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 새라 코클리 지음 / 정다운 옮김 / 비아 펴냄 / 128쪽 / 9,000원

저자인 새라 코클리 교수는 십자가에서 발생한 하나님 아들 예수와 인간 사이의 극적인 사랑과 배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여정은 십자가가 우리에게 보내는 초대에 저항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에 깊이 애통할 때, 마주하기 싫은 것과 마주하는 고통을 감수할 때만 시작될 수 있습니다."(15쪽)

2,000년 전, 한 유대 청년이 달려 죽은 십자가가 21세기를 사는 우리를 초대한다. 그는 그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향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소리쳤다. 그 하나님은 창조부터 지속해 온 세상과 인간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완성하려고 스스로 인간이 된 아들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아 역설적인 구속을 이루었다. 이러한 사랑과 고통이 공존하는 바로 그의 십자가가 지금 우리를 부르고 있다. 이미 우리는 인생 경험을 통해 환희와 비통의 감정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안다. 그러기에 그 십자가의 초대가 무조건 반갑고 편하지는 않다.

그렇게 큰 사랑과 죄 사함을 앞에 두고 나는 내놓을 게 없기 때문이다. 그 십자가는 내 육체, 인격, 삶에 직접 개입하는데 나는 십자가로 가지고 갈 값어치가 없어 부담을 느끼기도 한다. 예수를 사랑한다는 고백은 너무 부족한 표현이고 이보다 무거운 가치를 지닌 진중한 선포를 해야 할 것 같다. 그 정도는 해야 약간의 정당성이라도 생길 것이라는 세상 원칙을 십자가에도 적용한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아들이 열어 준 이 관계를 내 의로 통제하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이신 예수는 꾸준히 묻는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

주먹을 꽉 쥐면서 마치 인생을 다 움켜쥔 줄 착각하고, 예수를 쉽사리 은 30냥에 넘겨주며 산다. 그가 들려주는 하나님나라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서도 내 삶을 살아 내려고 전전긍긍한다. 예수를 배신한 후 그 괴로움으로 하루를 보내고 비극의 절망으로 점철된 밤을 맞는 유다가 내 자아다. 그런데 뒤로 몇 걸음 물러나 고개를 드니 내가 넘겨준 예수가, 꾸준히 사랑을 열망하며 나를 부른다. 배신조차 사랑의 통로로밖에 만들 줄 모르는 무능력한 예수가 무릎을 꿇고 더러운 내 발을 씻기며 숨겨 놓은 마음속에 생수를 붓는다. 나와 빵과 포도주를 나누고 그의 사랑을 지속적으로 기억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쳐 준다.

경기도 한 공업 도시의 공단 내에 있는 교회에서 외국인 근로자들과 예배했다. 돈 벌려고 한국에 온 남아프리카공화국·나이지리아·우간다 등 아프리카 출신 사람들이 주일마다 모여 그들 특유의 영성으로 찬양하고 있었다. 그들은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춤추며 하나님을 경배했다. 그리고 예배 중 여러 혼란스러운 상황을 겪고 있는 한국 사람들과 사회를 돌보아 달라고 기도했다. 타인으로 여겼던 이 땅의 나그네들이 우리의 평안을 간구하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경험하려면 나를 벗어나 십자가로 가야 한다. 나를 부인하는 것은 두렵고 불안한 일이지만 오히려 그곳은 정말로 내가 나다워지는 장소다. 정치적 평등 구조로 공의가 실현되는 곳이 아닌, 나그네가 주인을 염려하고, 여성이 남성 중심 경제구조를 탈피하고, 흠 없는 인격이 죄인의 발을 씻기는 곳이다.

이 독특한 예배 중 다른 언어들이 움직이는 가운데, 우리 인생의 주님은 하나님 한 분뿐이며 우리 생명은 그리스도와 다시 살았고, 지금도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충분히 나누었다. 예배 후 모두가 모여 먹는 아프리칸 닭고기 스튜와 흰쌀밥의 식사, 사이다 한 잔은 예수의 사랑을 기억하는 성만찬이었다. 무장해제된 사람처럼 함께 움직이고 춤추며 예수의 살과 피를 나누는 사건 속에서 "주를 사랑한다던 베드로 고백처럼, 난 예수를 사랑한다오"라는 찬양 가사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고백으로 되뇌었다.

지금, 예수는 십자가로 넘겨져 우리 시야에서 사라졌다. 괴로운 유다의 밤중이다. 나의 깨어진 심령이 부대끼는 밤. 사회정의와 법치 질서를 갈망하지만 다시 연약한 인간을 통해 대안을 찾아야 하는 이 나라의 밤. 욕심이 부른 전쟁 속에서 부푼 꽃봉오리 같은 어린 생명들이 피 흘려야만 하는 이 지구의 밤. 고향의 환대를 떠나 타향의 적대를 견디며 돈을 벌어야 먹고 사는 인류의 이 밤.

그리하여 십자가로 넘겨진 그가 가져다줄 부활의 신비, 그 놀라운 사랑의 가능성을 기다리는 밤이다.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이민희 / <크리스찬북뉴스> 우대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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