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 새라 코클리 지음 / 정다운 옮김 / 비아 펴냄 / 128쪽 / 9,000원

마침내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대로 하기로 했다. 폭동과 살인으로 감옥에 갇힌 자를 내어 주고, 사랑과 화해를 말했던 예수를 넘겨주기로 한 것이다. 몇 차례 짧은 심문을 거치고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 예수는 통나무 두 개를 교차해 만든 사형 틀을 스스로 지고 언덕 넘어 형장으로 걸어갔다. 매질과 모욕으로 심신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예수는 자기 사형 틀을 구레네에서 온 시몬이란 자에게 대신 지도록 했다. 여기, 다른 복음서 저자들은 기록하지 않은 누가의 독특한 기록이 있다.

주석적 의미를 잠시 뒤로 하고, 오로지 몸의 감각으로 읽어 보면 어떤 극적 장면이 그려진다.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예수와 그 뒤를 따르는 여자들이 있다. 여자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한다. 예수가 뒤를 돌아보고 말한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두고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두고 울어라."(눅 23:28) 죽음을 목전에 둔 그리고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남자가 여자들을 바라보며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는 말은 어느 비극의 마지막 장면을 닮았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주의 제자들, 다시 말해 남자들이 묘사되지 않았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왜 여자들만 가슴을 치며 통곡했을까.

이 단락 마지막에 이르러 예수는 말한다. "나무가 푸른 계절에도 이렇게 하거든, 하물며 나무가 마른 계절에야 무슨 일이 벌어지겠느냐?" 복음서에서 보기 드문 표현이다. '푸른'을 뜻하는 형용사 '휴그로스'ὑγρός는 신약성서에서 단 한 번 쓰인 말이다. 수많은 문필가가 묘사한 골고다언덕의 장면들과 여러 매체가 저마다의 목적으로 만들어 낸 십자가 처형의 이미지들은 우리 기억에 여러 형태로 저장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날의 기온, 햇살, 바람의 숨결은 알지 못한다. 누가의 소중한 기록 덕에 우리는 이 핏빛 사건이 푸른 나무의 계절에 일어났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주의 제자라 부름받은 남자들은 종적을 감췄다. 예수의 뒤를 따른 이들은 세상의 무시와 자주 업신여김을 당하던 여자들이다. 십자가라는 비극적 사건과 어울리지 않는 푸른 나무의 계절에 예수는 못 박혔다. 십자가 사건은 이렇게 무언가 어긋난 시나리오, 뒤엉킨 세계, 꼬여 버린 사람들 속에 놓여 있다. 새라 코클리의 <십자가: 사랑과 배신이 빚어낸 드라마>는 하나의 이미지로 수렴되지 않는 십자가라는 이야기로 우리를 초대한다.

십자가라는 드라마,
모든 익숙한 것을
뒤집는 이야기: 초대

코클리에게 십자가 사건을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는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사랑과 정의를 포함해 모든 앎을 뒤집는 데서 시작한다. 예수의 수난은 어느 웅장한 예배당 한 면을 장식한 스테인드글라스의 마지막 몇 장면도 아니고, 세례 문답 속 기계적인 이야기도, 또는 구원을 얻기 위한 인과관계의 틀도 아니다. 그녀가 말하는 예수의 수난이란 "너무나 섬세하고 변혁적인 하느님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 우리가 아는 모든 정의를 넘어서고 전복하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 십자가 사건을 안다는 것은 단지 지식의 차원이 아닌, 온몸의 감각을 바로 세워 피부로 느끼는 이야기이다. 코클리는 이러한 이유로 수난 이야기는 우리 삶을 괴롭고 힘들게 만든다고 말한다. 예수의 수난은 삶 전체를 건 여정이며, 이 여정 가운데 우리는 우리의 나약하고 비겁한 모습, 숨기고 싶은 부끄러움과 뒤틀린 자아를 마주해야 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1장은 중요하다. 코클리는 지금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가장 큰 오해, 십자가 사건을 머나먼 옛날, 나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가 죽고 부활했다는 거리 두기를 그만두고 그 이야기 자체에 들어오라는 담대한 초대를 던지기 때문이다.

행실 나쁜 여자와 배신자
: 선물 그리고 배신

코클리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음성으로 십자가 사건에 우리를 초대했다. 그녀는 2장 '선물' 그리고 3장 '배신'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수난 사건을 묵상할 때 쉽게 간과되는 두 사람을 불러낸다. 먼저 행실 나쁜 여자가 초대받지 않은 자리에 간다. 그곳에서 예수와 제자들,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공관복음서라 일컫는 세 권의 복음서 모두 그녀를 다정하게 다루지 않는다. 그녀는 이름 없고(요한복음서에 이르러서야 마리아라는 이름을 얻는다), 죄인이라 손가락질당하는 처지였다. 그런데 코클리는 이 불편한 장면을 예수 수난 이야기의 첫 페이지로 소개한다. 여인이 벌인 행위는 오랜 수수께끼다. 코클리는 그러나 여인의 사랑 그 자체에 집중한다. 사랑은 교환을 넘어서는 선물이고, 선물은 거래라는 가치 개념을 깨뜨린다. 여인은 가치라는 개념을 무너뜨려 오히려 가장 위대한 가치를 드러낸다. 코클리는 초대란 결코 공짜가 아님을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앞에 무엇을 깨뜨릴 것인가.

옥합에서 흘러나온 향기는 이내 배신이란 악취로 바뀐다. 십자가 사건의 두 번째 주인공은 가룟 유다다. 흥미롭게도 가룟 유다는 베드로와 바울만큼이나 유명하다. 배신의 아이콘, 비겁자, 치욕스런 죽음, 혹은 악마와 같은 자 유다가 수난의 두 번째 열쇠라는 점은 또 다른 의미의 역설이다. 복음서의 유다는 누구보다 성실했고 열정적이었다. 셈에 빨랐던 그는 중구난방으로 모인 제자들 일행의 살림을 담당했을 것이다. 그래서 유다는 주고받음이라는 계산적 감각에 탁월했다. 유다는 자신의 삶을 예수에게 주었으니,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예수가 주는 것은 유다가 기대했던 것이 아니었다. 셈이 틀어진 유다는 다른 곳에 예수를 넘겼고, 의도치 않은 것을 받고야 말았다. 이 비극의 주고받음이 십자가 사건을 일으켰다. 가룟 유다에겐 참으로 비극적 역설이 된 셈이다. 사랑을 주고받아야 할 자리에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 유다는 과연 지금의 우리와 다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코클리의 3장 마지막 문단은 그래서 무겁고 괴롭다.

"우리는 유다와 함께 있습니다. 그는 균형을 유지하려는 자였으며, 그리스도를 수난에 '넘겨준' 자였습니다. 그는 절망에 빠진 비극적인 인간이었습니다. 그를 바라보십시오. 오늘은 유다의 밤입니다. 또한 우리의 밤이기도 합니다." (41쪽)

십자가를 맴도는 감정들
: 사랑, 두려움, 모욕, 그리고 용서

이제 코클리는 십자가를 마주하는 우리에게 몇 가지 감정들을 소개하며 본격적인 수난 이야기로 걸어 들어간다. 4장 '사랑'은 다소 낯설다. 코클리는 십자가 수난 이야기 속 사랑이란 으레 요한복음서 3장 16장의 그것과 닮았다고 믿는 우리의 익숙한 믿음에 제동을 건다. 사랑으로 가득한 미래로 간다는 것은 지금 우리 삶과 기억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어두운 지난날을 기억하는 것이다(48쪽). 코클리에 따르면 주님의 사랑을 입어 단번에 내 안에 있던 모든 부정적인 것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은 위선이다. 오히려 주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분노, 외로움, 절망을 인정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질서 안에서 모든 어둡고 불안한 것이 제자리를 잡게 한다. 수난 사건은 하느님의 총체적인 사랑이 드러나는 사건인 만큼이나 인간의 총체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저 신성한 사랑은 인간의 분노, 외로움, 절망을 비추고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낸다.

그렇기에 사랑을 넘으면 만나게 되는 건 '두려움'과 '모욕'이다. 삶의 의미를 잃었을 때 우리는 두려움을 느낀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 장면을 목도한 이들이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코클리는 이 감정을 간과하지 말라고 주문한다. 삶에 찾아오는 두려움 앞에 '왜'라는 질문을 회피하지 않을 때 우리는 두려움을 직관하고 희생과 속죄라는 더 깊은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코클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모욕'이라는 더욱 괴로운 감정을 불러낸다. 모욕은 수치감의 발로이며, 언제든 폭력을 번져 버릴 수 있는 뇌관이다. '예수가 인간이라면 이 모욕을 어떻게 이겨냈을까?'라는 질문은 오랜 신학적 주제이기도 하다. 이 난제를 풀기 위해 많은 신학자가 나름의 답을 구했으나, 성서는 예수가 고통과 괴로움을 느꼈듯 모욕 역시 느꼈을 것이라 말한다.

모욕을 감내한 하느님은 인간을 용서하기로 마음먹으셨다. 용서는 하느님을 속성을 드러내는 가장 위대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누가 인간의 죄악을 용서할 수 있는가. 그것은 오직 하느님 자신뿐이다. 그리고 예수는 하느님과 같이 숨이 끊어지던 그 순간 십자가 위에서 용서를 선포했다. 십자가상의 용서는 모든 이해타산을 넘어선다. 우리는 예수의 죽음, 장사한 지 사흘 됨, 돌무덤, 그리고 열린 돌무덤에 집중하는 나머지 십자가 위의 용서를 잊곤 한다. 코클리는 십자가 위의 용서가 없었다면, 성자 예수와 성부 하느님은 아무런 관계가 아니고, 나아가 우리의 해방도 없었을 것이라 말한다. 이제 십자가 사건은 절정으로 올라간다.

테텔레스타이
: 희생, 죽음, 그리고 부활

코클리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사악을 바친 이야기로 우리를 인도한다. 십자가의 절정에 다다를 즈음, 다시 첫 세상 이야기로 돌아가는 선회하는 이유는 '희생'의 의미를 되짚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코클리는 단지 손쉬운 대조의 방식으로 이사악의 희생 제물 사건을 십자가 사건과 등치시키거나, 아브라함의 순종이 예수의 순종을 잇는 문학적 모티브라는 편리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코클리의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은 이사악을 희생 제물로 바위 위에 '아케다(결박)'시킨 문제도,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아케다'된 이유도 우리의 이성과 이론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 있다(89쪽). 다시 말해 십자가의 절정 앞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수수께끼에 빠진다. 대체 왜 그 나를 위해 '희생'되어야만 하는가. 우리는 여기서 멈추거나 돌아갈 수 있고, 하느님께 나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문제의 해결은 이 시점에선 알 수 없다. 빛은 예수의 죽음 이후에 비취기 때문이다.

예수가 숨을 거두었다. 예수의 숨이 떨어지는 순간 모든 의미는 무의미로 바뀌었다. 그의 죽음을 지켜본 자들은 십자가를 향해 모든 것이 끝났다고 느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는 모든 것을 "이뤘다"고 말했다. 끝과 이룸은 완벽하게 다르다. 예수의 죽음은 끝이 아닌 이룸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모든 것이 끝났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끝은 고통이 되어 우리 마음에 생채기를 내고 더는 생활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든다. 코클리에게 따듯한 말을 기대했다면 접어 두어야 할 것이다. 그녀는 담담하게 말한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가 '영광'에 이르게 하기 위해, 우리를 담금질하기 위한 도구로 극심한 아픔, 상실, 무거운 짐, 질병을 사용하시는, 그와 같은 고통을 허락하시는 하느님, 그러한 하느님을 믿기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제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요한의 수난 이야기가 그리는 하느님은 바로 그러한 하느님입니다." (97쪽)

코클리는 십자가의 죽음이란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동시에 우리의 아픔과 두려움도 그렇게 쉽게 치유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의 무의미해 보이는 고통이 하느님을 만나 그의 품으로 "들어 올려지고," "넘겨"질 때, 우리는 평화와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된다.

드디어, 부활의 아침이 밝았다. 코클리는 마지막으로 질문한다. "당신은 주님을 뵙기를 고대합니까?"(103쪽) 본다는 것은 믿는다는 것보다 실체적인 차원이다. 만질 수 있는 몸이 없다면 우리는 볼 수 없다. 주님의 부활은 헛된 것이 아니란 뜻이다. 이제, 코클리는 세 가지 당부와 제안을 끝으로 자신의 글을 마무리 짓는다. 첫째,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뵙기 원한다면, 먼저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 세례/침례의 순간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물 밖으로 나올 때 우리의 욕망과 자아를 내려 둘 줄 알아야 한다. 둘째, 우리는 돌아봐야 한다. 돌아본다는 것은 사랑을 전제로 한다. 코클리의 토마스 아퀴나스 인용에서도 보듯, 여자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갈망했기에 예수를 따르고 돌아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를 보아야 한다. 상징적인 의미를 넘어 실제의 그리스도 봄을 의미한다. 지금도 사목 현장에서 그리스도를 보는 일은 여전하다고 코클리는 말한다. 그러나 이 봄은 반드시 우리의 자아가 죽고, 주께로 돌아서며 우리의 감각과 정신이 오로지 주를 보기 원할 때 일어난다.

초대장을 들고,

<십자가>는 긴 초대장과 같다. 이 초대장에는 그리스도의 수난 드라마로 들어가는 길과 약도,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 나와 있다. 저마다의 십자가를 등에 진 순례객의 마음을 갖고 이 여정에 동참하기를 제안한다. 마지막으로 누가의 복음서 23장 31절의 의미를 다시 짚어 본다.

"나무가 푸른 계절에도 사람들이 이렇게 하거든, 하물며 나무가 마른 계절에야 무슨 일이 벌어지겠느냐?" (눅 23:31)

나무가 푸른 계절에 사람들은 예수를 죽였다. 그러나 예수의 염려는 푸른 나무의 계절이 아닌 마른 나무의 계절에 가 있었다. 우리는 어쩌면 나무가 마른 계절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말라 버린 나무의 생기를 다시 돌릴 방법은 우리에게 없다. 다만, 코클리의 초대에 응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우리 삶을 비끄러맬 때 우린 다시 푸른 나무를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때에는 두려워 종적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뒤를 묵묵히 따를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해 본다.

김형욱 / 대학과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희망의 신비>(비아)를 옮겼다. 현재 미국에서 목회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