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대형 교회 목사들의 행태로 많은 이가 성가셔 하고 있다. 헌금을 강조하다 못해 신도들을 위협하며 신학적으로 전혀 타당성이 없는 주장을 공공연히 하는 예도 있고, 교단법을 교묘히 피하면서 자기 자식에서 목회처를 변칙적으로 물려주는 목사도 있다. 목사들의 범죄적 공모 현실을 지적하자면 한이 없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이런 목사들만 있지 않다는 점이다. 교회가 대형화되어도 탐욕을 부리지 않는 목사도 있고, 교회가 예수의 교회가 아니라 목사의 교회처럼 인식되고 이해되는 현실을 극복해 보려 몸부림치는 목사도 있다. 그러나 대형 교회라는 현실이 교회 크기만큼 목사들에게 큰 유혹거리라는 것도 사실이다.

교회를 크게 성장시키는 데 이상을 가진 이들의 남다른 열정과 노력, 수고가 곁들여진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내가 한때 섬기던 교회의 목사는 교회 건축 자금이 없어 고심할 때 "차라리 에밀레종이 만들어진 것처럼 자기 자신이 콘크리트 속에 들어갈지라도 교회 건축이 이루어진다면 한이 없겠다"고 신도들 앞에서 고백한 적이 있다. 그의 교회를 향한 헌신과 열정은 많은 이들을 감동하게 했고 교회 건축은 이루어졌다. 그는 교회 건축 기간 급여를 한 푼도 받지 않고 무임 목사로 살겠다고 했다. 물론 그가 콘크리트 속으로 들어간 것도 아니고, 돈 없이 3년여 생활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남다른 열심과 '자기' 교회를 향한 헌신은 내가 만난 목사 중에서 단연 으뜸이었다.

큰 교회는 목사의 헌신과 열정을 따르는 무수한 평신도들의 헌신과 기여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렇게 이루어진 교회는 대부분 특정 교단에 소속된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교회가 대형화되면 교단은 무색해지고, 일개 목사가 장악하기 쉽다. 대형 교회를 세워 나가는 과정에서 평신도들의 기여는 자취도 없이 지워지고 목사의 수고와 업적으로만 평가하는 것이 일반 풍조다. 목사에 대한 찬가와 칭송이 늘고, 신도들은 목사의 비범함을 전설처럼 전하고 나른다. 그러나 목사의 참모습을 제대로 헤아리는 사람은 매우 적다. 한국교회가 범하는 신학적 죄, 성직 세습은 이런 교회에서 흔히 일어나고 있다. 여기에는 목사가 누리는 범접할 수 없이 집중된 권위와 권력, 그리고 평신도들의 힘이 개별적으로 분산된 교회의 구조적 특성이 자리 잡고 있다.

대형 교회 목사와 부목사의 관계는 철저하게 전근대적인 주종 관계의 구조를 지니고 있고, 부목사나 전도사의 생존권과 사상의 자유는 매우 쉽게 박탈된다. 이런 교회가 평화를 찬양하는 대중 집회 이면에는 소수에 대한 끊임없는 박해와 무시와 인권유린이 있다. 교회의 일치와 평화를 위하여 그들이 규정하는 악을 제거하는 셈이다. 대형화된 교회의 목사는 철저하게 복종하는 소수의 부역자 장로나 부목사를 두고 있다. 마치 박근혜 정권의 공안 통치, 비서관 통치 방식과 유사하다. 비판과 토론은 금기시되고 일방통행적인 지배 체제가 유통된다. 담임목사에 대한 우상숭배적인 칭송은 기본이다. 그래야 일치와 선교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한국 사회, 특히 한국의 대도시 중심부에 이런 유의 대형 교회가 출현하는 것은 참 기이한 일이다. 여기에는 수많은 사회학적이며 심리학적 요인들이 있을 것이다. 그 모든 문제를 다루기에는 능력도 없고 시간도 없다. 하지만 기독교 윤리학자의 관점에서 대형 교회의 문제를 몇 가지 지적해 두고 싶다.

대형화된 교회는 너무나 독자적이어서 교회법을 별로 존중하지 않는다. 각 교단이 가지고 있는 교회법은 괴물같이 거대해진 대형 교회를 염두에 둔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 비전문가 집단인 신도들의 지위와 장로와 목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담임목사의 지위는 전혀 비교할 바가 못 된다. 하여 대부분의 대형 교회는 교단의 지배와 간섭에서 실질적으로 독립한 일종의 교주를 둔 집단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오죽하면 교단마다 뒤늦게 성직 세습 금지 규정을 마련하고 있겠는가. 그러나 비범한 대형 교회의 교주가 이런 규정에 멈추어 설 존재들이 아니라는 것을 최근 M교회 역시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개신교 선교 140년

개신교 선교 140년 역사를 지나오면서 한국교회는 눈부시게 성장했다. 한국교회 성장에는 무수한 그리스도인의 땀과 눈물 어린 기도, 세계 교회에 유례가 없는 신도들의 헌물과 헌신, 그리고 생존을 위한 노력 외의 거의 모든 시간을 교회에 바치는 신도들의 사랑이 있었다. 한국교회가 가난했을 때 신도들은 매 끼니마다 성직자를 기억하며 성미를 뜨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교회가 가난했을 때 성직자들은 모든 교회 구성원에게 사랑을 받았다. 명절 때가 되면 신도들은 아무리 가난해도,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성직자를 향한 따스한 마음을 담아 선물을 보냈다. 간혹 교회에서 이임하는 목회자가 있을 경우 교인들은 마치 어버이를 잃는 듯 눈물로 환송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마 지금도 규모가 작은 가난하고 어려운 교회에서는 이런 미덕을 이어 가고 있을 것이다. 이런 교회에서는 어느 목사도 자기가 섬기는 교회가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는 이가 없다. 아무리 빈한한 삶이라 할지라도 목사들은 자신의 서재에서 오래 머물렀고, 말씀의 증언자로서 강단에 서는 것을 사명으로 알았다. 그러나 언제부터 교인들을 모으는 일이 목사의 과제가 되었고, 신도들은 어깨띠를 매고 거리에 나가 전도하는 풍조가 생기기 시작했다. 경품도 등장하고, 경쟁도 시키면서 앞다투어 교세 확장에 집중했다. 남의 교인을 뺏어오는 일을 부끄러워하던 목사들은 점점 사라지고 그것을 오히려 자랑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아졌다. 이웃 교회에서 신자를 빼앗은 교회는 부유해지고, 신자를 빼앗긴 교회는 가난해졌다. 도시의 교회들은 부유해졌고, 농촌의 교회들은 더 가난해졌다. 가난한 교회의 목사들은 더욱 빈궁해졌고, 부유한 교회의 목사들은 더욱 부유해졌다. 이러한 풍조와 더불어 적고 가난한 교회들을 외면하는 신자 집단이 대거 등장했다. 이들은 크고 강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허세에 사로잡혀 대형 교회로 몰려갔다.

교주(敎主) 교회의 출현

이렇듯 오늘의 한국교회 현실은 내가 어렸을 때 경험한 한국교회와는 매우 달라졌다. 1980년대를 지나면서 일부 부유한 교회 성직자들은 과거의 성직자들과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부유한 지역의 목사들은 속옷부터 와이셔츠, 양복들, 온갖 명품으로 치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기업 회장급 예우를 받으며 고급 차를 타기 시작했고, 그들의 급여는 비밀에 부쳐지고 있다. 그들의 개인 일정과 사생활은 교인들에게 알려지지 않는 비밀이 되었다. 신도들이 정성껏 바친 헌금은 목사와 일부 집단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사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해졌다. 이들은 약진에 약진을 거듭하여 목 좋은 곳에 자리 잡으면 결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심지어 자기가 잡은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는 풍조도 만연하다.

이들은 이제 교인들의 진심 어린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교인들을 지배하는 자, 교인들의 숭배를 받는 존재가 되었다. 돈이 필요한 기독교 기관들은 이들의 비위를 맞추고 돈을 얻어 냈다. 이들은 신도들의 헌금으로 모인 돈의 힘으로 교단장이 되기도 하고, 기독교 이름을 가진 기관의 이사장으로, 신학대학 이사장이나 이사로, 교회 기관 회장으로 추대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중요한 기독교 기관의 요직은 이들의 명예직이 되었다. 교회가 대형화될수록 이들의 이력은 점점 화려해졌다. 대형 교회 목사들과 근친 거리에 있는 소수를 제외한 일반 신도 처지에서 본다면, 거대한 교회의 위세 그 자체는 목사의 권위와 능력을 드러내는 카리스마적인 권력을 의미한다. 유교 문화권에서 형성된 허세와 명분과 체면, 그리고 과시 욕구를 버리지 못한 신자들은 자연스럽게 그런 위대한 목사의 신자임을 한없이 자랑스러워한다. 평범하여 가진 것 없고 사회적 지위 하나 얻지 못한 이는 목사를 통하여 자기 욕망을 충족했다. 사회 저명인사는 큰 목사와 동급의 서열적 지위를 확인하는 만족을 얻기도 한다. 이렇게 무명 신자나 유명 신자 모두에게는 대형 교회 목사를 자랑스러워할 이유가 있다.

이렇듯 목사에게 자신을 일치시키는 대형 교회 신자는, 자신의 주체적 판단이나 사유 결과보다 거대한 회중이 모인 집회의 활력에 자신의 감정이 압도당하는 경험을 반복하게 된다. 신자들은 대중 집회에서 지성적이며 이성적인 동의가 아닌 대중의 감정에 쉽게 동화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은혜 받았다"고 이해하며, 집회 때마다 그런 은혜를 경험한다. 이들은 매우 습관적으로 자신의 감정에 일치되는 표현에 동의를 보내며 "아멘, 아멘"을 연호하면서 자신도 그 거대한 회중의 하나가 되는 일치의 경험을 얻는다.

물론 이성적이며 지성적인 이들은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다. 이런 이들은 대형 교회 신자 노릇을 생래적으로 하지 못하게 되어 그 교회를 떠난다. 대형 교회 신자는 담임목사와 몇 년 동안 단 한 번 말도 건네 보지 못했을지라도 그리 큰 문제로 여기지 않는다. 이미 그와의 실질적인 인격적 관계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평등한 인격적 관계가 아니라 종교적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의 유명세와 이미지로 접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자는 목사의 일방적인 메시지를 매개로 한 주객 관계가 형성되어 거대한 성전의 한 귀퉁이 회집한 대중의 하나가 되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신자, 그리고 그러한 거대한 회합에서 형성되는 대중적 '위세'에 감히 저항할 수 없는 신자가 되는 것이다. 그 결과, 목사는 교회의 교주(敎主)가 되고, 신도들은 무력한 수혜적 대중으로 남는다.

길든 신자

이렇게 대형 교회의 신자는 비인격적인 객체로 길들여진다. 대형 교회 집회는 그 사회적 성격에서 나치의 거대한 회합, 북한의 거대한 군중집회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는 열광하는 집단, 일치되는 감정, 그리고 그 집단이 만들어 내는 응집된 힘, 대중을 이끌어 가는 카리스마적 지도력이 있다. 개인으로서 소외감이 크면 클수록 그는 이런 집단의 일원이 되는 것만으로 만족스러워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집단에서 지도자가 잘못되면 매우 위험하다. 거대한 집단의 크기에 정비례하는 자기 집단의 의(義)화, 자기비판 능력 상실, 집단을 열광하게 하는 증오, 그리고 주체적 사유가 증발한 집단의 예속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 사례는 독일의 제3공화국 히틀러 나치 정권, 그리고 대형 종교 집단을 예로 들 수 있다. 정치적 대형 집회와 종교적 대형 집회의 차이는 다소 그 목적만 다를 뿐이지 그 대중적 성격은 유사하다.

나치즘과 대형 교회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하나는 예수로 대중의 마음을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이나 국가를 팔아 대중의 환심을 얻는 것이다. 이 두 집단에 참여하는 이들의 근본 성격은 인격적 개인이 아니라, 대중화된 개인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결정은 지배자적 소수가 하고, 대중은 주체적 결정권을 가지지 못한다. 거대 집단 속에서 자기를 확인하는 개인은 주체적 판단 능력이나 사유 능력은 소수집단의 경우에 비해 현저히 뒤떨어진다. 그는 자기 내면의 인격적 힘으로 추동된 행위자가 아니라, 집단의 감정 속에서 행위의 동인(動因)을 얻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리적이며 도덕적이거나 철학적 사유와 판단 능력이 현저히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들은 내면적 갈등을 느끼며 어떤 이견을 가지거나 동의할 수 없는 문제가 있을지라도 이에 저항할 능력도 없거니와 저항할 방법이나 통로도 없다. 이런 개인의 실존적 저항 능력은 이미 대중 속에서 얻는 허세와 과시효과의 일방성에 의하여 제거되거나 억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치 북한 주민들이 거대한 군중집회에서 감격하고 몸을 떨며, 환호하는 것과 유사하다. 북한에서는 그것을 인민의 열화와 같은 일치의 경험이 될 것이지만 한국의 대형 교회에서는 개인의 감정을 압도하는 은혜라고 불리는 것이 다르다. 굶주려 메마른 얼굴 속에 번지는 인민의 감격, 거대 집단과 초라한 자신을 일치시키는 경험이 있기에 독재자들은 군중집회를 이용해 왔다. 깃발과 광장과 군중의 함성은 정치나 종교를 잇는 가교와 같다. 저편으로 가면 정치가 되고, 이편으로 오면 종교가 된다. 콘스탄티누스 이후 양자가 합해져 변방에는 한없이 잔인했던 로마제국의 교회가 형성될 수 있었던 사례를 기억하면 된다.

종교 집단과 정치집단 사이에 차이는 있다. 정치는 이런 허세를 집단의 힘의 과시로 표현하고, 종교 집단은 그것을 영성의 능력이라고 포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러나 나는 집단 속에서 힘을 얻는 이러한 허세나 과장된 자기 이해는 참된 기독교적 영성을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대중화된 집단은 영성적으로 매우 조야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영성은 자신의 내면적이며 책임 있는 주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본질은 집단의 감정을 묶어 낸 것으로, 매우 폭력적이어서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이용당하기 쉽다. 은밀히 등을 미는 교회도 있지만, 노골적으로 태극기 집회에 교인들을 차에 태워 내보내는 교회들이 엄연히 존재하기도 했다.

이들이 얻는 자각과 깨달음은 주체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을 이끄는 이의 자의에 쉽게 이끌려진다. 예를 들자면 조용기가 말하는 영성은 그가 포장해 낸 오중 복음과 삼박자 구원에 한정되고, 그러기에 지극히 물신적이며 세속적이다. 그의 설교는 대중 선동적인 카리스마적 행위의 성격이 짙다. 주일마다 무수한 순복음교회가 조용기 비디오를 틀어 놓고 은혜를 받는다. 조용기의 인격과 상관없이 그의 카리스마가 묻어나는 립싱크만 있어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고, 법원에서 어떤 판결을 받았는지는 관심거리가 되지 못한다. 히틀러의 범죄가 독일 안에서 비판받거나 자제될 수 없었던 이유도 이와 유사한 것이다. 이런 대형화된 집단의 구성원은 그 '이끌려지는 성격' 때문에 그들의 도덕적 판단 능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집단 속에서 도덕적 주체의 상실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런 종교는 목적만 다를 뿐 나치즘의 히틀러 종교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포비아 공동체

나치즘이 증오를 이용했듯이, 카리스마적인 대중 집회의 지도자도 대중을 단순화하는 방편으로 증오를 이용한다. 나치즘은 아리안 민족의 우수성을 내세우면서 미래의 번영에 장애가 되는 모든 요소를 증오 대상으로 간주했다. 반면 대형 교회 목사들은 자기 교회의 우수성을 깎아내리거나 교회 성장에 장애가 되는 모든 요소를 이단적인 것으로 매도하며 증오를 배양한다. 나치즘이 이용한 증오보다 더 무서운 것이 대중적으로 세력화된 종교 집단의 증오다. 이들은 종교적 증오를 생산하는 방식에 있어서 민족이나 국가 이름으로만 그 증오를 정당화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이들이 사용하는 방식은 한층 더 강화된 방식, 증오의 대상을 종교적 악, 하나님의 원수, 즉 사탄의 세력으로 몰아가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목격할 수 없듯이 이성을 가진 우리는 사탄도 목격할 수 없다. 그러나 사탄의 정체와 실제를 모두 파악하고 있다는 듯 주장하며 허세를 부리는 목사에게서 신자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뛰어넘는 비범한 영성을 비판 없이 인지한다.

설교할 때마다 사탄의 역사를 번번이 경고하며 설교하는 목사는 사탄의 역사를 파악할 능력을 갖춘 비범하고 초월적인 존재로 신도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나아가 거대한 공적 집회에서 대중의 환호를 받는 목사는, 그 집단 안에서 의심할 수 없는 공인된 존재로 권위가 옷 입혀진다. 신자 중 목사에 대하여 간혹 의심이 일고 내면에 이성의 반발을 느끼는 이가 있다 할지라도 거대한 집단 안에 일개 신자로 위치한 개인은 의심을 발설하거나 목사를 비판할 수 없다. 이미 그것은 금기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학적 훈련도 받지 않은 신도, 그저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꾸며진 성경 공부만 한 신자는 비판과 저항의 방법을 모른다. 오로지 순종과 헌신, 의심 없는 믿음을 강요받아 온 순진한 무리인 것이다.

이런 신도들의 일상을 위협하고 호시탐탐 노리는 사탄이라는 위협적 존재를 입에 달고 사는 종교 지도자는 그 허세로 인하여 무수한 종교적 악을 생산할 수 있다. 곳곳에서 사탄의 세력이 호시탐탐 달려들고 있다는 경각심을 끊임없이 일깨워 신자들에게 정신병적 망상에 사로잡히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신의학자들을 만나 대화하면 이런 사례는 부지기수며, 전국에 산재한 기도원에서 만날 수 있는 정신질환자의 일부가 그 증거다. 이들의 사탄론은 이런 정신병적 부작용을 넘어 매우 강력한 기제다. 목사 집단을 방어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사탄론을 주장하는 목사는 신도들이 목사와 목사가 세운 교회에 적대적인 모든 것에 대하여 사탄이 배후에서 벌이는 일이라 여기도록 교사하며, 신자들에게 영적 전쟁에 나서기를 요구하기도 한다. 이와 동시에 자기편은 자동으로 하나님 편으로 의화(義化)된다. 이런 사고 습성을 가진 신도들 내면에는 뿌리 깊은 영적 강박증(공포, 두려움)이 자리 잡는다.

이렇게 스스로 사유할 수 없는, 주체성 없는 신도들은 일종의 영적 '포비아(공포)' 환자들이 된다. 이들은 자신들과 다른 이들을 '이단'이라 칭하고, 인류 사회의 인간성을 지켜 온 인문 사회과학적 지식의 유산이나 체계도 쉽게 사탄이 배후에 있는 것이라 여기며 적대시한다. 이들은 진보 세력을 좌파로 낙인찍은 후 그들이 배후에 있는 하나님을 적대하는 영적 세력인 사탄에게 조종받는다고 신화적으로 사고하며 두려워한다. 여성운동의 결과 형성된 여성의 인권 운동, 여성의 성 평등, 자신의 몸에 대한 여성의 주체적 결정을 존중하는 선택권 운동, 성소수자 인권 운동, 심지어 자신들의 신앙을 비판하는 신학적 사상도 적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라고 규정한다.

이들은 신앙심이 깊으면 깊을수록 다른 종교의 존재 이유 자체를 부정하는 반문화주의자, 종교 파괴자의 태도를 보인다. 따라서 이런 유의 신자들은 현 상태를 영적 전쟁 중이라고 여기고 자신을 영적 전사라 자처한다. 이런 일련의 행태들은 대형 교회 목사들이 대중 집회에서 자극적으로 쏟아 내는 지침 즉 '사탄 포비아'와 더불어 사탄을 자신과 자신의 교회를 비판하는 모든 형태에 유비시키는 방식에 의하여 증폭된다. 이런 집단에 속한 이들은 자신들 주장 외 다른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진리는 하나이며, 그 진리는 이미 자신들 것이고, 그것을 입증하는 것이 자신들의 대중화된 세력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더 깊은 문제는 이들이 주장하는 진리가 매우 허접스러운 진리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지적 불성실, 혹은 신학적 왜곡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데 있다. 대형화된 집회를 통하여 이들은 목사의 가르침에 무조건적인 승인만 배웠기 때문에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이견(異見)자를 향해서는 일종의 깊은 거부감을 가지도록 자신도 모르게 의식화되어 있다.

결국, 이들은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에 있어서 자기 집단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더불어 타자화에 능해지는 정신적 장애를 가지게 된다. 자기비판, 자기 점검, 그리고 오류에 대한 인지능력과 대처 방안의 결핍은 기독교가 오래 주장하던 '교황 무오설' 혹은 '성서 무오설'과 유사한 자기 절대화의 오류에 대한 검증 능력을 심각하게 제거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들은 나치즘이 히틀러를 영웅시하듯, 이들은 자기 목사를 영웅시하고, 나치즘이 반(反)나치즘을 악마화했듯이 이들은 자기 집단에 반대하는 이들을 매우 쉽게 악마적인 것으로 매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가 보편성을 상실하는 이유, 교회가 개인의 소유처럼 성직이 세습되는 이유, 그리고 이런 교회의 타락에 대하여 거부할 수 없도록 도덕적 장애를 가진 신자들이 되는 이유, 목사가 성직 세습을 도모해도 거부할 수 없는 이유,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이들이 비판적 사고를 할 능력이 거세된 데 있으며, 대중 집회 속에서 안락하게 누리고 있는 자기만족이 상실될 것을 두려워하는 데 있다.

이런 교회에서 목사는 거침없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수백 억 비자금을 모을 수도 있고, 수백 억 퇴직금을 받아 챙길 수도 있으며, 교회를 자기 자식에게 넘겨줄 수도 있다. 법정에서 실형을 받아도 목사의 지위에는 아무런 손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법정의 재판관들이 그 목사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얌전한 신도들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길든 신도들은 자신들의 카리스마적인 목사가 없어지면 사탄이 틈을 탈 것이라고 믿도록 훈련되어 있다. 일치와 단결에 익숙한 집단은 불일치와 이견을 두려워하고, 이내 그러한 것을 사탄의 공격으로 규정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그 집단 구성원들 속에서 도덕적 판단과 사유, 책임성은 증발하고 영적 권위를 가진 특정한 이의 자의가 지배하게 된다.

영성으로 포장된 허깨비 포비아(상상 속에서 존재하는 사탄에 대한 두려움)의 원조는 초대교회가 신앙의 순수성을 상실하면서 로마제국의 세속적 가치들을 수용해 들일 때 교회의 거룩함을 상실하고 있다는 사실에 영적 위기를 느낀 이들이었다. 이들은 더욱 깊은 영성적 연단의 길을 가기 위하여 광야나 늪지대, 사막이나 돌산으로 숨어들었던 수도사들이다. 이들은 영적 적대자인 사탄과 악귀들이 그런 휘휘한 불모지에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그 불모지에서 영적 싸움에 전력 질주하는 전사로 자신을 이해하고 거의 평생을 그렇게 살아갔다. 이들은 어처구니없게도 휘휘하고 음산한 곳에 악령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학적 사유의 역사화는 이런 신화적이며 망상적인 악령의 세계를 부정한다. 물론 영화 '엑소시스트' 등에 그려진 악령 추방 제의에서 섬뜩한 느낌을 주는 악령들이 꾸며지기도 하지만 실재는 아니다. 영화는 이런 소재를 연기하지만, 망상적인 종교 지도자는 이런 현상을 실재라고 믿고 가르친다.

하지만 이들은 인격적이며 도덕적 현명함을 갖추고 세속적인 탐욕을 버린 영성적 지도자 구루와는 매우 다르다. 이런 영성적 종교 지도자들은 구루들과 달리 지극히 세속적인 권력과 금력을 탐하며, 이런 탐욕을 위하여 대중 선동적 행위를 쉬지 않는다. 그 대표적 행위가 물질을 탐하고 권력과 명예를 탐하는 것을 넘어서 대대로 교주 노릇하려는 부자간의 성직 세습이다.

성직 세습 풍조

성직 세습이 관철되는 이유는 너무 많다. 그 이유는 한마디로 교회 권력이 위에서 설명한 여러 이유로 인하여 민주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교인들이 신화적 교설에 이끌려 전근대적인 '거룩한 우민'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직 세습이 이루어지는 교회의 속성을 살펴보면, 첫째, 교회 권력이 이미 소수에게 장악되어 있다. 교회의 권력이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는 목사와 그에게 부역하는 소수에게 장악된 교회에서는 성직 세습의 절차와 과정이 제아무리 민주적 합의 과정을 거친다 하여도 그들이 꾸민 기획의 결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둘째, 신도들의 참여 구조가 없다. 소위 목사 중심의 친위 세력이라 할 수 있는 장로 집단은 북한의 일당독재와 다를 바 없는 순종과 일치를 미덕으로 여겨 선호한다. 장로의 직분은 직업이 아니라 부가적인 명예직 성격이 강하다. 이들은 교회의 성장과 명성, 허세, 과시의 가치를 매우 중시한다. 따라서 그릇됨에 대한 저항의 의지보다 일사불란한 일치의 정신에 쉽게 승복한다.

셋째, 이들은 교회 집단의 위기를 두려워한다. 오랜 기간 교회의 성장과 발전을 이루어 온 목사 지위를 은퇴 후에도 인정하고 그의 후견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들은 교회의 권력 구조가 바뀌는 것을 두려워한다. 목회자의 교체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은 목회자의 교체기에 일어날 수 있는 카리스마적 지도력의 약화에서 오는 혼란이다. 따라서 이들은 현상 유지적인 판단을 선호한다.

넷째, 이들은 대형 교회의 구조가 가지고 있는 성격을 믿는다. 교회 안에 분란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담임목사가 누가 되든 별로 중요하지 않다. 대형 교회에는 거대한 집단이 불러오는 일종의 부스팅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대형 교회는 성직 세습이 되어도 별로 흔들리지 않게 하는 강한 관성이 있다. 오히려 담임목사가 은퇴 후에도 조종할 수 있는 후임이 오면 권력 구조의 개변이 없어 더욱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섯째, 대형 교회 신자는 도덕적 질문을 하지 않는 데 익숙하다. 은총과 용서와 사랑과 축복의 메시지와 더불어 교회에 대한 의무를 강조하는 목사의 설교 콘텐츠는 신도들의 도덕적 판단 능력을 키워 주지 않는다. 이는 예언적 메시지의 결핍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성향은 결국 회개와 변화, 참여와 실천, 책임과 비판의식, 교회의 민주화나 사회의 민주화, 인권의 확대라는 과제를 신자들의 관심에서 생략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대형 교회 신자들은 대형화된 집회에서 삶을 위한 사회윤리적인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개인의 은혜와 감격과 감사를 배운다.

여섯째, 대형화된 교회의 신자는 철저하게 반(反)사회적인, 개인주의적인 신앙을 우선시하도록 교사받는다. 대형 교회에서는 교회나 사회를 변화시키거나 사회나 교회를 새롭게 만들 의무를 강조하지 않는다(이런 것을 가르치면 목사의 권위나 일당 독재와 유사한 교회의 체제가 먼저 전복되기 때문이다). 크고 화려한 교회를 선택하기 위하여 소규모의 교회를 떠나온 이들은 아무리 부정적인 일이 일어나도 교회의 성장을 위한 전략과 전도를 위하여 자신의 교회를 긍정적으로 이미지화하는 데서 정당성을 찾는다.

일곱째, 목사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신학적으로 문제가 되거나, 금전적으로 실수해도 대형 교회의 구조상 비리 사실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거나 이를 문제 삼는 이들이 나서지 않는 한 확인할 길이 없다. 교회 권력 구조에 일개 신도들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사가 아무리 많은 비자금을 감추어 두고 있다 할지라도, 교회 헌금의 심각한 유용이 일어나도 이들은 일차적으로 자신들의 문제라고 보지 않으며, 또한 문제가 밝혀져도 이를 처리할 통로도 능력도 없다. 오직 소수의 사람이 그 결정을 할 수 있지만 사실 교회 내 권력은 목사 중심으로 편성되어 있어서 그 기조를 바꿀 수 없다.

마지막으로, 대형 교회의 목사는 카리스마적인 권위를 내세우며 독재자의 면모를 갖춤으로 '비상한 존재'로 자신을 각인시킨다. 다시 말해 신도들은 자신들의 카리스마적인 목사를 향해서 일반인을 판단하는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거대한 권력 체계가 된 대형 교회에서 목사는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지위와 권위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부도덕한 성직 세습

일당독재 체제와 같은 대형 교회에서 일어나는 권위의 오용, 성직 세습은 일면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성직 세습을 비판하는 이들을 향하여 반론을 제기한 자료들을 살펴보라. 성직 세습은 성서적이며, 민주적 절차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오직 소수를 제외하고 대다수가 찬성했고, 그 이후에도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체육관 대통령을 뽑는 방식, 북한의 김일성 3대 독재 세습 공인 방식과 유사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매우 부도덕한 문제가 있다.

첫째, 성직 세습은 성직 세습을 받는 이의 부도덕성이 더 크다. 하워드 서먼(Howard Thurman)은 미국 보스턴대학의 최초 흑인 교수가 되었던 사람이다. 그가 플로리다에서 보스턴으로 공부하기 위하여 떠날 때 노예로 살아왔던 그의 할머니는 손자에게 청교도적인 정직을 가르쳤다. 그녀는 서먼에게 "네가 수고해서 얻은 것이 아닌 것을 네 것으로 절대 취하지 말아라"라고 권고했다. 서먼은 할머니의 권고를 평생 간직하고 정직하게 살았다. 정직함이란 자신의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닌 것을 취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성직 세습을 받는 이는 정직한 사람이 아니다. 마치 도둑질하여 착하게 살겠다는 것과 같다.

둘째, 아비의 목회 자리를 이어받는 것은 부정직할 뿐 아니라, 교회 권력의 일당독재의 결과를 수용한다는 의미가 된다. 즉 김일성 3대 세습 가풍과 다를 바 없이 아비의 권력을 세습받겠다는 행위를 스스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부도덕하다. 부도덕한 리더십의 교체는 그 교회의 영적 권위가 부도덕성 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결국 새로운 변화가 없는 독재 체제의 목회를 지속하자는 암묵적 합의다.

셋째, 결국 이러한 부도덕한 성직 세습의 기획과 결과는 아비와 아들의 공모적인 탐욕의 결과이며, 신도들에게 키워 놓은 포비아의 반향이다. 카리스마적인 기여를 통해 교회를 성장시켜 온 아비가 은퇴를 앞두고 교회의 위기를 조장하면 신도들은 안정된 길을 선택하는 무력한 양(羊) 무리와 다를 바 없다. 이런 경우 하나님의 교회는 그들이 제아무리 거룩한 사역을 운운한다 할지라도 부자간에 주고받는 탐욕스러운 선물로 전락한다. 성직 세습을 관철하는 교회는 이미 공교회의 성격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성직 세습은 다양한 신학적 비판이 이미 제기되었듯이 공교회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가 사사로운 관계에 복속되는 현상이며 지극히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을 따라 이루어지는 성(聖)과 속(俗)의 전도 현상이다.

무력한 신도 집단

대형 교회 신자들은 자기가 나가는 교회에 대한 자부심에 있어서 일종의 허영과 과시의 성향에 쉽게 오염된다. 교회에 대한 자부심과 만족감을 불러오기에 충분한 자산과 프로그램과 인적자원이 있고, 사회 각계각층 지도급 인사들이 포진한 교세에서 안전과 안정감을 느낀다. 따라서 성직자에 대한 성숙한 비판 의식이 제대로 형성되기 어렵다.

반면, 전근대적인 질서와 이에 대한 복종에 익숙하면 할수록 편안한 교회 생활을 할 수 있다. 교회의 성장은 신도들의 열정과 헌신, 기도와 복종으로 이루어지지만, 그 열매는 오로지 교회를 대표하는 목사가 거둔다. 교회의 성장에 정비례하여 목사의 권위는 기하급수적으로 강화되지만, 신도들의 힘은 점점 무력하게 1/N으로 줄어든다. 이런 이유에서 대형으로 성장한 교회의 구성원 중에서 초창기 멤버들은 대부분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자신들보다 더 유능하고, 더 부유하고, 더 많이 배운 이들이 자신이 서 있던 자리를 차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대형 교회에 속한 여성 집단의 경우, 우리 사회가 이미 배양해 둔 여성다움의 미덕 위에 순종과 복종의 규율이 더해지면서 순한 양의 무리가 된다. 불평과 비판 의식을 가진 이들은 곳곳에 배치된 심방 전도사들에 의하여 걸러지고, 순종과 헌신의 사람만 대표형으로 발탁을 받아 교회의 중직에 임용되고, 모범을 보이며 충성을 다하게 된다.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교회를 향한 헌신이 곧 신앙생활이라고 믿는 착각을 유도하는 이들이 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가족과 교회 외에는 제대로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 되어 간다. 따라서 교회 생활은 자신과 교회를 일치시키는 선상에서 자신의 일부가 된다. 교회에 대한 애착과 관심은 곧 자기애의 한 표현이기도 한 것이다.

문제는 "교회가 곧 하나님나라가 아니다"라는 신학적 명제를 이들은 교육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교회에 대한 충성이 곧 하나님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는 사실도 이들은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국, 교회가 이들의 신앙 축이고, 교회 생활이 신앙생활 전부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봉사와 헌신을 통해 자발적인 교회 성장을 위한 노예처럼 사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이들은 자신의 노후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신학적 근거가 불분명한 십일조와 각종 헌금을 율법처럼 실천하는 신자다. 넉넉하지 않은 생활을 하는 이들의 경우 교회에 대한 헌신과 충성으로 인하여 가족이나 친지, 가난한 부모를 경제적으로 돕는 일도 유예하거나 모른 척한다. 교회 사랑에 시간과 관심, 물질 등이 모두 바쳐져 이웃을 사랑할 시간과 물질 자원이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이들은 "교회가 과연 신앙생활의 중심이어야만 하고, 모든 충성의 대상인가?”라고 결코 묻지 못한다. 그런 테두리 안에서 관성에 이끌리듯 살아온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하마처럼 신자들의 돈과 시간, 관심과 헌신을 모두 들이마시는 교회에 충성을 다하다가 교회밖에는 무력한 신도 집단, 이들이 과연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진면목인가.

신학적 검증의 결핍

기독교 역사가 명료하게 증언해 주는 것이 있다. 신학의 부재는 왜곡된 신앙, 왜곡된 교회를 만든다. 중세 교회처럼 참된 복음이나 하나님 없이도 교회주의에 빠져서 대형 교회, 화려한 교회를 세울 수도 있다. 일부 거대 교회의 형성에서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교회 생활로 전치된 것은 삶을 희생시키고 교회의 끝없는 성장을 시도하는 목사들의 탐욕이 불러온 결과다. 교회 자체, 종교 자체가 살기 위하여 신자들 삶을 먹이로 삼은 결과다. 여기서 나온 것이 교회주의다. 예수는 하나님나라를 선포했는데 대형 교회 목사들은 교회의 왕국을 도모한다. 입으로는 "교회의 머리는 예수"라고 말은 하지만 실질적 권한은 목사가 교주처럼 현실적으로 행사한다. 이렇게 왜곡된 교회, 그릇된 신앙을 생산하는 원인은 목사가 인정하든지 안 하든지 '신학적 사유의 결핍'이다.

종교개혁은 신학적 검증이 없는 교회 성장, 교세, 교권의 부정이라는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거대 교회의 목사들은 중세의 오만한 교권자들같이 새로운 신학을 비난했고, 심지어는 지식으로서의 신학을 경멸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들은 교회의 법도 제 뜻과 의지에 어긋나면 편법을 사용하며 무시하고는 한다. 복음의 증언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내놓은 기상천외한 자의적 주장은 그 경박함이 끝이 없다. 통제되지 못하는 공룡 같은 교회는 이제 권력 그 자체, 독립적인 기괴한 생명체가 되었다. 거대한 교회는 신자들의 헌물로 금권을 가지고 신자들의 표심을 움직일 수 있는 정치권력을 가짐으로, 그들로부터 금력의 지원을 받으려는 이들을 무릎 꿇리고, 그들로부터 정치적 지원을 받으려는 정치가들의 보호를 받는다.

대부분의 기독교 방송, 신문, 대학, 기관은 물질적 지원 관계 때문에 이들에게 머리를 조아린다. 선거 때가 되면 나라의 최고 실권자인 대통령도 목사 앞에 나와 무릎을 꿇어야 한다. 이들의 종교 권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대형 교회 안에 포진한 수십여 명의 판검사들이나 부유층의 지원은 교회의 안전과 이익을 보장해 주는 기재가 된다. 하나의 교회가 대형화되면 될수록 더욱더 거대한 권력기관이 되고, 목사는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지위와 권위를 자랑하게 된다. 이런 교회의 목사는 무엇이든 자기가 작정하면 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는 셈이다. 이런 혜택을 암암리에 받는 이가 기독교 신앙을 개인주의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형용모순이다. 교회 안에는 정치권력이 없다는 말이며, 금권이 없다는 뜻이다. 거짓말이다.

이런 대형 교회 목사를 단순히 하나의 성직자인 목사로 간주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전제다. 우리 한국교회에서 교단을 불문하고 이들을 통제할 수 있는 기제는 사실 아무것도 없다. 특정한 범죄를 저질러도 이들은 손쉽게 빠져나오고, 도덕적 판단 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신도들은 범죄행위라 할지라도 그의 비범한 삶의 한 단면으로서 그의 빛나는 카리스마적인 권위 전체를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괴물과 같은 목사들은 일반 대중의 비난이나, 교단법에 의해서 쉽게 제재도 받지 않는다. 그들은 교단과 정치집단, 사법기관을 지배할 정치적 세력 혹은 방편이나 프락치도 가지고 있다.

이들이 외람되게 사용하는 것은 복음을 빙자한 자의적 성서 해석이다. 이들은 304명의 무구한 생명이 죽임을 당한 세월호 참사를 일러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주는 경고"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암에 걸린다"고 신도들을 위협도 하며, 여성주의적 운동을 "사탄의 역사"라고 규정 및 비난하고, 심지어 민주화 운동을 "좌파의 책동", "우리나라를 공산화하려는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심지어 제대로 연구해 보지도 않고서 "예수도 정치 경제 현실에 무관심했다"고 열변을 토하기도 한다.

그들 중에 일부는 성범죄에 연루되었고, 그들 대부분은 신자들의 헌금에서 수억대 급여를 이런저런 이름으로 챙기는 데 급급하다. 2017년 어느 소도시의 탐욕스러운 목사는 지난해 교회 예산에서 다양한 항목에 걸쳐 6억 원이 넘는 혜택을 받았다고 고발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다수의 신자가 모인 대형 교회일수록 심약한 신자들 눈에는 그 거대한 회집 자체가 진리의 현시이며, 목사를 통한 하나님 역사의 증거로 받아들여진다. 히틀러 친위대가 나치 깃발을 세우고 거리를 가득 메우며 행진할 때 그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읽었던 이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이렇게 허세와 위선과 부정직과 자의로 가득한 대형 교회의 실상이 신자들의 환호 속에 쉽게 감추어진다.

신학을 버린 목회자의 주장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 민족과 사회, 나라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찾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의 교회를 살찌우고 성장시키며, 문어발처럼 확장하는 제국주의적 '자의(恣意)'의 산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제아무리 복음으로 포장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고 있다 할지라도 결국 신자들의 헌신과 헌물로 이루어진 교회를 자기 자식에게 물려주는 행위로 사역을 매듭짓는다면 그가 주장해 온 거룩한 사역은 결국 그의 가족의 탐욕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것이다. 신자들은 그들의 자의에 따라 그들의 교회를 위한 헌신과 복종을 마치 하나님나라를 향한 것인 양 착각한다. 거대한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에서 만족을 얻는 과시와 허세적 신앙의 진면목을 감추고 있는 셈이다. 이런 교회에서는 성직 세습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은혜롭게, 이견 없이, 목사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이런 교회의 신자임을 자랑하며, 이런 교회를 참된 하나님의 교회라고 여겨야 할 것인가? 스스로 한발 물러서서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사람이 많은 넓은 길을 가지 말고 사람이 찾지 않는 좁은 길을 가라" 하신 주님의 권고를 다시 한 번 새겨들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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