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정의평화기독교대선행동이 보내온 김근주 교수의 설교문(원제: 평화를 위한 기도 / 본문: 렘 29:4-7)입니다. <뉴스앤조이>는 민주 회복, 경제 평등, 평화통일, 생태 환경과 사순절의 의미, 대선에서의 기독인 역할 등을 담은 대선행동의 사순절 공동 설교를 2월 27일부터 4월 3일까지 6주간 연재합니다. - 편집자 주

예레미야 29장은 주전 597년 바벨론에 의해 포로로 끌려간 이들에게 보낸 예레미야의 편지를 담고 있다. 당시에 포로로 끌려갔던 이들 가운데 있던 거짓 선지자들이 포로 생활이 곧 끝날 것이라고 선동하였던 것에 비해, 예레미야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만나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고 권면한다(렘 29:5-6). 포로 생활이 금방 끝나리라 헛된 기대를 품고 살 것이 아니라, 오래오래 살 것처럼 정착하여 살아갈 것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정착하여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상징으로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권한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하게 한 그 성읍의 평안('샬롬')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렘 29:7)

이스라엘이 바벨론 땅에 오래 머물 것이기에 그들은 그 땅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어느 한곳에 오래 머물게 된다는 것은 그 땅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 땅을 위한 기도를 위 구절에서는 "성읍의 평안"을 구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어떤 곳에서 오래 머물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머무는 그곳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성읍이 평안하지 않으면 거기에 살고 있는 유다 사람들 역시 평안할 수 없다. 이 구절은 성읍의 평안이 없는 개인의 평안이 가능할 수 없음을 명확하게 제시한다. 다시 말해 평안할 수 없는 기울고 망해 가는 사회에서 나 홀로 평안하고 감사한 삶을 살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바울의 다음과 같은 권면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딤전 2:1-2)

그렇다면 한 성읍의 평화를 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바벨론 성읍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고 했지만, 예레미야가 전한 말씀에는 바벨론에 대한 멸망 선포도 있다(렘 50-51장). 그리고 그러한 멸망 선포의 근거는 교만으로 대표되는 바벨론의 죄악이었다. 그렇다면 평안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 바벨론에 그저 평화가 찾아오기를 구하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바벨론이 교만하다면, 평화는커녕 패망과 재앙이 닥칠 것이고 유대 사람들의 평화 역시 불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연관해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중보 기도하지 말라고 이르신 부분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즉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어 구하지 말라 내게 간구하지 말라 내가 네게서 듣지 아니하리라." (렘 7:16)

위 구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보 기도는 그 대상에게 평화와 행복을 비는 기도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그 백성을 위해 중보 기도하지 말라 명하신다. 그 까닭은 그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행하는 일들이 심히 악하기 때문이었다(렘 7:16-20). 하나님께서 참으로 원하시는 것은 순종이었다(렘 7:23-26). 그리고 그러한 순종의 내용으로 예레미야가 백성들에게 힘써 외친 것은 다음과 같은 선포였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살게 하리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 (렘 7:3-7)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러한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제사를 일삼고 심지어 이방 풍습까지 들여와서 그를 행하였으니, 아무리 평화를 빈다 하여도 그들에게 평화는 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평화를 빈다는 것은 그저 주문 같이 기도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평화를 구하였으나 그 길과 행위가 바르지 않았기에 쫓겨나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살아가는 곳의 평화를 빈다는 것은 그곳 가운데 평화에 합당한 일이 이루어지도록 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평화에 합당한 일로 위에 인용한 본문은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는 것'의 핵심적인 내용은 '이웃들 사이에 행하는 정의'이다. 예레미야 22:3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에스겔 45:9-10에서는 통치자들을 향해 정의를 행할 것을 명령한다. 그렇다면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 가난한 자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않는 삶은 이스라엘의 왕들이 준행해야 하는 핵심적인 사항이면서 모든 이스라엘이 그들의 일상 가운데 실천해야 하는 사항임을 알 수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처음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을 명령하신 것이 아브라함이라는 점에서도 두드러진다(창 18:19).

통치자들을 향한 명령과 아브라함을 향한 명령이 동일하다는 것은, 아브라함과 그의 뒤를 따르는 이스라엘의 삶이 세상에서 왕과 같은 삶으로의 부르심임을 발견하게 한다. 그리고 이 점은 창조 때부터 온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점에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아담과 하와 이래, 사람은 세상에 하나님을 본받은 왕적 통치를 감당할 자들이며, 아브라함의 부르심은 이 점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다윗이 정의와 공의로 나라를 다스렸다는 언급(삼하 8:15)은 그가 하나님이 지으시고 부르신 사람의 본보기와 같은 존재임을 보여 준다. 구약의 많은 구절이 하나님이야말로 온 세상을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시는 분이라고 증언한다(시 33:5; 89:14; 97:2; 사 5:16; 33:5)는 점은, 사람이 행하는 정의와 공의가 실상 하나님의 통치를 본받는 삶임을 보여 준다. 참으로 사람은 하나님을 본받는 왕인 것이다. 왕의 다스림, 왕의 통치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백성의 행함이 필연적으로 통치와 연관된 정치적 차원을 지닐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시편 구절은 단지 현실의 왕만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권면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하리니." (시 72:2)

정의와 공의로 가난한 이들을 재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72편은 계속해서 설명하고 있다.

"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꺽으리로다." (시 72:4)

"그는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원하리니 그들의 피가 그의 눈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로다." (시 72:12-14)

참고: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사 1:16-17)

이상의 본문들은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이 재판이라는 구약의 제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세상 다스리심과 연관하여 하나님을 왕이시면서 재판관이라 고백하는 구절에서 보듯(사 33:22), 재판제도는 이 땅 가운데서 하나님의 통치를 본받는 행동의 핵심적인 측면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재판으로 상징되는 사회의 구조와 틀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다.

정의와 공의로 행한다는 것은 구약에서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틀인 재판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부당한 처우를 받지 않게 하는 것이다. 재판관 혹은 왕은 그렇게 약한 이들을 보호하고 지켜야 한다. 권력을 지닌 왕이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면 안 되는 까닭은 술에 취할 경우 가난한 자들의 억울함을 제대로 풀어 주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잠 31:4-5). 한마디로 권력의 유일한 존재 이유는 이방인, 고아, 과부로 대표되는 이들을 보호하고 신원하는 데 있다. 그럴 때 그 권력은 하나님께서 힘을 주신 까닭을 성취하고 있는 것이며, 그러한 권력 행사는 하나님의 세상 통치를 본받는 것이다.

오늘날 이 본문들이 우리에게 특별히 생생하다. 왜냐하면 아직도 우리 곁에는 4년 전에 일어난 참상의 진상이 밝혀지기를 구하고 있는 이웃들이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 가족들이 요구하는 것은 제대로 된 조사, 제대로 된 판결이다. 그러나 어느새 우리 사회는 자신이 유가족이 아니고 자신의 삶이 원체 바쁜지라 이 일에 무관심해져 가고 있고, 과거 일로 치부해 버린다. 세월호 진상 규명을 요구하면 지나간 과거를 붙잡지 말고 미래 지향적으로 살라는 말을 내뱉기도 한다. 그러나 세월호 사건은 그때 그 사건이지 않고 지금도 진행되는 사건이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곳곳에 이러한 세월호 참사가 있다. 세월호는 곳곳에 있다. 우리 살고 있는 세상 전체가 어느새 언제 터질지 모르는 세월호가 되어 있다. 세월호 진상 규명을 위한 노력은 단지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와 우리, 우리 가족을 위한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하게 되는 것은 세월호 유가족들이 다른 노동자들의 참담한 현장에 동참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그분들은 세월호 이전까지 이러한 문제들에 관심이 없었을 수도 있고, 관심이 있다 해도 저렇게 참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이 부모님들은 자신들의 자녀를 사회 곳곳에서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 문제가 그저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로 연결된 문제라는 것을 발견하고 깨닫게 된 것이다. 앞에서 정의를 행하는 삶이 왕에게 주어진 것이되, 이미 아브라함에게 주어졌음을 이야기했다. 정의를 행하는 삶은 통치자들의 것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행해야 할 삶인 것이다.

이스라엘이 살고 있는 성읍의 평화를 빈다는 것은 단순한 중보 기도가 아니다. 그것은 그 성읍 가운데 정의와 공의가 임하기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정의를 행할 것인가. 먼저 정의의 근본이 재판이라는 점에서 정의에는 구조적 차원이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재판이라는 틀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것이다. 오늘 우리 시대의 억울하고 가난한 자는 누구일까. 당장 세월호 유가족들이 있을 것이며, 삼성전자 백혈병 피해자들, 비정규직·파견직이라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노동자들, 그리고 기초생활수급자이거나 차상위 계층임으로 인해, 혹은 동남아 출신 노동자라는 이유 때문에 삶이 힘겹고 버거운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비정규직이라는 현실에 맞닥뜨리게 되는 수많은 청년들이 있을 것이다. 이를 생각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세월호 유가족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파견직 노동자들의 권익이 보장될 수 있는, 그리고 가난해도 기본적인 삶이 보장될 수 있는 틀이 만들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활동에 가능한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 여러 시민단체는 이를 위해 애쓴다. 노동자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현장에 같이 동참하며 애쓰는 평화누리 같은 단체도 있고, 이 땅의 근본적인 문제인 토지와 주택 문제를 위해 애쓰는 희년함께 같은 단체도 있다. 한편 교육 문제의 해결을 위해 애쓰는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같은 단체도 있다. 이러한 단체들을 알아보고 회원으로 참여하고 내가 번 돈의 일부를 후원하여 이 활동을 지지하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가 일상에서 행할 수 있는 틀 바꾸기, 사회구조 바꾸기의 한 걸음이 될 것이다.

아울러 오늘날의 민주주의 사회는 국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선거를 통해 간접적으로 참여한다. 국민들이 자신들의 뜻을 표현하고 반영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틀이 선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거는 정의를 일상에 행하는 신앙적인 실천이다. 선거에 참여하여 투표하는 것은 이 땅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평화가 임하도록 애쓰는 실질적인 실천이다. 투표의 기준은 무엇일까. 앞에서 살펴보았던 모든 성경 구절들은 통치자들이 해야 할 일로, 억울하고 가난한 이들을 회복하고 돕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그렇다면 어떤 후보나 정당이 비정규직 문제에 오랜 관심을 가지고 정책을 만들고 추진하는지, 어떤 이들이 세월호 진상 규명에 적극적인지, 어떤 정당이 백혈병 피해자들의 고통에 민감하게 귀 기울이는지,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선택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 거짓 선지자들은 그들로 하여금 바벨론에서 곧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거짓 희망을 부추겼고, 그로 인해 바벨론에서의 삶을 덧없고 오래가지 않는 것으로 여기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신 참예언자인 예레미야는 바벨론에서의 세월이 70년이라 선언한다(렘 29:10). 70년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뜻을 따라 그 때가 충만하게 차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당장 떠나올 사람처럼 살아갈 것이 아니라, 그 땅에 오래 머물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성읍의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상황을 알아야 하고, 그들이 처해 있는 현실의 흐름을 알아야 한다. 공의의 열매가 평화일진대(사 32:17), 성읍의 평안을 위한 포로 된 이들의 기도는 그 땅의 정치적인 현실에 대한 관심과 결코 무관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온 땅의 주이심을 이 시간 고백합니다.
온 세상의 진정하고 유일한 왕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왕으로 지으셨음을 또한 고백하며 찬양합니다.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 우리에게 주신 왕의 존엄함을 잊지 않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 살아가는 나라를 위해 기도합니다.
국민들의 뜻을 저버리고 자신들의 사사로운 욕심을 취하던 이들이
국민의 뜻을 따라 법의 심판을 받았고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 불의를 벌하시어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모든 사람으로 알게 하여 주옵소서.
이제 새로운 대통령을 국민들이 뽑게 됩니다.
경제를 살리는 대통령이 아니라,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대통령이 세워지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노동자들에게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나누어준 주인처럼,
모든 이들의 삶의 기본권을 확립하고 지켜 내는 대통령이 세워지게 하여 주옵소서.
평화를 누리고 얻기 위해서는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길임을
모든 이들로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근주 / 기독연구원느헤미야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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