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사람들은 그를 '성공한 난민'이라 부른다. 16년 전 36세 때 여자로 위장하고 콩고민주공화국(콩고)을 떠나온 욤비 토나(Yiombi Thona) 교수(광주대학교)는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 정착했다. 당시 '코리아' 하면 북한밖에 몰랐다. 콩고는 북한과 더 많이 교류하던 나라였기 때문이다. 한국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나서야 자신이 발 디딘 땅이 서울인지 알았다.

한국 도착 직후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해 이런저런 공장을 전전했다. 콩고 키토나 부족 왕자 출신으로 고등교육을 마치고 비밀정보요원으로 활동한 그였지만,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2008년, 거듭된 심사 끝에 한국 도착 6년 만에 난민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후 주변 사람들 도움으로 성공회대에서 아시아비정부기구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이야기는 2013년 1월 <내 이름은 욤비>(이후)로 출간됐다. 이어 KBS 인간극장 5부작에 출연하면서 전국 안방에 그의 이름과 사연이 알려졌다. 덕분에 광주대학교 기초교양학부 교수로 초빙됐다. 이곳에서 인권, NGO, 다문화, 아프리카정치학개론 등을 가르친다. 난민에서 교수가 된 욤비 교수. 여기까지는 익히 알려진 그의 신데렐라 스토리다.

한국 사회는 성공한 외국인이 그저 이야기 속 주인공으로 머물러 주길 바란다. 하지만 욤비 교수는 그 틀을 과감하게 깨고 있다. 현실에서 만난 한국인의 편견, 까만 피부를 가진 외국인으로서, 난민으로서 한국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진실'을 이야기한다. 한국이 난민으로 받아 줬는데, 은혜도 모르고 쓴소리한다고 욕먹는 일도 많다. 이유 없이 협박을 당할 때도 있다.

욤비 교수에게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여러 차례 인터뷰를 고사하던 욤비 교수는 결국 약속 날짜를 잡자고 했다. 4월 16일, 욤비 교수가 근무하는 광주대학교를 찾았다. 욤비 교수는 감기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어린 딸들을 간호하다 늦었다며 미안해했다. 그를 만나 이야기를 시작하고 보니 왜 그렇게 인터뷰를 고사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한적한 4월 16일 오후, 광주대학교에서 욤비 교수를 만났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진실' 얘기한 것뿐인데
'협박' 일삼는 한국인들

욤비 교수는 최근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정부의 '다문화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지역 곳곳에 세운 다문화 센터가 말 그대로 '다(多)문화' 센터가 아닌 한국 문화를 전파하는 센터에 불과하다는 논지였다. 그가 실제로 겪은 일 등을 바탕으로 의견을 개진한 것뿐이었다.

"기사가 보도된 후, 지난 월요일부터 메시지, 메일, 전화 많이 받았어요. 지지한다는 사람도 많았지만 반대 의견을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죠. 문제는 반대하는 사람들이 토론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다짜고짜 '당신 한국인이야 콩고 사람이야'라고 묻더라고요. 속으로 '이건 뭐지'라고 생각했지만 '콩고 사람'이라고 답했어요.

그랬더니 '그래? 여긴 한국이야. 한국은 당신 같은 사람 필요 없어. 다문화 필요 없어. 닥치고 너네 나라로 돌아가. 안 그러면 당신과 가족 모두 무사하지 못할 거야'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동호수, 내 차 정보까지 말하는데…(한숨) 이게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계속됐어요. 나를 위협하는 건 괜찮은데 가족들 안전까지 위험에 처하는 건 아니죠. 그래서 경찰에 신고했어요."

전화를 걸어 온 사람들은 자신을 '일베'라 소개했다. 그는 그전까지 일베(일간베스트)가 뭐하는 곳인지도 몰랐다.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물어보니 "나쁜 사람들"이라고 알려 줬다. 한 사람도 아니고 그룹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민주주의가 꽃피고 인권이 보장되는 나라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믿기 힘들었다.

"서로 다른 의견을 논의하고 토론하는 건 민주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나와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죽이겠다고 협박 전화라니. 16년 전 나와 가족을 죽이겠다고 위협한 콩고 정부와 한국 상황이 뭐가 다른가요. 당시 콩고에서도 '진실을 말하면 죽인다'고 했어요. 한국은 콩고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발전했는데, 이 문제만 놓고 보면 다른 게 뭔가요."

다양성 없는 '다문화 정책'
한국 사회 발목 잡을 것

협박을 받으면서도 진실을 말해야 하는 이유는 현실에서 외국인으로서, 난민으로서 받는 '차별'에 있다. 갈 곳 없는 자신과 가족을 받아 준 고마운 나라 한국. 여기에 이견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욤비 교수는 한국을 사랑하는 만큼 한국이 더 발전하기를 원한다. 난민을 위한 법 조항은 그럴듯하게 만들었지만 난민은 여전히 매일 차별과 마주한다. 이런 현실을 바꾸고 싶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려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힘을 쏟고 있는 '다문화 정책'만 해도 그렇다. '다문화 가정'을 가리키는 말은 한국 남자와 결혼한 외국인 여성이다. 한국 여성과 결혼한 외국인 남성, 외국인 부모 밑에서 태어나 한국에 정착한 한국 국적 아이들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다문화 정책'이라는 말로 한국이 다양성을 보장하고 권장하는 나라 같지만 현실은 전혀 아니라고 욤비 교수는 말한다.

"광주, 서울, 인천, 울산, 수원 등 한국 주요 도시에 있는 다문화 센터에 가 봐도 똑같아요. 건물 밖에는 '다문화 센터'라고 적혀 있지만 안에 들어가면 한국인 교사 몇 명 빼고 다 외국인 여성들입니다. 그곳에 와서 한국어 배우고, 김치 만드는 법 배우는 프로그램이 대부분이에요.

그분들의 한국인 남편도 다문화 센터에 와서 부인이 태어난 나라의 고유문화를 배우고 해야 진짜 '다문화 센터' 아닌가요. 학문적으로 보면 이건 '동화'(同化) 혹은 '흡수'를 위한 센터밖에 되지 않아요.

제가 한번은 한국어능력시험(TOPIK) 자격증이 필요해서 좀 배우려고 했어요.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제가 살고 있는 지역 다문화 센터를 소개해 주더군요. 다문화 센터에 전화했더니 대뜸 하는 질문이 '사모님이 한국 사람이에요?'였어요. 아니라고 했더니 '여기는 다문화 가족만 위한 곳이라 안 된다'고 하더군요. 부부 모두 외국인이면 다문화 가족이 아니라는 말이죠. 웃음밖에 안 나왔어요."

한국은 이민자를 계속 받아들이고 있는 나라다. 한국 아빠, 외국인 엄마 사이에 난 아이들도 학교에서 차별과 마주하며 정체성 혼란을 겪는 경우가 많다. 하물며 외국인 부부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매일 차별을 겪는다. '흑형'이라는 단어가 왜 인종차별이 되는지 모르는 사회에서 어찌 보면 차별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욤비 교수는 난민 최초로 아시아·태평양난민권리네트워크 의장으로 선정돼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사진 제공 욤비 토나

욤비 교수는 이민자의 다양성을 배제한 채 한국 사회에 흡수시키려는 이런 정책은 또 다른 문제를 낳을 것이라 봤다. 그는 프랑스, 벨기에 등 유럽 여러 국가에서 테러가 발생하는 건 다문화 정책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이들 나라는 겉으로는 이민자를 포용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차별적인 요소가 남아 있다고 했다. 이민 온 부모보다 그곳에서 태어난 자녀 세대가 테러에 가담하는 까닭을 여기서 찾았다.

"이민자 자녀들은 한국에서 태어나 모든 삶이 여기 있어요. 부모가 태어난 곳 혹은 어렸을 때 떠나온 곳으로 갈 수 없죠.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한국인'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이 친구들을 염두에 두지 않아요. '원 오브 어스(one of us)'로 인정하지 않는 거죠.

저는 한국인의 이런 인식이 '보이지 않는 폭탄'을 만드는 것이라 봐요. 생각해 보세요. 자기는 여기서 태어나서 자라고 교육받고 직장 잡고 세금까지 내고 있는데, 정작 한국 사회가 자기를 한국인으로 인정 안 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나는 엄마 아빠 나라로 돌아갈 수도 없고, 한국인인데 왜 나를 거절하지?'라는 생각을 하다 보면 '외로운 늑대'가 탄생할 수 있는 거죠. 프랑스에서 태어났는데 IS에 가담한 사람들처럼요. 자꾸 프랑스 다문화 '정책'이 실패했다고 하는데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사회가 이들을 조건 없이 받아들일 준비가 됐는지 안 됐는지 문제죠."

'난민' 이해 부족한 사람들
정부도 '공식적 차별'
세금 내고 의무 다하는데
왜 혜택은 못 받을까

한국에서는 단어를 오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다문화'가 그런 경우였고 '난민'도 그랬다. 지금이야 시리아 난민이 많아지면서 '난민'(refugee)이 어쩔 수 없이 살던 나라를 떠난 사람이라고 이해하지만, 욤비 교수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그는 지금도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난민'을 찾으면 "가난하여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라고 써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 사람들이 외국인을 만나면 물어보는 공통적인 질문이 있어요. '몇 살인가. 한국에는 왜 왔나. 한국에서 무슨 일 하고 있나. 얼마나 버는가. 한국이 좋은가, 당신 나라가 좋은가. 언제 돌아갈 예정인가.' 언제나 이 질문을 해요. 나는 난민이라 콩고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하면 얼굴빛이 싹 바뀝니다. '세상에, 나 지금 현금 1,000원밖에 없는데 이거 나중에 콜라 사 마셔. 세상에 난민이라니….' 난민은 가난하다는 이미지가 남아 있더군요."

욤비 교수가 한국에서 만난 많은 사람이 난민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은 1992년 UN 난민지위에관한협약에 서명했다. 햇수로 따지면 20년이 훌쩍 넘는다. 게다가 2012년 아시아 국가 중 최초로 '난민 등의 지위와 처우에 관한 법률(난민법)'을 제정해 2013년 7월부터 시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 사람이 난민 이해도가 낮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내 가진 재산을 다 걸고 얘기할 수 있는데요. 지금 당장 길거리에 나가서 난민이 어떤 지위를 가진 사람들인지 물어보면 아무도 모를 거예요. 공무원도 마찬가지죠. 법무부에서도 난민 관련 업무를 하는 사람들만 알아요. 난민은 한국인은 아니지만 투표권을 제외하고 한국인과 모든 권리를 동등하게 누린다는 사실을 아는 일반인은 거의 없어요. 여기에서 오는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욤비 교수는 평소 해외 방문 때 사용하는 '여행증명서'를 가지고 와 설명하기 시작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쪽으로 가더니 '여행증명서'라고 적힌 것을 들고 왔다. 여권과 비슷한 크기, 동일한 재질이지만 분명히 '여행증명서'라고 적혀 있고 발행국은 '대한민국'이었다. 욤비 교수가 해외에 나갈 때 그의 신분을 대신할 수 있는 증명서였다. 대한민국이 발행한 여행증명서지만 이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보통 해외여행 나가려면 2시간 정도 여유를 두고 출발하라고 하죠. 저한테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걸 들고 출국 심사대에 서면 언제나 똑같은 반응이 돌아옵니다. '응? 이거 뭐야. 이거 어디서 받았어요?' 한국에서 발행한 문서인데도 못 알아봐요. 이리저리 살피다 어디론가 전화를 해요. 뭐라고 통화하고 나면 저를 조사실로 보내죠. 그게 얼마나 창피한 일인지 당하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출국할 때 이런 일을 겪었으니 돌아올 때는 좀 다를까요. 아니요, 또 똑같아요. 어쩜 그렇게 똑같은지 몰라요. 게다가 한국에 입국할 때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리죠. 또 조사실에 불려 가서 신용카드, 교수 명함, 자동차 면허증 등등 내가 한국에 살고 있다는 증거를 다 꺼내면 그제야 보내 줍니다. 한국에 살지 않는 외국인이 입국할 때 심사에 걸리는 시간은 1분도 안 되는데, 왜 저한테는 매번 그러는지 정말 화가 나요."

욤비 교수는 난민 인정을 받았지만 딱히 정부의 혜택을 받고 사는 건 아니다. 외국인이라고 세금을 안 내는 것도 아니다. 그는 한국은 외국인에게 똑같은 의무를 요구하지만 정작 여러 복지 정책은 내국인 적용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며 '공식적 차별'도 실재한다고 했다. 난민법으로 난민 지위를 인정하고 보장하는 한국이지만 실생활에서는 아닌 경우가 훨씬 많았다.

그는 과거 실직한 뒤 실업 급여 80만 원을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법무부에서는 난민도 실업 급여를 받을 수 있다고 했지만, 주민센터 실무자는 외국인에게 실업 급여를 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두 부서는 전화로 실업 급여 지급 여부를 놓고 싸웠다. 한국인 친구 도움으로 결국 돈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대신 길거리 청소를 해야 한다고 했다. 추운 겨울, 새벽에 일어나 청소 현장을 찾았지만 "뭔가 착오가 있었나 본데, 외국인은 이 일 못해"라는 말을 들었다.

욤비 교수는 이런 부조리가 난민, 외국인을 한국에 정착하지 못하게 한다고 했다. 그는 "한국 법에는 아주 좋은 문구는 많은데 실생활에 적용되지 않아요. 그런데 현실을 개선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죠. 고통은 현실을 사는 난민이 고스란히 떠안습니다. 결국 이 나라에서 살지 못하고 떠나요. 난민 인정받으려 정말 열심히 노력했는데, 정작 난민 인정받고 이틀 만에 떠나고 싶은 나라가 한국"이라며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욤비 교수는 난민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려면 언론과 교육이 변해야 한다고 했다 . 뉴스앤조이 이은혜

실재하는 '차별' 타개책
언론과 교육 변하는 것

욤비 교수는 인터뷰 중간중간 "이렇게 말해 미안하다"고 했다. 한국 사회에 실재하는 차별을 있는 그대로 얘기할 때, 언론이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는 얘기를 할 때였다. 그는 한국의 많은 언론이 차별을 조장하는 보도를 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미디어는 물론이고 국회부터 말단 정부 기관까지 '다양성'이 뭔지 배워야 해요. 잘 모르면 배워야 하는 게 맞죠. 뉴스를 보세요. 프랑스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일본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고 설명하다가, 아프리카로 넘어가면 그냥 '아프리카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정도만 얘기해요. 그 넓은 아프리카 대륙의 많은 나라를 '아프리카'라는 한 단어로 압축하는 거죠. 가장 좋은 예가 에볼라예요."

정확히는 서아프리카 일부 국가에서 발병한 에볼라였다. 한국에서는 연일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에볼라'라는 기사가 메인 화면을 장식했다. 이태원 한 펍에서는 "에볼라 때문에 당분간 아프리카 사람은 입장을 허락하지 않는다"라는 문구가 붙었다. '아프리카 사람'을 분별하는 방법은 신분증 확인도 아닌 피부색이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국적 백인은 제재 없이 입장할 수 있었다. 차별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일어난다.

학교에서도 차별은 존재한다. 욤비 교수는 한국 정부가 더 강력하게 '차별은 안 된다'는 교육을 진행해야 한다고 했다. 차별받고 있는 당사자들과 난민·외국인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욤비 교수는 "한국 정부가 난민 관련 법을 만들면서 난민들 이야기를 듣지 않은 것은 난센스"라며 이런 일일수록 당사자 의견을 들으면 좋겠다고 했다.

욤비 교수는 하나님이 자신을 이 낯선 땅으로 이끄시고, 헌신적인 사람들과 만나게 하신 덕분에 지금의 삶을 살고 있다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침묵을 지키던 그가 입을 열었다.

"이 세상은 모두에게 속한 것이라 생각해요. 작은 여러 부분이 합쳐져 하나의 큰 세상을 만드는 것이죠. 일제강점기에 한국 사람들이 핍박을 받아 중국으로, 미국으로 떠났잖아요. 그게 난민이죠. 한국전쟁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전쟁 때문에 살기 힘든 사람들은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죠. 이승만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 다 난민이었어요. 왜 한국은 자신들의 역사를 잊어버리나요.

난민도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 주세요. 사람으로 대우해 주세요. 모든 이가 난민을 돕거나 기부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저 난민이 사람으로서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달라는 것뿐이에요. 그러면 각자가 삶에서 싸워 나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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