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명동 향린교회 3층 예배당. 입구에 작은 추모 공간이 마련됐다. 탁자 위에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는 여섯 사람 사진이 담긴 액자가 놓였다. 사진 속 사람들은 환하게 웃으며 추모객을 맞아 주었다. 액자 앞에는 먼저 떠난 이들이 아끼던 성모상, 예수상, 담배, 보드게임, 미키마우스 인형 등이 있었다.

기도회에 참석한 추모객들은 그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숙였다. 차오르는 눈물을 꾹꾹 참으며 서 있기도 하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연신 닦아 내는 사람도 있었다. 성소수자를 향한 기독교의 혐오 섞인 발언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 14년이 지난 지금도 세상은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기독교의 성소수자 혐오는 더욱 조직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한다.

예배당 입구에 마련된 추모 공간에 한 참석자가 헌화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육우당은 마중물"

'고 육우당 14주기 추모 기도회'는 4월 27일 명동 향린교회에서 열렸다. 110명이 넘는 추모객이 참석했다. 2003년 4월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동성애자를 소돔과 고모라의 유황불로 심판해야 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20일이 지난 후 가톨릭 청년 육우당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몰지각한 편견으로 한 사람을, 아니 수많은 성소수자를 낭떠러지로 내모는 것이 얼마나 잔인하고 반성경적인가"라는 유서를 남기고 그는 말없이 이 세상을 등졌다.

육우당을 비롯해 혐오와 차별을 견디다 못해 스러진 사람들을 기억하는 기도회. 분위기는 무거웠다. 최근 각 당 대선 후보들의 잇따른 '동성애 반대' 발언에 마음이 무너진 상황이다.

살아있을 때 육우당을 알던 곽이경 씨가 기도회 시작을 알렸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기도회는 곽이경 씨 인도로 시작했다. 곽 씨는 생전 육우당을 아는 사람이다.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전신 동성애자인권연대 활동가로 있을 때 육우당을 만났다. 그는 "육우당이 우리가 가는 길의 마중물이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횡포가 너무 크다. 이 기도회가 사람들 마음을 여는 따뜻한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시조 시인을 꿈꿨던 육우당이 남긴 시조를 함께 읽으며 기도회가 시작됐다.

어서 오라 어서 오라 평화로운 세상이여
어두컴컴 암흑 세계 잡아먹고 어서 오라
은하수가 흐르듯이 꽃잎 타고 흘러오라
평등 평화 아름다운 세상이여 어서 오라
동성애자 보호받고 장애인도 존중받고
흑인 또한 사람대접 받는 세상 낙원이여
그런 날이 온다면은
모든 이가 밤낮없이 덩실덩실 춤을 추며 기뻐할 것이다
- '낙원가', 육우당

무거운 침묵이 예배당을 가득 메웠다. '사랑이 이기네'를 작곡한 이지음 씨가 나와 참석자들에게 함께 노래할 것을 권했다. "그 모습 그대로 오시오. 당신의 모습 그대로. 주님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참석자들은 주위 사람과 손을 맞잡고 노래를 불렀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공개적으로 부정당하는 시대, 항의하는 목소리를 조롱하는 시대,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노래를 함께 불렀다.

이지음 씨가 참석자들과 함께 "그 모습 그대로 오시오"라고 노래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고통받는 이들과
항상 함께하소서"

설교는 소수자를 위한 기도로 대신했다. 도심 속 수도 공동체 '신비와저항' 박진석 수사를 시작으로 맡은 이가 돌아가면서 기도문을 읽었다. 박 수사는 청소년 성소수자를 위해 기도했다. 학교에 알려지는 순간, 왕따는 기본이고 조롱거리로 전락하는 청소년 성소수자. '자살 고위험군'(자살 시도 45.7%, 자해 53.3%)에 속하는 성소수자 청소년을 위한 기도였다.

"여전히 노골적인 폭력을 가하는 사회와 편파적인 교회의 가르침 속에 세상은 14년 전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허나, 더 이상 아파하고만 있는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되지 않게 하시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기뻐하고 인격으로 태어나 사랑할 수 있음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는 당당한 주역이 되게 하셔서 정죄하는 모든 이들의 손가락을 부끄럽게 하옵소서."

'신비와저항' 박진석 수사가 청소년 성소수자를 위한 기도문을 읽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매일 같이 반복되는 혐오와 차별에 노출된 사람들을 위한 기도문도 있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이들이 내뱉는 혐오와 차별에 짓눌려 단발의 비명도 지르지 못하는 사람이 우리 곁에 많이 있습니다. 두려움에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에게까지 애써 지워야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다름을 혐오로 갚고, 차이를 차별로 응징하는 이들 때문에 자신을 혐오하고 차별을 내면화한 이들도 있습니다. 하나님 이러한 고통과 외로움, 두려움을 외면치 마시고 고통받는 이들과 항상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동성애자를 종교 행위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이들이 있다. 하나님을 제대로 믿으면 동성애애서 벗어나 이성애자로 살게 될 것이라고 믿는 이들은 '전환 치료'를 자행한다. 이들에게 성소수자는 고쳐야 할 대상이다. 전환 치료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기도도 올렸다.

"주님, 아름다우신 주님. 당신을 닮은 아름다운 이들이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온전히 살아갈 당신의 나라를 소망합니다. 언젠가 찾아올 당신의 그 나라에서 전환 치료를 부르짖던 이들이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며 숨기를 기도합니다."

기도문을 읽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복받치는 감정을 제어하기 힘들어 보였다. 기도문을 읽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고, 읽다 멈추기를 수차례 반복한 끝에 준비한 기도문을 다 읽을 수 있었다. 객석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박진영 목사(왼쪽), 함윤숙 사제, 변영권 목사가 성찬식을 집례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성찬을 마친 뒤 참석자들은 '사랑이 이기네'를 불렀다. 이 노래는 지난해 퀴어 문화 축제 때 '아멘 더 레인보우'가 중앙 무대에서 부른 노래다. "사랑하세 사랑이 이기네. 모든 차별과 미워함은 우리 것이 아니네. 사랑하세 사랑이 이기네. 우리를 사랑한 사랑으로"라는 노래 가사에서는 참석자들의 목소리가 더 우렁차게 들렸다.

기도회는 공동 축도로 마무리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얼굴을 마주할 수 있게 둥그렇게 섰다. 손바닥과 손바닥을 마주 대고 축도문을 함께 읽었다.

우리는 함께 추억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 작은 노랫소리에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를.

우리는 함께 기도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기를,
누군가가 꾸던 꿈들이 허무하게 사라지지 않기를

우리가 우리로 살아간다는 것이 더 이상 아픈 일이 아닌 세상을
우리는 꿈꾸고 있습니다.
우리를 지켜 주세요.
우리를 따뜻하게 지켜봐 주세요.

어느 멋진 날에 우리는 결국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그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날 때,
머리맡에 눈부시게 서 있는 당신을 만날 그날이 올 겁니다.

이런 우리들을 만드시고 아름답다고 이야기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교회에서 쫓겨난 성소수자들과 함께 울고 계시는 예수님의 은혜와
성 정체성과 성 지향성에 상관없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님의 친구 되심이
당신 안에, 또 우리 안에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함께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참석자들은 서로 손바닥을 대고 공동 축도문을 읽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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