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임의 한 학생이 낡은 성서와 가위 하나를 들고서 가난한 사람들에 관한 성서 말씀을 모조리 오려내는 대장정에 돌입했다. (중략) 내 친구의 지독한 편집 작업이 끝나자 낡은 성서는 들기도 힘들 만큼 너덜너덜해졌다. 편집 작업의 최종 결과물은 구멍으로 가득한 성서였다. 나는 말씀을 전하는 곳마다 이 상처투성이 성서를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이 성서를 높이 쳐들고 미국의 청중에게 말했다. '형제자매 여러분, 구멍이 가득한 이 책이 우리 미국의 성서입니다.'" - 짐 월리스, <하나님의 정치> 13장 '가난한 사람들은 늘 너희와 함께 있으니' 中

왜 기본 소득인가

기본 소득 : 재산이나 소득의 많고 적음, 노동 여부나 노동 의사와 상관없이 개별적으로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균등하게 지급되는 소득

기본 소득이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비록 기본 소득을 주장하던 정치인은 대선후보가 되지 못했지만, 수도권의 지방자치단체에서 시작한 실험이 어떤 나비효과를 불러올지 주목됩니다.

기독교인이 왜 기본 소득 정책에 관심을 가져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짐 월리스의 구멍 난 성경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통해 '의와 공도(공평과 정의)'를 행하는 나라 모델을 만들고자 하신 하나님(창 18:19)은 공평과 정의가 실현되는 척도인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사회적 약자)를 지극히 아끼십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을 돕는 데 꼭 기본 소득이어야 하는가 의문이 듭니다. 가난한 이들의 삶이 회복되는 방식이 꼭 기본 소득일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공평과 정의' 정신에 기초하여 시대적 상황에 적합한 방식들을 찾아가면 됩니다. 다만 완전고용과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전제로 하는 복지국가 시스템만으로는 다가오는 4차 산업혁명과 저성장 시대를 감당하는 데 한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관점이 있습니다. 바야흐로 기본 소득과 사회보장의 시너지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구약에 비추어 본 기본 소득
레위기 희년신학

기본 소득의 가장 강력한 성서적 근거는 레위기 희년신학입니다.

구약성경은 모든 토지가 하나님 것이라고 천명하고 있습니다(레 25:12).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며 인간은 하나님의 땅을 빌려 살아가는 존재라고 명시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땅에서 '각자의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를 경작하며 평안히 살아가기를 기대하십니다(왕상 4:25; 미 4:4). 다만 '공평과 정의'라는 임대료를 지불하면서 말입니다(사 5:1-7).

김회권 교수는 구약의 땅 신학을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창세기, 레위기, 신명기 등이 주장하는 땅 신학은 네 가지 명제로 구성된다. 첫째, 모든 땅은 하나님의 소유다. 둘째, 모든 이스라엘 자유 농민은 땅의 소작인이며 그 소작인이 지주에게 바칠 소작료는 공평과 정의, 1/10조를 통한 사회부조, 하나님의 율법이 명하는 하나님 예배, 이웃 사랑의 실천이다. 셋째, 이스라엘 땅의 소출은 경작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와 레위인(무산자 성직자)에게까지 향유되어야 한다. 야웨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땅의 소출 향유권을 보편적으로 누리도록 규정한다. 레위기 25:23(땅은 하나님의 것!)과 신명기 15:11(어느 누구도 땅의 소출 향유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은 성경의 기본 소득 사상 대헌장이다." (전문 바로 가기)

구약은 모든 사람이 자기 노동을 투입하는 일자리이자 고단한 하루를 쉴 수 있는 삶의 안식처로서 자기 몫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자기 몫을 돌려주는 기본 소득은 구약의 땅 신학, 레위기 희년신학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기본 소득의 정신은 단순히 가난한 사람을 돕는 시혜 차원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각자 자기의 몫이 있다는 사실을 재천명합니다. 땅, 물, 바람, 주파수 등 인간이 만들지 않은 공유 자원과 수천 년 누적된 인류의 지식은 특정 개인이 사유화할 수 없습니다. 개인의 노력분은 개인에게 돌려주어야 하지만, 사회가 함께 만들어 낸 가치, 천부적 자원들은 인류 공동 재산이라고 기본 소득은 재천명하고 있습니다.

신약에 비추어 본 기본 소득

- 성령 충만한 교회의 급진적 율법 실천

신약은 구약의 율법을 창조적으로 계승합니다. 돌판에 새긴 율법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도록 만드는 데 한계를 드러냈지만, 신약시대에서는 모든 성도에게 성령이 임하여 하나님의 통치에 전폭적으로 순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은 예수의 승천 이후 성령 충만했던 초대교회가 구약의 율법을 급진적으로 실천했고, 그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행 4:34).

"구약성경의 성전 중심의 제사 법들과 의식 법들 대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창조적으로 폐기되었지만 구약성경의 십계명, 시민 법 특히 십일조 법, 토지 법 등 주요 공동체 규약 법은 신약의 성도들과 교회에 고스란히(한편으로는 더 급진적으로 재해석되어) 이월되었다. 산상수훈에서 십계명은 훨씬 더 급진적으로 수정 증보되어 신약의 성도와 교회로 이월되었고 희년법이나 십일조 부조법 등은 동시에 고스란히 이월되었다. 그래서 313년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이전까지 모든 교부들은 구약성경의 경제 율법을 특별히 강조하여 교회 공동체의 급진적 사랑, 이웃 봉사, 사회봉사 등을 실천했다. 구약성경의 토지법은 토지 절대 사유 금지와 토지 공유제를 말한다. 하나님의 선물인 가나안 땅이 모든 공동체의 구성원에게 속했듯이,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사도행전 2:43-47, 4:32-37에서 희년적 부조 사회를 이루었다.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은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자기 재산을 기꺼이 공여했고 희사했다. 산 위에 있는 동네 같은 교회가 착한 삶이라는 빛을 사방에 비추어 외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했다." (김회권, 전문 바로 가기)

- 포도원 주인 비유: 업적과 보상 분리, 필요와 보상 연계

마태복음 20장 '포도원 주인 비유'는 일견 우리의 정의 관념과 부합하지 않는 듯 보입니다.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는 것이 정의로운 것일진대 포도원 주인은 일찍 와서 종일 일한 사람에게나 1시간 일한 사람에게나 동일한 하루 품삯을 줍니다. 일찍 온 사람이나 늦게 온 사람 모두에게 하루치 품삯을 주는 포도원 주인의 넉넉함과 자비로움은 인간의 선의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영적인 원리를 드러내는 비유로 많이 소개됩니다.

영혼과 육체를 모두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원리는 영과 육의 구분 없는 구원·통치 원리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각 지파와 각 가족별로 토지를 나누어 주셨던 하나님이 신약시대에도 모든 사람이 하루 품삯을 얻기 원하신다는 것을, 포도원 주인의 비유는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강원돈 교수는 포도원 주인 비유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포도원 주인의 비유는 '업적에 따른 정확한 분배'를 뒤집어엎는 '하느님의 기이한 의'를 묘사한다. 하느님의 정의는 노동의 업적과 무관하게 삶의 필요에 따라 재화를 나누어 주는 행위를 통해 드러난다. 업적과 보상을 서로 분리하고, 보상과 삶의 필요를 직결시키는 것이 하느님의 정의이다. 그것이 기이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업적과 보상을 서로 결합하는 일이 마치 하늘이 정한 법인 양 생각하는 통념이 그만큼 강하게 자리를 잡은 탓이다. 이러한 통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노동할 기회가 전혀 없거나 노동 업적이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필요에 따른 분배에 참여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분개할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궁핍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강원돈, 전문 바로 가기)

이처럼 기본 소득에 대한 강력한 반대 논리 중 하나는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로 대표되는 '무노동 무임금/노동 연계 소득' 원칙입니다.

앞서 모두에게 하루 품삯을 주는 포도원 주인 비유는 '무노동 무임금/노동 연계 소득' 원칙을 무력화하지만, 포도원 주인의 비유에도 불구하고, 혹자는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는 말씀으로 노동 연계 소득만 옳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종말이 임박했다고 믿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종말론적 열정에 휩싸여 일상적인 활동이나 생업을 멀리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강원돈)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이러한 권면을 했습니다. 저성장과 양질의 일자리가 사라져 가는 시대 속에서 모두에게 하루 양식을 제공하려는 '기본 소득'에 이러한 비판은 바울 사도의 권면에 대한 '견강부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포도원의 모든 일꾼들에게 하루 품삯을 주는 포도원 주인의 비유는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과 닿아 있습니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일용할 양식'을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일용할 양식'은 "삶을 위한 양식과 필수품에 속하는 모든 것, 먹는 것, 마시는 것, 옷, 신발, 집, 정원, 경작지, 가축, 현금, 순수하고 선한 배우자, 순박한 아이들, 착한 고용인, 순수하고 신뢰할 수 있는 통치자, 선한 정부, 좋은 날씨, 평화, 건강, 교육, 명예, 좋은 친구, 신용 있는 이웃 등"(강원돈)이다.

모두에게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겠다는 '기본 소득' 정책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매주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의 응답이 아닐까요?

오래된 미래,
각자의 포도나무 소유한
자유 농민들의 연합 사회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하는 기본 소득은 사람들이 생계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나 자신의 재능과 의미를 찾아 새로운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생계에 대한 막막함과 공포에서 벗어나면 남을 밟아서라도 내가 살려 하는 악다구니는 완화될 것입니다.

'유항산자유항심(有恒産者有恒心)'이라는 맹자의 격언처럼 먹고살 만한 재산이 있어야 도덕과 윤리가 나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먼저 각자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제공해 주시면서 공평과 정의를 요청하셨습니다.

기본 소득은 오늘날 각자에게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되어 줄 수 있습니다. 각자가 각자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한숨을 돌릴 수 있을 때, 자연도 이웃도 생각하지 않고 무한히 이윤을 추구하며 절벽으로 내달리는 폭주 기관차 같은 현대자본주의를 돌아볼 여유도 생길 것입니다.

무한 성장, 무한 소비에 기초한 현대자본주의 시스템은 지구 자원 및 환경의 복원력을 위협하고, 불평등을 심화하며 자신의 유효기간을 급속히 갉아먹고 있습니다. 물질 자원을 무한히 소비하는 방식의 성장이 아닌 지성과 영성을 무한히 고취하는 방식의 경제체제로의 전환이 시급한 시점입니다. 부디 새로운 사회에 대한 해답을 품은 성경을 들고 있는 교회가 시대와 함께 호흡하며 새 시대를 열어 가는 전위가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성영 / 희년함께 학술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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