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대부분의 교회들은 새로운 시대의 사역을 위해 지난 7,80년대에 지은 교회당 건물들을 헐고 새로 건축하거나 대대적인 개조를 시작하고 있다. 어쩌면 제2의 교회건축의 시기가 도래한 것 같기도 하다. 이와 함께 최근, 미래사회에서의 교회의 새로운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교회당 건물이 매우 중요하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 이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당을 잘 지어야 한다는 생각만큼 교회건축의 추진은 순조롭지 못하며 그 결과 또한 성공적이지 못한 것이 오늘날 우리 교회들의 현실이다.


과거의 잘못된 인습으로부터 벗어나야

이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과거의 건축에 대한 잘못된 경험과 인습으로부터 비롯된다. 우리의 근대건축은 한국전쟁이라는 폐허로부터 형성했기 때문에 단 시간 내에 많은 건물들을 가장 싼값에 지어야 했으며, 더욱이 국가경제가 성장하면서 건축은 재산증식의 대표적인 수단이 되었고 따라서 내실보다는 겉치장에 힘썼다.

우리의 교회들도 교회당 건축이 교회 사역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그동안 교회의 부흥에 전력을 기울였고 따라서, 급속도로 늘어나는 성도들을 수용할 예배당이 필요했으나 교회의 재정능력이 이를 따르지 못해 예배공간을 양적으로 확보하기에 급급했다. 이런 이유로 기능적으로나 구조적으로는 물론 미적으로도 훌륭한 교회당 건축이 만들어 질 수 없었다.

게다가 그동안 우리사회의 건축에 대한 인식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사회적으로 건설은 상당한 이권의 대상이었다. 건설공사를 수주하기 위해 뒷거래가 오갔고, 건설현장에서는 의례히 발주 관계자나 감독들 심지어는 시공회사 책임자들도 소위 사례를 받고서 부실 공사를 눈감아 주거나 공사 하청을 주는 일이 상례처럼 되어버렸다. 언제부터인가 건축이 대형화 되면서 건축설계 용역을 수주하는 일까지도 소위 코미션을 주고받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되었다. 이러니 건축관계자들은 모두가 좋은 건물을 만들어 내는 일 보다는 자신들의 이속을 차리는데 급급했다. 따라서, 부실공사로 인한 하자발생은 물론 건물의 붕괴사고까지 심심찮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우리사회의 이러한 부조리한 현상에 익숙해 있는 교인들은 교회가 건축을 추진해 가는 과정에서도 의례 그런 일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심지어는 스스로 교회당 건축에서 자기 이익을 챙기려하는 일까지도 적지 않게 나타난다. 따라서, 교회당 건축을 책임 맡은 목회자나 건축위원장을 포함한 건축위원들은 공정성과 투명성이라는 과제에 묶여 오히려 소신있게 일을 추진해가지 못하는 상황에 빠져버린다.

이런 폐단을 막고 교회건축의 합당한 추진 방법을 찾기 위해 교회의 건축책임자들은 이제까지의 우리나라의 건축에 관한 관례를 찾고, 주변의 여러 건축 경험자들에게서 자문을 받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건축에 관해 우리들이 가진 과거의 경험들과 관행들이 대부분 올바르지 못했기 때문에 바른 길을 찾는데 오히려 장애가 되고 있다. 더욱이 이러한 잘못된 경험들은 비단 일반인들만이 아니라 건축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보편적으로 나타나는데서 문제의 심각성은 더하다.


교회건축의 바른 이해가 선행해야

우리나라 교회건축문제의 다른 하나는 건축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기인한다. 대부분의 교회는 교회당 설계를 시작하기 전에 수많은 교회건축 작품들의 실례들을 통해 자신들의 교회의 모습을 그려본다. 사실 이러한 일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작품들은 교회의 건축에 대한 안목을 높이는데 큰 도움이 된다. 문제는 교회가 자신의 교회당 건물이 여러 실례들 중에서 마음에 들었던 샘플처럼 건축되기를 바라고, 건축설계자는 단지 교회의 뜻을 설계도면으로 그려주면 된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설계로는 좋은 교회건축을 만들어낼 수 없다.

교회건축이란 그 교회의 기능은 물론, 교회가 건물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와 나타내고자 하는 이미지, 기타 그 교회의 특별한 속성을 담아서 교회사역을 위한 좋은 환경과 훌륭한 도구가 되어야 하고, 주변환경과 잘 조화하며, 또 독창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 교회만을 위해 유일한 그리고 아름다운 건축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건축가가 이러한 좋은 건축을 만들어 내겠다는 의지를 버린다면, 그는 이미 건축가가 아니며 스스로 설계제도사 또는 건축허가 대리인이기를 자처한 것이다.

교회의 갱신이 교회의 본질에 대한 바른 이해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하듯이, 잘못되어온 교회건축에 대한 개혁도 교회건축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부터 출발해야 마땅하다. 교회건축이 과거의 관행을 좇고, 좋다는 교회당의 겉모양을 흉내내는 일은 마치 교회가 개혁을 부르짖으며 과거의 교회운영방법을 답습하고, 다양한 새로운 프로그램을 도입하면서 교회의 본질에 대한 재점검을 외면하는 일과 다를 바 없다.
  

신학교에 교회건축강좌를 개설하자

한국 교회건축의 근본적인 혁신은 교회의 책임자인 목회자들의 건축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일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 가장 중요한 일은 장래 목회자가 될 신학생들에게 건축을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일이다.

목회는 건축이라는 환경 안에서 이루어지며, 건축은 보다 효과적인 목회를 위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따라서 한 교회를 담임한 목회자는 그가 목회하고 있는 교회당 건물을 관리하고 보수하고 개조하여 자신의 목회에 합당한 도구로, 또는 환경으로 조정해 가야 할 것이다. 더욱이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그들의 목회활동의 생애 동안 한 두번은 교회건축이라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때 건축에 대한 바른 이해는 그들의 중요한 도구를 올바르게 만들어 갈 수 있는 기초가 될 것이다. 따라서 신학교에서의 교회건축 교육은 목회자들을 위한 실천신학교육의 한 부분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신학교에 교회건축강좌를 개설하는 것은 건축과 신학의 만남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지금까지 우리의 교회건축은 교회의 실용적 요구와 설계자들의 건축적 능력에 의존해 왔을 뿐, 아직은 교회건축에 관한 신학적 논의를 할 정도로 성숙한 상태는 아니다. 따라서 올바른 교회건축을 하기 위해서는 신학자들의 관심과 참여가 필수적이다.  

서양에서는 이미 20세기 초의 전례운동과 에큐메니칼 운동, 평신도신학 등 새로운 기독교운동들과 당시의 근대건축운동들이 만나 새로운 교회건축을 탄생시켰다. 즉, 로마 가톨릭교회는 1940년대에 교회건축설계를 위한 신학적 지침을 만들었고, 또한 1960년대 초부터는 유럽의 신학자와 목회자 그리고 건축가들이 모여 여러 차례 교회건축에 관한 회의를 통해 교회건축을 어떻게 해야 할 지를 깊이 논의함으로써 이 후 10년간 교회건축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이와 함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신자들의 능동적인 교회 참여를 유도하고 건축가들의 독창성을 존중하며 지역의 여건에 따를 것을 강조하는 교회건축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미국에서도 여러 교단들이 자문 건축가들을 두고 교단의 교회건축의 지침을 만들거나 산하 교회들의 교회당 건축의 방향을 자문해 왔으며, 한국의 가톨릭대학에서는 오래전부터 교회건축이 신학생들을 위한 교양강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때늦은 감은 있으나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교회의 갱신운동과 함께 수많은 교회들이 새롭게 교회당을 건축해야 하는 시점에서 신학생들에 대한 교회건축교육과 교회건축에 대한 신학적 논의가 시급히 요청되며, 이러한 교육과 논의들을 통해 새로운 교회건축의 방향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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