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관(41), 그의 이름이 발견되는 언저리에는 어김없이 우리의 힘겨운 역사와 사회로부터 밀려난 이들의 얼굴이 함께 있다. 정신대 할머니, 노숙자, 가정폭력 피해여성, 결식아동, 달동네 사람들…. 그의 노래도 여전히 힘겨운 삶의 공간에서 일어서려는 뜨거운 눈물로 흥건하다. 위로이고 희망이다.

누구보다도 정신대 할머니들은 그에게 놓쳐버린 우리 역사의 한 장을 주목하게 만들었다. 할머니들의 증언을 들으며, 역사책에서 죽어 있던 사실들이 일어서는 것을 보았다. 일제 식민지가 남긴 아픔이 반세기 저편에서 여전히 꿈틀대며 일어서 외치는 것을 보았다. 잊을 수 없다, 김학순 할머니의 그 꾸짖음을.

"왜 배웠다는 사람들이 안 도와주는 거야."

날 선 칼 같았다. 거기서 '대지의 눈물'을 비로소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이 땅 어머니들의 눈물이었고, 흙의 눈물이었고,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을 눈물이었다. 어떤 배상으로도 그들의 잃어버린 50년의 세월을 찾을 수 없듯 또 무엇으로도 닦을 수 없는 눈물이었다. 하여 그는 무작정 불러야 했다. 정신대 할머니들을 대신해 부르짖는 외침이었다.

"바람이 불어 옛날은 갔는데도/ 기억 속에 보이는 그 분홍 저고리/ 눈물은 노래를 막아 부르지 못하여도/ 하늘의 그 손길 여윈 손 잡아/ 바구니 옆에 끼고 나물 캐다/ 그만 시간을 잃어버리셨죠/ 다시 찾아 드릴게요/ 어머니 열네 살 소녀 그 어린 꿈들/ 이 땅에 흐르는 대지의 눈물이여/ 다시는 그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 눈물은 노래를 막아 부리지 못하여도/ 하늘의 그 손길 야윈 손 잡아"

할머니들의 약값 쌀값이라도 모을 양으로 시작한 것이 100교회 순회공연이었다. 그에게는 할머니들의 눈물에 대해 거룩한 참여가 이루어지는 모든 곳이 교회였다. 우체국에서도, 은행에서도, 대학에서도 그는 끝나지 않은 역사를 노래했다.

정신대 할머니로 인해 역사에 눈떠

그의 노래를 들으며 많은 이들이 반성하고 눈물 흘렸다. 잊어버리고 살아온 그 세월에 용서를 구했다. 대학생들은 기숙사비를 털었고, 미국까지 따라와 자신의 유명세를 보태준 목사도 있었다. 일본 우익의 갖은 반대를 뚫고 와세다 대학에서도 그는 증언했다. 일본 여성들이 공연장을 잡아 공연을 청하기도 했고, 그들은 5년간 모은 동전 저금통을 깨 3천만원을 건네주었다.

일제의 징용에 끌려갔던 이들이 세운 교회에서는 공연이 끝난 뒤 어느 할머니가 그를 꼭 껴안고 한참을 흐느끼며 놓지 못하는 광경도 보았다. 그럴 때면 또 다짐했다. 내 노래가 위안이 되는 곳이면 어디든 가겠다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동경국제평화재판의 배당금을 채웠다. 밀리언셀러 음반을 내는 뜨는 아이들이 한번 무대에 서면 될 돈이지만 역사는 결코 그런 돈을 원치 않은 모양이었다.
올해 초 정신대 문제를 다룬 동경국제평화재판에서는 초청 가수로 참여했다. 그의 자리가 이미 정신대 할머니의 중심이었음을 세상이 인정했기 때문이었을까.

할머니들의 증언에 이어 그는 목놓아 '대지의 눈물'을 노래했다. 그리고 세계에서 참여한 가수들의 코러스를 받으며 그는 '우리 승리하리라'를 노래했다. 무려 30분을 그렇게 노래했고, 이 광경은 세계 언론을 타고 소개되었다.

그가 처음, 아주 작게 시작한 연대의 끈은 이제 전세계에서 모인 평화주의자들에게로 넓혀졌으며, 결국 법정은 일본을 상대로 유죄라고 선고했다.

거기서 그는 작고 낮고 느린 운동이 결국 이루어내는 거대한 변혁의 힘을 똑똑히 목격했다. 나무가 긴 세월을 가만히 멈추어 있는 듯하지만 풍상과 눈비를 견디어 비로소 그늘을 만들 듯 작게 낮게 느리게 움직이는 일상이 마침내 도달하는 거대한 희망의 바다를 보았다.

실제로 일상은 그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희망 찾기의 단초였다. "분수에서는 물이 나오고, 혈관에서는 피가 나온다"는 루쉰[魯迅(노신)]의 노래를 언제나 되뇌는 까닭 역시 일상에 대한 그의 주목을 보여준다.

"흙과 같이 하는 일은 변화를 느끼기가 쉽지 않다. 한나절 일하다가 허리 펴보면 일해 놓은 것이 어디 있는지 드러나지 않는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돌밭을 가꿀 때도 그랬고 마당을 고를 때도 그랬다. 마치 자연이 하는 일처럼 나중에야 '아!' 하고 알게 된다. 그러나 그런 조그만 변화들이 사람이 저 너머 세상의 신비를 만나러 갈 때 건널 수 있는 다리를 놓게 되는 것이다. 개미가 땅을 기어 겨울 양식을 구하듯 새가 오랜 시간 둥지를 치듯 쇠똥구리가 제집을 고집처럼 뭉쳐나가듯 보이지 않는 땀들이 인류의 땅을 경작해 나가는 것이다."

하여 그의 노래는 일상의 노래가 된다. '아버지의 새벽 같고, 숨결 같고, 할머니의 지팡이 같고, 내 일기 같고, 옛 동산 같고, 소년의 나이 같은' 것이다. 그것이 양악에 밀려난 국악이 그의 노래를 뒷받침할 수밖에 없고, 일상을 구성하는 나무와 풀과 침묵과 생명이 노랫말이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이미 일상의 힘을 포기해버린 세상은 이런 그의 노래를 '그들만의 메이저리그'로 불러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홍순관이 좀더 대중적이고 유명했더라면 정신대 할머니의 외침도 그만큼 컸으리라 말한다. 그러나 아무도 할머니들의 눈물을 노래하려고 하지 않았던 메이저의 욕망을 탓하지 못한다. 굳이 스스로 '빅3'가 되려 하는 이들에게는 이미 일상이란 무의미한데도 말이다.

"나는 언더그라운드가 좋다"

그는 지금 또 하나의 '나팔꽃'을 피우기 위해 노래한다. '나팔꽃'은 1999년 봄 그를 포함해 김용택 정호승 도종환 안도현 유종화 백창우 김원중 배경희 김현성 류형선 이지상 안치환 이수진 등 시인과 가수 14명이 모여 만든 모임이다. '나팔꽃'은 시를 노래하는 모임이다. 노래로 세상을 바로 보고 삶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이 작은 연대 또한 거대한 희망의 바다를 향한다. 이 땅의 노래문화를 뒤엎는 꿈이다. 그것은 자기의 숨과 노래가 한 몸이란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다. 천편일률의 노래문화에 대한 작고 낮고 느린 저항인 것이다. 지금까지 15회 공연을 하는 동안 매회 200석 가까운 자리를 꽉 메운 청중들을 보며 그는 도리어 놀란다.

새로운 꿈이 하나 생겼다. 시의 황무지인 일본에 시노래 운동을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북한의 시인과도 만나 함께 시노래를 부르는 꿈, 그들만의 통일의 꿈도 키워갈 생각이다.

"나는 언더(그라운드)다. 언더는 대중성을 바라기보다 예술성과 작품성을 기본 정서로 갖는다. 방송에 출연하지 않는 게 언더가 아니라 맞지 않으면 다른 어떤 이유로도 타협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건 내가 억지로 하려는 게 아니다. 내 마음이 그리로 기울어지기 때문이다. 나도 모른다. 이게 나라는 사람이다. 사람이 없는 노래는 싫다. 그러니 수십 억을 들여 노래 한 곡을 띄우려는 메이저리그가 내겐 결코 메이저로 다가올 리 없다. 내 노래는 그저 하루를 천년으로 사는 님을 따라 부르는 노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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