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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형 교회 목사가 기억하는 5·18민주화운동
[인터뷰] 소강석 목사 "금남로는 피비린내로 진동했다"
  • 이용필 기자 (feel2@newsnjoy.or.kr)
  • 승인 2017.05.18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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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37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1979년 12·12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은 이듬해 5월 17일 확대 비상계엄령을 선포합니다. 계엄령에도 빛고을 광주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는 계속됐고, 신군부는 총칼로 시위를 진압했습니다. 5·18기념재단에 따르면, 168명이 죽고 4,782명이 부상당했습니다. 행방불명자, 암매장, 소각된 사람까지 더하면 5·18 희생자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스무 살이던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는 운암동에 있는 광주신학교(현 광신대) 1학년이었습니다. 목사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 전북 남원을 떠나 연고도 없는 광주에 안착했습니다. 소 목사는 '역사의 비극'이 일어난 1980년 5월을 잊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공수부대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총칼과 진압봉을 휘둘렀고, 금남로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했다고 합니다.

5·18민주화운동을 몸으로 경험한 소강석 목사 이야기를 통해 37년 전 광주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중국 출장 중인 소 목사와 국제전화로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기자 주

시민들이 무력 진압으로 숨진 희생자를 리어카에 싣고 계엄군에 항의하고 있다. 사진 출처 5.18기념재단

"버스를 타고 가는데, 금남로에서부터 (군인들이) 젊은이들을 잡아 놓고 족치는 거야. 야...그것 참...'빠둑방망이(진압봉)'로 사람들 뒤통수를 빡 치는데, 야…남자, 여자 할 것 없이 그대로 쓰러져 나갔지. 하... 갑자기 의협심이 끓어올라 버스에서 뛰어내리려 하니까, 어르신들이 '나가면 너도 죽는다'고 꼭 붙잡더라고."

[뉴스앤조이-이용필 기자] 37년이 흘렀지만,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억이 또렷했다. 그해 5월 광주를 묻는 말에 소강석 목사가 속사포로 말했다. 안타깝고 아픈 대목에서는 '야', '참', '하' 같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소강석 목사는 몸으로 경험한 1980년 5월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역사의 비극이 왜 일어났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소강석 목사는 1980년 광주 땅을 처음 밟았다. 고등학생 때 교회 여름 수련회에 참석했다가 은혜를 받고,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소 목사는 유교 전통 집안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와야 했다. 신학교를 다니면서 수박·오이 장사와 막노동을 하며 스스로 학비를 벌었다. 쉬는 날에는 노방전도를 다녔다.

5월의 광주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전남대 학생들은 시내에서 "전두환아 물러가라, 물러가라", "신현확(당시 국무총리로 비상 계엄 전국 확대를 결정한 국무회의를 주재했다 – 기자 주)도 물러가라, 물러가라"는 노래를 불렀다. '영혼 구원'에만 매달렸던 소 목사에게 이 모든 상황은 낯설었다.

"나는 그때 역사의식이 없었다. 전도지 들고 노방전도하려고 시위대 속으로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뭣도 모르고 박수를 쳤다. 학생들이 10·26 이후 들어선 신군부를 비판하는데, 다 맞는 말이더라. 군부독재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전남대 총학생회장이 연설을 하는데 정말 기가 막혔다. 어떻게 저렇게 연설을 잘할 수 있을까 싶었다."

소 목사가 기억하는 전남대 총학생회장은 박관현 열사다. 당시 경찰과 비밀 협약을 맺고 과격 시위가 아닌 횃불과 촛불을 든 평화 시위를 주도했다. 박관현 열사는 1982년 4월 '내란 중요 임무 종사' 혐의로 체포됐다. 50일간 옥중에서 단식투쟁을 하다가 숨을 거뒀다.

전남도청 분수대 광장 앞에서 평화 시위를 하고 있는 대학생들. 사진 출처 5·18기념재단

시위 분위기는 비장하고 무거웠지만, 경찰과의 물리적 충돌은 없었다. 소 목사는 "학생들이 민주주의 운동을 평화적으로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5월 17일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18일 공수부대가 투입되면서 아수라장이 됐다.

"그날이 마침 주일이었는데 예배를 마치고, 조선대 앞에서 운암동 신학교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학교에 가려면 무조건 금남로를 통과해야 했다. 창 밖 세상은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방망이를 든 군인들이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내리쳤다. 심지어 시위에 참여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도 잡아갔다.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비상계엄령과 동시에 휴교령이 떨어졌다. 신학교에는 소 목사 포함 2~3명만 남았다. 갈 곳이 없었던 소 목사는 기숙사에 머물렀다. 고립된 생활이 시작됐다. 군인이 총으로 사람을 쏴 죽인다는 이야기부터 시민군이 조직됐다는 소문이 변두리 신학교까지 들어왔다. 하루는 신학교로 군인들이 집결했다.

"한 군인이 공포탄 한 발을 쏜 다음 남아 있는 학생들 전부 모이라고 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오늘 저녁 잘못하면 총격전이 일어날지 모르니 절대 나오지 말라 했다. 이불 둘러쓰고 있으라고 했는데, 다행히 총격전은 없었다."

안 그래도 변두리에 있는 신학교는 세상과 더욱 단절됐다. 몇 안 되는 학교 앞 가게들은 문을 닫았다. 돈이 있어도 음식을 구할 수 없었다. 군인에게 눈에 띄면 잡혀가던 시기, 소 목사에게 음식을 조달한 이가 있다. 자취를 하던 최현종 목사는 쌀과 고추장을 전달했다. 그러다가 계엄군에 붙잡혔는데, 한 할머니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나한테 음식을 주고, 골목길로 돌아가다가 계엄군한테 붙잡혔다. 그때 한 할머니가 나와서 최 목사를 도와줬다. 마치 자식인 것처럼 '썩을 놈아 잡놈아, 언제 왔냐. 총 맞아 뒤질라 그랬냐'면서 머리를 잡고 집으로 들어간 거다. 최 목사와 그 할머니의 은혜를 나는 지금도 못 잊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우리 장모님도 살려 달라는 젊은이를 자식인 양 구해 준 적 있다. 광주 시민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어쩌면 더 많은 피를 흘렸을지도 모른다."

잊지 못하는 에피소드는 하나 더 있다. 소 목사는 신학교 기숙사에 있을 때 군인들에게 쫓기던 전남대 학생 두 명을 숨겨 줬다. 학생들은 소 목사와의 대화에서 "군부독재는 사라져야 한다. 정의와 자유가 흘러넘치는 세상이 돼야 한다"고 강변했다. 소 목사는 "영혼 구원과 예수님, 복음 이야기를 전했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감사 인사를 전하고, 다음 날 새벽 광주신학교를 벗어났다.

계엄 이후의 광주,
'죽은 자'의 도시로
폭동 일으킨 도시로 '왜곡'

소 목사는 숨진 희생자들을 보고 분노했다고 말했다. 사진 출처 5.18기념재단

무장한 계엄군은 시민군을 제압했다. 소 목사는 전투가 치열했던 전남도청 일대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고 말했다. 계엄군의 진압이 끝난 광주는 산 자와 죽은 자로 나뉘었다. 기독교계는 진압 당시뿐 아니라 수습할 때도 많은 도움을 줬다. 소 목사는 특히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전도국장 출신 고 변한규 목사님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진압이 끝나고 변한규 목사님을 따라서 도청 앞 상무관을 간 적 있다. 그곳에는 시신이 즐비했다. 오열하는 가족들을 보면서 피가 거꾸로 솟아올랐다. 희생자 앞에 선 내 자신이 너무 초라했다. 죄인이 된 듯했다." 

1980년 광주중앙교회에 부임한 변한규 목사는 장로들의 반대에도 교회로 몰려드는 청년들을 보호해 줬다. 변 목사는 과거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소회를 이렇게 밝혔다.

"5·18 당시를 회상해 보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역사의 주인이시며,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불러 주신 종으로서 보다 의롭고, 인간다우며 형제애가 넘치는 사회를 만드는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 민족이 역풍에 시달리고 슬픔에 젖어 있을 때 그것이 바로 교회의 슬픔이고, 설교자가 감당해야 할 몫이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설교자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지역사회를 외면할 수 없다."

계엄군이 떠난 뒤 광주는 검열의 대상이 됐다. 소 목사는 "당시 모든 교회가 계엄본부가 있는 상무대에 가서 주보와 회지를 일일이 보고했다. 이런 과정은 몇 달간 지속됐다"고 말했다.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광주는 역설적이게도 폭동을 일으킨 도시가 돼 있었다.

"버스가 시외로 다닐 때쯤 집에 연락을 드렸는데, 광주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킨 걸로 아시더라. 완전 폭동으로. 나는 당시 언론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대부분의 언론은 불순분자들에 의한 시위가 발생했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학생과 시민들이 분노한 계기 중 하나라고 본다."

소 목사는 극우 성향 인사들이 주장하는 북한군 개입설에 대한 생각도 밝혔다.

"북한군이 내려와서 (광주) 사람들을 선동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우리처럼 기도, 전도밖에 안 했던 사람들도 의분이 생길 정도로 폭력적이었다. 몇 시간 안 되지만, 나도 시위에 동참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우리도 북한군 선동으로 시위에 나섰다는 말인가. 계엄군이 먼저 총을 쐈으니까, 시민군이 맞서기 위해 무기고를 탈취한 것 아닌가.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5·18민주화운동이 준 깨달음
"영혼 구원뿐 아니라 사회 구원도 중요"

소 목사는 역사의 비극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소강석 목사는 수년 전 5·18에 투입된 계엄군 출신 부목사와 사역한 적 있다고 말했다. 진실을 알고 싶어 부목사에게 여러 질문을 던졌지만 "죄송하다"는 말 외에 다른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분은 특전사로 광주에 투입됐는데, 밥을 사주고 뭘 해도 절대로 말해 주지 않더라. 내가 '상부에서 시키지 않았냐', '역사의 비극이다', '하고 싶어서 했겠냐', '(광주) 어디서 뭘 했느냐'고 어르고 달래도 죽어도 말 안 하더라. 나도 그때 금남로 거리에 있었다고 하니까 '죄송하다'고만 하더라. 본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으니, 대답을 못 한 것 아니겠는가. 참...역사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5·18을 경험한 소 목사는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고 말했다. 영혼 구원뿐만 아니라 사회 구원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영혼 구원도 중요하지만, 교회가 사회 구원과 민중의 아픔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폭압과 압제에 의해 시민군들이 잡혀가 죽임당했지만, 민주화 정신은 지금도 총칼을 이기고 있지 않은가. 목회할 때에도 무력과 폭압으로 뚫고 가는 게 아니라, 설득하고 소통하겠다고 다짐했다. 만약 5·18민주화운동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면, 이런 생각은 얻지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강석 목사는 5·18민주화운동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남겼다.

"한 시대를 한 공간에서 살아갔던 젊은이로서 너무 죄송할 따름이다. 그때 역사의식이 있었다면, 끝까지 함께했을 것이다. 그러지 못한 것에 죄송한 마음을 느낀다. 당시 다치고 돌아가신 분들의 상처와 죽음은 헛되지 않다고 믿는다. 그분들의 피와 눈물 때문에 오늘의 민주주의가 눈부시게 성숙하게 됐고, 조국 발전의 숭고한 꽃씨가 되었다. 유족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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