소수자의 하느님'이라는 걸 알려주셨다. 자캐오 이야기를 비롯해 성서와 그리스도교 이야기에서 기억되고 증언되는 수많은 사건과 이야기는, 그렇게 언저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편드시는 하느님'에 대해 고백하며 전하고 있다.

시대와 사회의 언저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편드시는 하느님. 그 '언저리의 하느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하느님나라에서는 주류 사회가 기겁할 만한 전복적 소망이 이뤄지고 선포된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신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많은 사건과 은유나 비유를 통해 알려 주는 하느님나라는, 그렇게 '다양한 형태와 맥락의 가난한 사람들'을 통해서만 제대로 만날 수 있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은 우리 사회의 성격을 알고 우리의 복음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비인간적이고 반인간적이며 불경한 세력을 목도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을 통해서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우리에게 공의를 요구하는 하나님의 부르짖음을 들려주는 역할을 하고, 하나님나라가 가져오는 심판의 징표이기도 하다.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일과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을 능력이 없으면, 하나님에 대한 참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 또한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과 낮은 사람의 편이라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세속화되고 안정된 교회와 권력기관에게는 불편하게 들리고 용납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성서에 계시된 하나님은 바로 그런 분이다." - 케네스 리치, <하나님 체험>, 청림출판, 731~732쪽

편드시는 하느님
언저리의 하느님
진짜 하느님

다양한 형태와 맥락의 가난한 사람들이 겪는 빈곤과 불평등, 소외 문제에 침묵하거나 마주하지 않는 교인과 교회는 진짜 하느님을 만나기 어렵다. 그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성전에 갇힌 가짜 하느님과 가짜 성서 해석만을 만날 뿐이다. 왜곡되고 축소된 천국과 지옥 해석 틀로만 만나는 하느님과 성서는 온전할 수가 없다. 그런 하느님과 성서 해석이 진짜라고 하기는 더 어렵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해 우리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알고 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곡해하고 이용했던 수많은 가짜 하느님과 가짜 성서 해석에 대해 알고 있다.

백인 우월주의에 뼛속까지 잠식된 사회에서 흑인을 비롯한 다양한 유색인종을 차별하는 데 이용당하는 하느님과 성서 해석은 진짜가 아니다. 이성애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고와 삶의 방식이 정답인 사회에서 성소수자와 여성을 차별하고 삭제하는 데 이용당하는 하느님과 성서 해석은 진짜가 아니다. 신체적·정신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2등 시민 취급받는 게 어쩔 수 없는 사회에 대해 반문하지 못하고 시혜적 존재로 이용당하는 하느님과 성서 해석은 진짜가 아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더부살이의 하느님, 지극히 작고 보잘것없는 취급을 받는 존재들을 편드시는 하느님, 상대적 약자와 사회적 소수자를 편드시는 하느님, 언저리의 하느님. 그래서 이제는 팔레스타인의 하느님이시기도 한 '우리들의 하느님'은 왜곡된 사회에서 주류적 가치를 지향하는 이들이 만들어 성전 안에 모셔 둔 가짜가 아니다. 그렇게 박제된 죽은 신이 아니다.

우리들의 하느님은 백인 우월주의에 맞서 싸웠던 평등과 해방의 사람들을 편드시는 진짜 하느님이다. 이성애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유령 취급받거나 쉽게 삭제당하고 억압과 차별을 당연하게 여길 수밖에 없던 성소수자와 여성들을 편드시는 진짜 하느님이다. 신체적·정신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2등 시민 취급하는 사회에 대해 반문하며 시혜적 존재로 활용당하지 않고 그들을 편드시는 진짜 하느님이다.

혐오와 차별, 소외와 착취에 이용당하는 하느님과, 그런 하느님이 하신 말씀으로 이용되는 성서 해석은 진짜가 아니다. 우리를 속박하고 억압하며 자유와 해방을 말하지 못하도록 세뇌하는 데 이용당하는 하느님과 성서 해석은 가짜다.

우리, 잊어선 안 된다. 이 시대와 사회, 교회에서 '몫 없는 자들의 몫'에 대해 잊지 않고 질문해야 한다. 아직 '제대로' 존재한 적이 없는 그들의 삶과 빼앗긴 목소리가 이 세계에 가능하도록 최소한의 교두보로 부르신 게 '교회'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그 '언저리 사람들', 그 '몫 없는 자들'과 함께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나라를 살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기억해야 한다. 우리들의 하느님은 편드시는 하느님이다. 맘몬을 섬기는 왜곡된 사회에서 주류적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들과 조직에 이용당하는 하느님과 성서 해석은 가짜다.

번영신학의 산실이었던 미국 수정교회 전경.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공용 이미지

우리들의 하느님은 적극적으로 편드시는 하느님이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더부살이를 편드시는 하느님이다. 지극히 작고 보잘것없는 취급을 받는 존재들을 편드시는 하느님이다. 그렇게 상대적 약자와 사회적 소수자를 편드시는 하느님이다. 그들을 계속 만들어 내는 사회구조와 일상 관계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들을 편드시는 하느님이다. 그렇게 언저리 사람들의 하느님이자, 그들과 함께하는 이들을 편드는 '언저리의 하느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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