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나쁜 하나님' 소개의 말

오늘의 한국교회는 정치적 타락, 종교적 부패, 신학의 허약함으로 인해 파산 직전에 몰려 있습니다. 이는 명백히 신학, 신앙, 교회의 위기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 너머에 치유를 위한 열망 또한 숨 쉬고 있음을 부정해선 안 될 것입니다.

치유와 소생의 가능성을 경험하기 위해 오늘의 한국교회를 지배한 기복과 왜곡된 순수의 풍경을 동시에 전망하는 문학적 시도는 어쩌면 필연이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이러한 시도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교회의 본령을 회복하는 사상적, 신학적 갱신 의지와 흐름을 같이한다고 확신합니다. <뉴스앤조이> 연재 소설 '나쁜 하나님'은 한국교회의 궤멸적 징후를 극사실적으로 해부하고 그 너머의 희망, 치유, 소망의 가능성을 함께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 소설가 주원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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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떠나기 전에 여기는 공장들이 있었는데…

민규가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민규의 맞은편 자리엔 정은이 앉아 있었다. 정은이 옅은 웃음을 보였다. 다소 풀어지고 흩어졌던 생머리를 다시 묶었다.

일러스트레이터 주원태

블라인드를 내리지 않은 아침의 스타벅스였다. 그곳 창문 틈새로 강렬한 햇살이 쏟아져 내려 정은의 자리를 밝혔다. 눈이 부실 법도 했지만 정은은 빛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가 말했다.

- 공장 지대가 첨단산업 단지로 바뀌지는 5년 쯤 되었어요.

- 첨단산업 단지?

- 그렇게 표현하는 것뿐이죠. 첨단산업 단지로요. 사실 이곳 사람들의 생계를 강제로 빼앗고 새로운 일자리를 준다는 명목 아래 지역 주민들 거의 전부를 원자력발전소 하청 직원들로 만들어 버렸어요.

정은의 한마디 한마디엔 원망과 질타보다는 현실을 정확히 설명하고픈 의지가 느껴졌다. 그 의지가 민규로 하여금 다시금 질문하게 했다.

- 원자력발전소가 모두 네 개나 생겼어.

- 불과 10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에요. 그 사이 율주시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되어 버렸죠.

- 그게 무슨 말이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니.

- 초고층 아파트가 생기고 첨단 쇼핑센터가 세워졌죠. 예전에 전통 산업들은 죄다 사라졌어요. 원자력발전소와 타워 팰리스만 남아 있는 게 이곳 율주시의 현실이에요.

- 김 선생님.

- ………

- 아니. 정은아.

- ……?

- 변한 것 같아.

- 어떤 면으로요?

- 뭐랄까. 사회에 대해 많이 냉소적으로 변한 것 같아.

'냉소적'이란 말이 정은의 마음을 자극한 걸까. 정은이 더 또렷하고 분명한 시선, 거기에 덧붙여진 정색의 낯빛으로 민규의 말에 답했다.

- 제가 변한 게 아니라 이곳이 변했어요. 그리고.

- ……

- 목사님도 변했구요.

변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민규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애써 잊으려 했던 14년 전의 죄의식이 복원되는 순간이었다. 민규는 정은이 자신을 편하게 대할 마음이 없다고 판단하고는 다시 존댓말로 되돌아왔다.

- 내내 무거웠고, 죄스러웠어요.

- 무엇 때문에요?

- 14년 전 당신과의 약혼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 거요. 그리고 개인의 욕망을 쫓아 미국으로 도망쳤던 제 자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어요.

-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정은이 민규의 말을 가로막았다. 민규의 입이 다물어지자 정은의 말이 빠르게 이어졌다.

- 그때 목사님의 행동은 어떤 말로도 용납될 수 없어요.

- ………

- 그건 그 사실 그대로인 것이고 그때 목사님. 아니 정민규란 사람은 제 마음속에서 죽은 거예요. 영원히 떠오를 수 없는 깊은 바닷속에 묻혀 버린.

정은의 단호한 말이 천형의 선고처럼 민규의 마음속 깊이 파고들었다. 민규는 본능적으로 정은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 그래요. 그 후로 전 피할 수 없는 천형의 벌을 받고 있는 듯해요.

- 이혼당한 말씀을 하시려는 건가요?

이혼이란 말을 듣는 순간 민규가 다시 정은을 바라봤다. 정은은 내내 민규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있었다. 정은이 말했다.

- 양 권사님만 모르고 교회 사람 모두가 알고 있어요.

- 내 이혼 원인에 대해서요?

정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민규는 더 자조적인 표정이 되었다.

- 하지만 이제 율주제일교회 사람들 대부분은 사생활 관련한 걸 문제 삼지 않아요. 그냥 목사님이 무던히 세련된 설교와 평안을 주는 인자한 웃음, 성품만 보여 주시면 되는 걸요.

- 김 선생님은 그런 걸 원하지 않는 것 같은데… 제가 잘못 본 건가요?

- 아니에요. 정확히 보셨어요. 솔직히 저… 목사님을 비롯해 지금까지 이곳을 거쳐 온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고 있을 수가 없어요. 역겨워요.

- 역겹다… 역겨워.

그 순간 민규의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반발심이 치솟았다. 민규가 조금은 볼멘소리로 따지듯 물었다.

- 그렇게 역겹고 불만스러우면서 왜 여기 계속 남아 있는 거죠? 그리고 날 이렇게 만나는 건 또 뭐고. 김 선생님 말대로라면 난 당신에게 있어 죽은 사람 아닌가요?

말은 그렇게 꺼냈지만 민규는 자신이 꺼낸 말을 이내 후회했다. 자신이 무슨 자격으로 정은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정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말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다는 기회를 잡았다고 본 건지 분명하고 똑똑하게 말했다.

- 목사님이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하셔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에요.

- 할 일?

- 목사님도 분명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을 거예요. 그건 맞아요. 하지만 전 한 가지만큼은 분명히 알아요. 목사님이 하실 수 있고, 하셔야만 하는 일이 있다는 걸.

- ……

- 사실 목사님이 이곳에 청빙받으셨다는 소식을 듣기 하루 전, 전 이곳 율주제일교회와 관계된 모든 일을 내려놓으려 했어요. 그런데, 목사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요.

- 난 잘 모르겠어요. 내가 뭘 할 수 있다는 거죠?

- 한 번 보시겠어요?

- 무엇을?

- 제가 왜 이곳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있는지 그리고.

- 그리고?

- 왜 목사님이 오셔서 기쁘다고 했는지에 대해서요.

(계속)

*'나쁜 하나님'은 주 3일(월, 수, 금) 업데이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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