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미수습자와 함께하는 부활절 예배가 열린 4월 16일. 목포신항 길 한쪽에 모여 있던 세월호 가족들이 한 중년 남성을 보자 반갑게 인사했다. 갈 길 바쁜 이 남성을 잡은 세월호 엄마들은 이내 뭔가를 챙겨 줘야 한다며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드링크 음료, 오렌지, 빵을 등 주섬주섬 싸 준 엄마들은 그가 반가운지 손을 잡고 한참을 놓아주질 않았다.

세월호 가족들과 인사를 나눈 이는 장헌권 목사(서정교회). 그는 지난 3년간 세월호 가족들이 광주 지역을 찾을 때마다 함께했고, 팽목항에서도 종종 미수습자 곁을 지켰다. 2014년, 안산을 떠난 세월호 도보순례단이 광주 지역을 지날 때 함께 걷는 것으로 인연이 시작됐다.

장 목사는 세월호 진상 규명 활동에 앞장서고 있는 '광주시민상주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광주시민상주모임'은 틀이 있는 조직이 아니다. 2014년 6월, 세월호 가족의 아픔에 공감하는 광주시민 몇몇이 모여 시작했다. 지금은 약 350명가 참여한다. 자발적으로 자신이 거주하는 동네 인근에서 촛불을 켜고 '잊지 말자'는 문구를 들고 1인 피케팅도 한다. 순번을 정해 미수습자 가족이 머무는 팽목항으로 음식을 해 나르기도 했다.

세월호 엄마들은 장헌권 목사를 보고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세월호 희생자 기억하는 법

할 수 있는 최대한 세월호 가족 곁에 머무르려 했다. 장헌권 목사도 처음에는 가족들에게 다가가 말 걸기가 쉽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내가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큰일 나는 걸 알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조심스러웠다"고 말했다. 광주에서 재판이 열린 2014년 6월부터 2015년 7월까지, 법정에 온 세월호 가족과 함께 밥 먹으며 서로 얼굴을 익혔다.

목회하는 것도 힘든데 굳이 세월호 가족들까지 챙기려는 이유가 뭘까.

"세월호 가족은 끝나지 않는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인 것 같아요. 이분들을 '섬긴다'고 하면 너무 거창한 이야기고요. 함께하니까 보람이 있더라고요. 세월호 가족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 카카오톡, 문자 등으로 안부를 물었어요. 이렇게 관계를 쌓고 난 후에는 부모님들이 연락을 주세요.

어떨 때는 한 아빠가 '목사님, 나 오늘 술 먹었습니다' 이러면서 울음 가득한 목소리로 연락이 오죠. 생각해 보면 그런 채널이 그분들에게도 필요했던 거 아닌가 싶어요. 필요할 때 아무 때나 이야기 들어 주고 함께 머물러 주는 사람이요."

세월호 참사 희생자 한 명 한 명을 더 잘 기억하려고 하루에 한 장씩 수첩에 기록을 남겼다. 인터넷, 언론에서 설명한 희생자 304명과 스스로 목숨을 끊은 단원고등학교 교감 선생님까지 305명의 이름과 특징을 적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 사람들을 다 기억하지 못할 것 같았어요. 한 사람 한 사람 더 잘 기억하기 위해서 썼죠. 이렇게 쓰다 보니 이름만 아는 것보다 조금 더 친근하게 느껴지더라고요. 한 사람 한 사람 다 절절한 사연이 있고 살아 온 인생, 성격이 다 달라요. 너무 마음이 아파요."

5·18과 세월호
국가 폭력 희생자

장헌권 목사는 세월호를 국가 폭력 사건으로 보고 있다. 구할 수 있었던 충분한 시간이 있었는데도 구조하지 않은 해경, 국민들이 위기 상황에 빠졌는데 자취를 감춘 대통령. 세월호 가족을 공격한 언론과 일부 국민. 5·18을 '광주 폭동', '광주 사태' 등으로 묘사했던 그때와 다를 게 하나도 없어 보였다.

장헌권 목사(서정교회)는 세월호도 5·18과 마찬가지로 국가 폭력이라고 봤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1980년 5월, 호남신학대학교 3학년에 재학하던 장 목사는 시민군에 가담하지는 못했다. 당시 직접 싸움에 나서지는 못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했다. 보기에도 처참하게 망가진 시신들 사진을 교정에 전시했다. 당시만 해도 호남신학대학교는 정식 대학교로 인가받지 못한 '각종학교'였다. "대학으로 인정받아야 하는데 이런 짓해서 되겠느냐"는 교수들의 질타가 이어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불의한 권력에 순종하는 이들은 다른 목소리 내는 사람을 억압했다.

"5·18도 학생은 앞장서서 민주화를 외치고, 시민은 나서서 대동 세상을 꿈꿨어요. 그런데 국가는 그들을 총검으로 찌르고 곤봉으로 때리고 헬기에서 사격을 가한 거거든요. 이런 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국가 폭력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세월호도 단순히 수학여행 가던 학생들이 당한 사고가 아니에요. 구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는데도 한 명도 안 구한 건 살인 아닌가요."

교회가 국가 폭력 희생자를 기억하고 가족을 위로하는 것에서 멈추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신학교에서 만난 본회퍼 덕분에 사회문제에 더 크게 눈을 뜬 장헌권 목사였다. 그는 교회가 피해자 위로하는 일도 해야 하지만 동시에 구조 문제를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에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사회참여 운동을 거창하게 생각해 본 적 없다는 장헌권 목사. 그에게 사회참여는 '하나님나라 운동', '예수 운동'이었다. 장헌권 목사는 "일개 목사 한 명이 사회문제에 관심 갖고 눈을 돌린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예수님인 가난한 자, 억눌린 자, 고아와 과부 편에 섰던 것처럼 그냥 저도 그쪽에 서기 위해 노력하는 거죠"라고 말했다.

부당한 권력에 대응 못 한
빚진 자 마음으로

세월호가 물 위로 올라온 3월 26일. <포커스뉴스>는 장헌권 목사가 광주교도소에서 복역하던 세월호 조타수 오 아무개 씨에게 '양심 고백' 편지를 받았다고 보도했다. 이 편지에는 세월호 C데크 외벽 일부가 천막으로 대체돼 이쪽으로 물이 유입됐을 것이라 보는 내용이 그림과 함께 담겨 있었다.

장헌권 목사가 구속수감 중인 세월호 탑승 선원 2명에게 받은 편지. 이 편지에 적힌 내용은 일부 사실로 드러났다. 뉴스앤조이 현선

그 커다란 배가 갑작스레 침몰한 데 또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 장헌권 목사. 그는 2014년 10월 재판 당시 세월호 선장 및 선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진상을 규명하는 데 앞장서 달라는 호소였다. 보낸 편지 일부는 '수취인 거절'로 반송돼 왔고, 2명만 답을 보내 왔다.

세월호 선원 2명이 보낸 편지에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세월호에 탔던 선원들 때문에 그들의 가족이 힘들어한다는 이야기, 장헌권 목사가 진상 규명을 위해 앞장서 달라는 이야기, 우울증을 앓고 있는 자신을 위해 기도를 부탁한다는 이야기였다.

이 중 하나가 지난달 보도된 조타수 오 씨의 편지다. 안타깝게도 오 씨는 지병으로 지난해 유명을 달리했다. 그의 비석에도 "진상을 규명하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고 장헌권 목사는 전했다.

3년 동안 세월호를 위해서라면 먼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세월호가 워낙 엄청난 참사였기 때문에 이 사건을 계기로 사회문제에 눈을 떴다고 고백한다. 장헌권 목사에게 세월호는 '마음의 빚'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당선 때부터 '국정원 불법 선거' 의혹을 받고 있었다. 광주 국정원 분원 앞에서 동료 목사들과 함께 삭발까지 하면서 불법 선거 의혹을 밝히고 싶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난해 11월 서울에서 열린 민중총궐기에 참석한 장헌권 목사(가운데). 뉴스앤조이 박요셉

장 목사에게 세월호는 단순한 세월호가 아니었다. 장헌권 목사에게 세월호는 적폐·부패 세력의 산물이었다.

앞당겨진 대선을 놓고 모두가 적폐 세력 청산을 외친다. 현장에서 오래 뛰어 온 장헌권 목사에게 적폐 세력을 판단하는 기준은 뭘까.

"저는 중심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기준을 세우려면 중심이 있어야 하는데, 저에게는 그 기준이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어느 쪽에 서 계셨는가 보면 예수님은 항상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들고 아파하는 민중 곁에 계셨어요. 한국교회도 예수님 서 계신 곳을 찾으면 되는데 현실은 아니죠. 예수님이 싫어한 불의한 권력, 종교 기득권자를 좋아하죠. 한국교회는 기준이 없어요. 세상 권력, 가진 자들을 기준으로 삼고 있죠.

고난당하고 힘없는 약자들, 세월호 가족, 미수습자 가족들처럼 약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교회는 대형 교회가 아니었어요, 다 작은 교회였지. 교회가 예수님의 교회인가 담임목사의 교회인가는 이것만으로도 확연하게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예수님을 기준으로 삼고 이 기준에 맞는 신앙, 삶의 태도를 견지하는 게 가장 핵심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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