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나쁜 하나님' 소개의 말

오늘의 한국교회는 정치적 타락, 종교적 부패, 신학의 허약함으로 인해 파산 직전에 몰려 있습니다. 이는 명백히 신학, 신앙, 교회의 위기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 너머에 치유를 위한 열망 또한 숨 쉬고 있음을 부정해선 안 될 것입니다.

치유와 소생의 가능성을 경험하기 위해 오늘의 한국교회를 지배한 기복과 왜곡된 순수의 풍경을 동시에 전망하는 문학적 시도는 어쩌면 필연이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이러한 시도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교회의 본령을 회복하는 사상적, 신학적 갱신 의지와 흐름을 같이한다고 확신합니다. <뉴스앤조이> 연재 소설 '나쁜 하나님'은 한국교회의 궤멸적 징후를 극사실적으로 해부하고 그 너머의 희망, 치유, 소망의 가능성을 함께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 소설가 주원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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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거 없고요. 병가원 한 장 쓰시면 됩니다.

병가원이란 말. 민규로서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하지만 행정목사 이황우가 자신의 책상 자리 위에 올려놓은 서류를 보았을 때, 민규는 병가원이란 서류가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 알 수 있었다. 행정목사는 자신이 제공한 정보를 자랑이라도 하는 듯 병가원 서류에 자신이 적어 놓은 부분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 주일예배에 빠지실 수밖에 없는 사례는 제가 말이 되게 적어 놓았으니 이름 쓰시고 사인만 하시면 됩니다.

월요일 아침. 담임목사 집무실을 9시가 되자마자 행정목사가 찾은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민규가 주일예배에 불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교인들에게 설명해 주기 위함이었다. 민규가 약간은 당혹스러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 병가원 사유란에 적혀 있는 이유를 읽어 내려가던 때였다.

- 제가 공황장애를 앓고 있다고요?

- 그게 제일 세련되니까요. 입증도 어렵고.

그렇게 말한 이황우가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었다. 자신보다 열 살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이황우의 표정을 보며, 민규는 다음과 같은 속내를 읽을 수 있었다.

'당신도 오래가지 못할 것 같네.'

이황우가 적어 놓은 병가원에 싸인하고 난 뒤였다. 집무실 흔들의자에 깊이 몸을 파묻은 민규는 아주 잠시 동안 어제 주일에 일어났던 일들을 떠올렸다. 신애원 아이들의 비명 소리는 여전히 귓가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민규를 더욱 신경 쓰이게 만든 건 한영호 장로의 말이었다.

유재환 목사. 민규로서는 한영호 장로로부터 유재환의 이름을 들을 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교단과 사회로부터 이단으로 판정받고 율주제일교회로부터 퇴출된 이후, 유재환이란 이름 석 자는 교인들 사이에 금지어로 통했다. 민규의 어머니 양 권사조차 민규가 율주제일교회로 청빙받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대뜸 유재환에 대한 경계심부터 드러냈다.

'행여 유재환 목사 이야기를 꺼내선 안 돼. 그 사람은 이단 중에서도 상종 못할 이단이 되었어.'

그런데, 그런 유재환과 자신이 닮았다? 민규는 한영호의 말이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이해되지 않으면서도 그의 마음 한구석엔 강한 이끌림이 있었다. 특히나 자신의 논문과 유재환 목사의 성경 공부가 일치한다는 말이 끝을 알 수 없는 울림이 되어 들려왔다. 그와 함께 민규는 자신의 스마트폰에 남아 있는 한 통의 메시지, 오늘 새벽. 한영호가 보낸 문자를 바라봤다.

'오늘 오후 5시. 우리 한의원에서 성경 공부가 있습니다. 목사님이 정말 교회를 위하고… 신애원 아이들을 위한다면 꼭 와 보셔야 합니다.'

교회를 위하고, 신애원 아이들을 위한다?

늦은 오후 4시가 다 되도록 민규는 집무실을 벗어나지 않았다. 오전에 이황우 목사가 들러 자신이 미리 작성한 병가원에 사인을 받고 나간 게 전부였다. 그 사이 민규의 집무실 안으로 한 명의 방문객도 찾지 않았다. 대표 전화를 통해 식사 여부를 묻는 전화. 김영철 장로 측 사람이 민규의 행방을 묻는 듯한 의도를 품은 전화 몇 통 걸려 온 게 전부였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민규가 자리에서 일어선 건 오후 5시였다. 집무실 밖, 붉은 석양의 기운이 공간을 한가득 감싸 안았다. 민규의 귓속에선 다시 아이들의 비명 소리가 오갔다. 창밖 건너편에 진한 청록빛 넝쿨에 에워싸인 신애원 건물이 보였다. 동시에 일식집 도코모토에서 보았던 한 마리 짐승이자 범접할 수 없는 상왕(上王) 김영철 장로의 모습도 보였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무정한 모습이 무법한 야생에 노출된 굶주린 늑대를 떠올리게 했다. 그때, 아이들의 비명 소리가 다시 한 번 민규의 마음속 깊이 파고들었다. 민규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듯 자조적인 독백을 터뜨렸다.

'날 보고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답이 없었다. 답을 잃어버린 민규가 이끌리듯 차를 타고 운전대를 잡고 가는 곳이 있었다. 한의원이었다. 민규는 율주시의 옛 중심으로 취급받는 한영호 장로가 운영하는 한의원을 향하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민규가 반복해서 깜빡거리는 스마트폰 액정을 바라봤다. 한 통의 메시지. 한영호가 아닌 정은의 메시지였다.

일러스트레이터 주원태

'목사님이 와 주실 거라 믿어요. 어제 보고 들으셨던 그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다면요.'

김정은의 말이 정답일지 모른다고 민규는 믿었다. 누군가 그랬다. 타인의 끔찍한 비극에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정의나 공분이 아니라 정작 그 자신이 견딜 수 없기 때문이라고. 민규는 사실상 타인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자기 자신이 숨을 쉬는 것. 숨만 쉴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것 같았다. 아이들의 비명과 무정한 짐승들이 민규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한 민규는 숨을 쉰다는 게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서 민규는 한영호의 한의원으로 향했다. 그가 말한 성경 공부, 그곳으로. 초대 목사 유재환을 추종한다는 그 비밀스런 모임이 있는 곳으로. 그것은 한영호의 설득도, 김정은을 향한 연정도, 그 무엇도 아니었다. 단지 민규는 숨을 쉬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숨이 막혀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계속)

*'나쁜 하나님'은 주 3일(월, 수, 금) 업데이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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