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2015년 2월 <ㅍㅍㅅㅅ>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사순절을 맞아, 인생에 닥치는 알 수 없는 고난과 기도에 대한 의미를 되짚어 보면 좋을 것 같아 <뉴스앤조이>에 다시 기고합니다. <ㅍㅍㅅㅅ>에 이 글이 게재된 후 많은 분이 '기독교인의 정신 질환'에 대한 질문을 해 오셔서 원고 말미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와 이야기를 추가합니다. - 필자 주

신앙인에게 가장 괴로운 순간은 언제일까.

그것은 아마, 삶이 힘들고 고통스러운데도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없어 하나님만 의지하여 간절히 부르짖었는데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일 것이다. 고통의 원인이 무엇이든 가장 간절히 도움을 요청했고 하나님의 손길만 절박하게 필요했는데 아무 응답도 도움도 없는 순간을 맞이하면 어떻게 될까. 버림받았다는 인식과 함께 배신감을 느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이때까지 확신 있게 믿어 온 '신의 실존'까지 의심하게 된다.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은 모태신앙이든, 나중에 믿게 된 경우든 누구나 한 번 이상 '혼란의 순간'을 맞는다. 그 혼란의 순간은, 바로 가장 비참한 삶의 굴곡을 지나갈 때 '하필 그 순간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는 시기다. 그 전까지 나와 내 인생을 선한 목자처럼 인도하시고 책임지시던 하나님의 손길과 임재가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지고, 팍팍한 삶의 현장에는 쓰나미 같이 밀려오는 재난의 파국이 연속적으로 들이닥친다.

이런 이야기…어딘가 낯이 익지 않은가?

사실 이와 비슷한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가 구약성경의 욥기다.

욥기가 알려 주는 것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사자가 욥에게 와서 고하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양과 종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갈대아 사람이 세 떼를 지어 갑자기 약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더니 거친 들에서 대풍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소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한지라." (욥 1:13-19)

욥은 하나님과 사탄의 내기에 휘말려, 어이없게도 한순간에 모든 재산과 자녀를 잃고 심각한 피부병까지 걸린다. 얀 리벤스(Jan Lievens)作, '욥(Job)'(1631)

욥기는 어찌 보면 황당한 이야기다. 하나님과 사탄이 내기를 한다는 설정도 그렇고,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끔찍한 재앙이 연속적으로 닥쳐 욥이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이야기도 황당하다. 욥기의 주제는 심오하고 어렵다. 그러나 욥기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두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첫째는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 세계가 '권선징악'적인 인과관계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대체로 '권선징악'의 세계관을 선호한다. 그래야 이 '세계를 일관된 원리로 다스리는 신'을 믿기가 더 편하고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 속에서도 살아갈 용기를 얻으니까. 욥기에서 그런 믿음을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사람들이 욥의 친구들이다. 욥의 친구들은 처음에는 욥을 위로하지만, 결국 "네가 이런 고난을 당한 것은 네가 스스로 기억하지 못하는 불경한 죄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계속 말하며 정죄한다. 욥은 억울함을 호소하며 논박한다. 욥과 친구들이 논쟁하는 내용이 욥기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유다.

"너는 네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고 주님 보시기에 네가 흠이 없다고 우기지만, 이제 하나님이 입을 여셔서 네게 말씀하시고, 지혜의 비밀을 네게 드러내어 주시기를 바란다. 지혜란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다. 너는 하나님이 네게 내리시는 벌이 네 죄보다 가볍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욥 11:4-6); 욥의 친구 소발의 첫 번째 공격. 소발은 욥이 당한 재앙의 수준을 볼 때, 분명 하나님께 커다란 죄를 지었으리라 확신하고 욥을 정죄한다.

욥기는 사람들 대부분이 의지하고 기대하는 '권선징악'의 인과적 세계관이 현실 세상을 설명하는 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다. 욥의 친구들은 신 앞에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죄를 범하면 저주를 받는 기계적 세계관으로 욥의 비극을 해석했다. 욥이 스스로 무죄함을 강변하지만, 욥에게 죄가 있어서 하나님이 심판으로 끔찍한 고난과 비극이 연속해서 닥친 것이라고 이해한 것이다.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과 사탄의 내기' 때문에 욥이 저런 황당한 재앙을 당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고난의 이유가 '하나님과 사탄의 내기'든 다른 무엇이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단순한 인과율의 세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욥기는 분명히 가르쳐 준다.

욥기가 가르쳐 주는 두 번째 분명한 사실은 신앙을 갖고 있는 (심지어 하나님이 각별히 사랑하는) 사람조차도 끔찍한 고난과 재앙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욥의 처지와 마찬가지로 뚜렷하게 고난의 이유를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는 무척 불편하고 납득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요 15:16)

무려,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하신다 약속하시지 않았는가. 그러나 실제로는 소소한 기도에는 응답하시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죽음까지 생각하게 되는 심각한 고난과 재앙 속에서는 침묵하신다는 말인가. 아니, 상식적으로 저 정도 풍성한 기도 응답의 약속을 하셨다면, 굳이 기도하지 않아도 내 삶에서 가장 심각한 재앙과 고난의 위기에서만큼은 지켜 주셔야 하지 않는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을 당한 신앙인은 이런 회의와 질문 속에서 처절하게 울부짖었을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욥기는 결국 끝에 가서 욥의 건강이 회복되고, 친구들 오해도 풀리며 욥이 처음보다 더 큰 복과 소유를 축복으로 받으며 끝이난다. 그러나 현실 속 많은 신앙인의 삶은 꼭 그렇게 '해피 엔딩'으로 끝나지만은 않는다.

고난 속 '신의 침묵'이 말하는 것

우린 응답받는 기도의 원리와 비밀을 캐내는 데 혈안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분위기는 서점 기독교 서적 코너에 '기도 응답의 비밀'을 알려 주겠다고 아우성치는 책이 차고 넘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예를 들었을 뿐, 위 책들이 꼭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물론 쓰레기도 있지만…

그러나 고난 속에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기도 응답이 없는 현실에 대해 깊이 성찰한 책은 상대적으로 적다. 물론 개중에는 <고통과 씨름하다>(토마스 G. 롱 지음 / 새물결플러스 펴냄) 같이 훌륭한 책도 있지만, 이 주제를 다룬 책 숫자는 '기도 응답'의 주제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비교가 안 될 만큼 적다.

악, 고난, 신앙의 위기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이 담겨 있다.

아무래도 고난 속 신의 침묵과 기도에 대한 응답이 부족한 것을 해석하는 문제는 신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 해석하기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응답받는 풍성한 기도'의 축복을 받기 원하는 사람이 '고난 속 신의 침묵' 가운데 그분의 뜻을 알려고 하는 사람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어느 누가 '정작 내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의 깊고 선한 뜻을 헤아리고 싶겠는가.

그러나 나는 기독교가 '응답받는 기도'의 비밀을 파헤치기보다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 속 신의 침묵을 묵상하고 깊이 사유하는 것이 신앙과 인생에 대해 더욱 더 많은 통찰과 깨달음을 준다고 생각한다. '고난 속 신의 침묵'이 '기도 응답 속 신의 임재'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예를 들면 '왜 악이 득세하는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이 고난받는 이유가 무엇인지', '왜 항상 정의가 승리하지 않는지',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은 고쳐지지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근본적인 질문 앞에서 기독교인은 마땅히 대답할 논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사실 대다수 기독교인이 이런 이슈에 관심조차 없는 경우가 더 많다).

아무리 이 세상 부조리와 모순에 관심이 없고 자신의 삶과 자기가 다니는 교회 활동에만 관심 있더라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과 재난은 예외 없이 닥쳐온다. 그리고 그 고난과 재난 속 신의 침묵은 '기도 열심히 하고 성경 열심히 읽고 교회 봉사 열심히 하면 복 받는다'는 단순한 은혜와 축복의 원리가 지배했던 인생을 혼란과 고통이 가득한 회의의 세계에 던져 버린다. 쉽게 답을 찾을 수 없는 데서 오는 회의와 번민은 지금까지 그가 믿고 의지했던 삶의 원리를 송두리째 흔들어 버린다. 고난 속 신의 침묵은 신앙인을 '정답이 있는 온실 속 신앙'에서 '정답이 없는 현실 속 모순과 고통'으로 옮겨 놓는다.

그런 위기 순간에 우리는 '침묵하는 신' 앞에 계속 억울함을 토로하며 따지듯 묻는다.

'왜 하필 나입니까?'

내 삶에도 그런 고통과 회의의 시간이 참 길었다.

인생의 고통에 대답 못 하던 시절

내가 '응답받지 못한 기도'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경험 때문이다. 오랫동안 가장 간절하게 기도했는데 끝내 응답받지 못한 아픈 기억이 있다.

나는 대학교 1학년 때 친구가 건네준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톨스토이의 참회록>은 부러울 것 없는 인생의 성취를 이뤄 낸 한 인간이 '삶의 의미'에 대한 회의에 빠져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로 치열하게 고민하고 방황하다가 결국 '신앙적 회의'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설득력 있고 진솔하게 그려 낸 책이다. 내가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신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고백하게 만들었다.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 쉰의 나이에 나를 자살의 직전까지 몰고 온 그것은 - 더할 나위 없이 간단한 질문, 모든 인간의 영혼에 깔려 있는 질문이다…대답을 얻지 못하고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그런 질문. 그것은:

'오늘이나 내일 내가 하는 일의 결과는 무엇인가?
아니, 내 인생 전체의 결과는 도대체 무엇인가?
내가 왜 살고 있으며, 무엇 때문에 무언가를 희망하거나
무언가를 하고 있는 걸까?'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렇게 된다:

'내 삶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를 기다리는 저 죽음도 파괴할 수 없는 어떤 의미가?'"

- 톨스토이 <참회록> 중에서

나를 신앙의 늪(?)에 빠지게 한 몹쓸 할아버지.

그리고 6개월 후에는 어머니를 전도하여 같이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주 사소한 기도를 해도 모두 다 응답이 되는 신비한 체험을 연속으로 경험했다. 책을 통한 지적인 설득이 기도 응답을 통한 경험적 확신으로까지 발전하며 '신의 실존'을 그 누구보다 열렬히 믿었다. 신과의 뜨거운 첫사랑의 기간이었다.

이런 신앙적 첫사랑의 달콤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얼마 후 어머니가 신비한 예언의 능력을 받은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어떤 이미지가 구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누구의 목소리가 구체적으로 들리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며 어머니의 이야기를 대충 흘려들었는데, 점점 더 그런 체험을 이야기하는 빈도가 늘어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환상이나 환청이 어머니 주변의 모든 사람을 불신하고 관계를 파괴시키는 이야기로 발전하는 것이었다. 급기야 어머니 주변의 모든 사람(친척, 친구, 교회 교우들, 내 친구들까지)이 작당하여 어머니를 모함하고 음해하는 하나의 세력이 되는 이야기로까지 발전해 갔다.

결국 2년 넘게 어머니가 왜 저러는지 이해를 못 하다가, '기독교인의 정신 질환' 세미나에 참석하고서야 어머니가 망상형 정신분열증(조현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미나에서 발표하는 임상 사례의 아주 디테일한 부분까지 어머니와 똑같아서 그제서야 어머니가 심각한 조현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당시 내가 참석했던 세미나는 기독교인의 정신 질환 관련 활동을 하고 있는 '한마음치유공동체'의 세미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증세를 알고 나서 어머니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기까지 무려 15년이 걸리게 될 줄은 몰랐다. 어머니의 망상을 심화시키는 조현병은 결국 어머니에게 남은 마지막 신뢰 관계였던 나와의 관계마저 파괴했다. 내가 회사를 출근해도, 당신께서 잠시 집을 비우면 내가 몰래 집에 숨어들어 어머니가 아끼는 물건을 도둑질하거나 해를 가하려 한다는 망상의 수준까지 발전했다.

게다가 이런 피해망상에서 비롯되는 어머니의 격렬한 공격성과 집요한 집착은 주변 사람뿐 아니라 나에게도 심각한 피해와 정상적인 가정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파국을 불러왔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강제로 병원에 입원시키기 위해 몇 차례나 119를 불러 봤지만, 격분한 어머니가 주체할 수 없는 공격적 반응을 보여서 병원으로 데려갈 수조차 없었다.

다른 친척 모두 어머니 상태에 질려 버려서 연락이 끊겼고, 나 혼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말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제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어머니가 제정신을 찾게 해달라고, 울부짖으며 기도했다. 참 오랫동안 기도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정말 심각하게 삶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다. 10여 년이 넘어가자,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어머니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지 않게 되었다. 그저 내가 이 상황을 잘 견디길 바라는 기도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치유를 포기하며 무디어지는 순간에도 하나밖에 없는 가족인 어머니와 더 이상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데서 오는 외로움은 특히 견디기 힘들었다. 고아가 아닌데 고아가 되어 버린 것 같은 아픔도 아픔이지만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그리고 '왜 하나님은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것일까'와 같은 신앙적 회의와 질문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후 '정신 질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발전해 각 지방 자치단체, 구청별로 '정신보건센터'가 생겼고 정신보건센터 도움을 받아 겨우 어머니를 믿을 만한 좋은 병원에 입원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내 신앙의 의문과 회의는 풀리지 않았다.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고백

간절한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결핍의 상태가 지속되면, 신앙에 대한 뿌리 깊은 냉소주의와 회의가 생긴다. 나에게도 그런 상태가 몇 년간 지속되었는데, 기적처럼 우연히 읽은 하나의 글을 통해 지난 십수 년간의 아픔과 신앙적 회의가 풀리고 위로받게 되었다. 그 글은 기독교 평화주의 사상과 신학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 교수의 강연 내용을 정리한 기사였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한나의 아이>(IVP)에서 비극적이고 아픈 가족사를 진솔하게 회고한다.

스탠리 하우어워스 교수는 풀러신학교 심리학부가 마련한 Integration symposium에서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냈다. 놀랍게도 그가 겪었던 일은 내가 겪었던 일과 너무 유사했다. 아내의 조현병으로 극심한 고통의 시간을 겪으며, 그 아픔 가운데서 어떻게 살아남았고, 삶을 유지했고, 아들을 키워 냈는지를 진솔하게 풀어낸 고백이었다.

"나는 아담과 내가 살아남아야 한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하지만 살아남는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달리기만 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나는 나와 같이 정신 질환자 가족을 둔 사람들을 위해 항상 문을 열어 두었다. 나 역시 그런 가족의 일원으로 겪는 상실감과 고독감과 절망감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은 나를 향해 무너져 내렸다. 이 약, 저 약을 시도해 볼 때마다 조금은 더 나아지겠지라는 희망을 가져봤지만 거의 대부분 그런 희망은 헛된 꿈으로 판명 나곤 했다. 만약 당신이 정신 질환자와 함께 산다면 희망이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점은 나도 잘 안다. 하지만 기대하지 않고 사는 방법을 익히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 그런 집에서는 5분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 짐작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조언은 이것이다. 만약 당신이 함께 사는 누군가가 정신 질환에 걸렸다면, 무엇보다도 중요한 첫 번째 임무는 당신이 살아남는 일이다. 당신이 살아남지 못하면, 모두 다 살아남지 못하게 된다. 살아남으려는 노력은 절대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인생이 계속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고 싶다면 살아남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라. 더군다나 조울증(bipolar)을 겪는 모든 사람들이 앤처럼 격심한 분노를 가지고 살아가게 되지는 않는다. 내가 결국 지쳐 쓰러졌던 것은 앤의 병이 아니라 앤의 분노였었다."

- "아들과 함께 살아남으려 몸부림쳤다" 기사 중에서

정신 질환자 가족이 겪는 아픔과 스트레스는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특히 멈추지 않는 분노와 끝없는 피해 의식 속에서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기분으로 평정심을 유지하며 일상을 지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직접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알 수 없다. 스탠리 하우어워스 교수는 자신이 그런 고통을 겪었으면서 자신의 아픔에 함몰되지 않고 정신 질환자 가족이 겪는 상실감과 고독감을 이해하고 위로하고 있었다.

특히 "무엇보다도 중요한 첫 번째 임무는 당신이 살아남는 일이다. 당신이 살아남지 못하면, 모두 다 살아남지 못하게 된다. 살아남으려는 노력은 절대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을 읽으며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외로움 속에서 제정신을 유지하며 살아남으려 발버둥쳤던 시간들이 생각나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지금까지 내 삶을 지켜보다가 건넨 따뜻한 위로의 말 같았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고, 네 아픔을 이해한다고….

그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나 또한 정확히 알 수는 없겠다. 하지만 그가 나보다 앞서 고통을 겪어 내고 살아가며 그렇게 버티어 준 것이 고마웠고, 진솔한 고백과 위로의 말을 남겨 준 것이 고마웠다. 그리고 스탠리 하우어워스 글은 나의 오랜 신앙적 고민과 기도에 대한 응답이 되었다. 그의 글은 내가 '응답받지 못한 기도'의 이유와 유익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진정한 기도 응답은…

기도 응답 간증이 넘치는 시대다. 각각의 내용은 다르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이러이러한 기도 응답을 통해 '물질적인 축복과 성공'을 줬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하셨다는 내용이 대세다. 그러나 이러한 응답이 가장 높은 수준의 기도 응답은 아닐 것이다. 물질적인 부요와 번영, 권력을 얻는 것이 기도 응답의 전부라면 이 땅의 기독교는 얼마나 천박해질까(지금도 충분히 천박하지만).

조용기 목사와 이명박 대통령. 교회 부흥, 부와 권력에 대한 기도 응답의 표상인 두 사람.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필요를 놓고 부르짖은 기도에 대한 응답이 수준 낮은 기도라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기도가 삶에서 필요한 것만 구하고 얻어 내는 데서 그친다면, 기도의 진짜 소중한 가치를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결국 기도 응답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가치이자 하나님이 원하는 목표는 '존재의 변화'가 아닐까.

우리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스스럼없이 구하고 욕망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 욕망 대상은 대부분 눈에 보이고 만져지고 측정되어지는 것들이다. 그런 '욕망의 대상'만 가장 가치 있는 것처럼 여겨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눈에 보이는 그 무엇'에 대한 결핍 충족이 기독교인의 가장 중요한 기도 제목이 되어 가고 있다. 많은 신앙인이 그런 가치관에 오염되어 잘못된 사고방식으로 살고 있다. 바로 '충분한 소유가 존재의 결핍을 대신할 수 있다'는 착각이다.

'충분한 소유'가
'존재의 결핍'을
대신할 수 있을까

신앙인들 또한 이런 사고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할 뿐 아니라, 여기에 오염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교회의 부흥=많은 교인 수 △좋은 기업=재벌 기업 △좋은 직업=돈 많이 버는 직업 △행복한 가정=돈 많은 가정 △좋은 남편=돈 많이 벌어 오는 남편 △좋은 자녀=성적이 좋은 자녀.

이런 예는 모두 '존재 됨이 소유함으로 치환'되어 동일한 가치라고 착각하는 것들이다. 충분한 소유는 꽤 능력을 발휘하고 편리하지만, 존재의 결핍을 채워 주지는 못한다. '존재의 결핍'은 오직 '존재 됨'으로만 채워야 한다. 돈 많이 벌어 오는 아빠가 '좋은 남편'이나 '좋은 아빠'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좋은 아빠는 아내와 아이에게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보여 주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아빠다. 그러나 많은 아빠가 바쁘다는 핑계로, 돈을 더 열심히 벌어야 한다는 명분으로 두둑한 용돈과 월급 봉투를 갖다 주며 '존재의 부재'를 '돈'으로 대신 채우려 한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교회 부흥은 '교인 수가 늘어나는 것'과 같지 않다. 그러나 많은 목회자와 교인은 '교회 부흥'을 '교인 수가 늘어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교인 수를 늘리기 위해서라면 '교회의 본질을 상하게 하는 행동'조차 서슴없이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동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교인 수를 늘리기 위해서라면, 이런 '눈높이 타깃 마케팅'을 하는 전도지도 서슴없이 뿌린다.

가히 '맘몬이 지배하는 시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배금주의가 판을 치는 때에, '기도의 응답'은 욕망하는 대상의 결핍을 채워 주는 '신의 능력'(램프의 요정 지니 같은) 정도로 잘못 이해되고 변질되고 있다. 그러나 차고 넘치는 물질적 축복과 소유는 '존재의 변화'와 그다지 큰 상관관계가 없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기도 응답이 '존재의 변화'라면, '넘치는 물질적 부요와 풍요'로 그 가치를 대신할 수는 없다. 풍요로움 속에서 '존재가 변화되고 다듬어지기'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니까.

고난과 결핍 속
다듬어지는 열매

성경 속 하나님은 항상 사람을 통해 기도에 응답하셨다. 사실 사람을 거치지 않고 그분의 전능한 능력으로 직접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수많은 순간에도 그는 그 상황에 적절한 '사람'을 보내셨고, 다듬어 준비시켰으며, 그를 통해 공동체의 고난에 동참하게 하고 구원해 주셨다. 결국 하나님이 준비한 최고의 기도 응답은 바로 동일한 '고난과 결핍 속에 빚어진 사람'이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삶은 그런 의미에서 내게 가장 필요했던 기도의 응답이었다.

우리가 흔히 착각하듯, 기도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만이 곧 '신의 임재'는 아니며 기도에 대한 장기간 침묵이 곧 '신의 부재'는 아니다.

진정한 기도의 응답은 소유의 변화가 아니라 존재의 변화다. '소유의 변화'는 단번에 가능하기도 하지만 '존재의 변화'는 예외 없이 충분한 시간과 인생의 경험이 필요하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닮은 인격과 사랑으로 변화되는 데는 '결핍과 고통'이야말로 필수 요소다.

왜냐하면 부족함이 없는 풍요로움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고통과 결핍은, 견고한 '자기만의 세계'에 아팠고 깨어졌던 크기만큼 '타인의 아픔'에 같이 울어 줄 수 있는 '공명의 공간'이 생겨나게 한다. 타인의 아픔과 고통에 같이 아파할 수 있는 공감 능력과 사랑은 오직 '고통과 결핍'의 눈물 속에서만 싹튼다.

인류의 구세주였던 예수님의 가장 큰 특징도 결국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대다수 평범한 인간이 겪는 고통과 결핍의 생생한 체험자가 되어 주신 '성육신'의 은혜 아니었던가?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 이사야 53장 3-4절(새번역)

'모순과 신비'를 이해하는 신앙

오랜 기간 '고난과 결핍'으로 다듬어진 사람은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뀐다. 고난과 결핍 속 신의 침묵으로 빚어진 사람은 몇 가지 원리로 규정되거나 해석될 수 없는 '삶의 불가해한 신비'가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들은 인간의 삶이 단순하게 판단되거나 분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순과 신비'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삶의 결핍과 모순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고 살아 내는 것만으로도 한 인간의 삶이 얼마나 위대한지 헤아리는 성숙함과 사려 깊음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삶을 분석하고 정답을 찾아내는 것'보다 '삶의 모순 속에서 살아 내는 것'이 더 위대하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그러나 교회 생활을 오래 한 교인일수록 놀랍게도 '욥의 친구들'과 같은 단순한 신앙의 원리로 중무장한 경우 꽤 많이 볼 수 있다. 그들에게는 '삶의 정답과 원리'가 분명하게 보인다. 그래서 사업이 실패하거나, 결혼이 실패하거나, 사고를 당하거나, 건강을 잃게 되는 비극을 누군가가 겪으면 그들은 단숨에 그 원인이 무엇인지 간파한다.

'새벽 기도를 등한시했다', '주일성수를 빼먹었다', '교회 직분에 게으름을 피웠다', '십일조를 하지 않았다', 기타 등등. 그들이 보기에 '고난의 원인'으로 짐작되는 '신앙적 결격사유'를 고통받는 이들의 삶에서 잘도 찾아낸다. 그래서 그가 속히 회개하고 회복되길 원한다며 '확신에 찬' 조언과 지적질을 서슴지 않는다. 그러면서 고난을 당한 이웃과 동료 교인 가슴에 이중 삼중의 상처를 주며 대못을 박는다. 마치 욥의 친구들처럼….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는 2005년 1월, "남아시아 지진해일로 수십만 명이 사망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설교한 바 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그러나 오랜 기간 고난 속 신의 침묵에 연단된 신앙인은 타인이 당한 '고난의 원인'을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다. 그가 당한 고난의 원인을 분석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것보다, 그가 지쳐 쓰러지지 않도록 곁에 있어 주는 것이야말로 그에게 가장 필요한 사랑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실천한다.

삶의 불가해한 모순과 신비를 이해하는 신앙인들은 그렇게 이웃의 아픔과 고난을 위로하는 법을 배우며, 현실 속 수많은 불의와 모순과 부조리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무엇인지 배운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나간다는 것이 흔히 착각하듯 '교회 안에 신자들만의 천국’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고통받는 자신의 곁에서 '묵묵히 동행하신 하나님' 처럼, 이해할 수 없는 아픔과 비극의 현장에서 '그분의 사랑으로'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신의 존재가
누군가의 기도 응답

내게 있는 결핍과 고통의 상황 속에 묵묵히 내 곁을 함께 걷는 그분의 임재를 느끼는 것은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성숙한 신앙의 경지일 것이다. 자신의 고통스런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지만 여전히 나와 함께 동행하는 그분의 임재를 느끼는 순간, 우리들은 신의 임재와 축복을 나의 소유나 내가 처한 상황과 연결시켜 생각하는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더 깊은 신의 섭리와 임재를 이해하고 체험하는 신앙의 경지로 나아가게 된다. 어쩌면 이 신앙의 경지야말로 '시편 23편'에서 다윗이 노래한 축복이 아닐까.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 23:6)

커다란 결핍과 고통에 빠진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것은 아름답고 귀한 선물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위대한 선물은 고난받는 이웃 속에 함께 거하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고통과 결핍의 현장에 동참시키며 함께하는 것보다 더 위대하고 아름다운 선물은 없다. 존재를 대신할 소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항상 하나님은 고통과 결핍으로 빚어진 '당신의 사람'을 통해 고통받는 이들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응답받지 못한 기도'로 불면의 밤을 보내며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진실은 이런 것이 아닐까.

당신이 고통 가운데 부르짖어도 침묵하시는 하나님은 당신을 외면하신 게 아니라 당신과 함께하며 당신을 다듬고 계신 것이다. 당신이야말로 결핍과 고통의 현장 속에 가장 소중한 신의 선물로 선택된 사람이기에, 당신의 존재가 고통받는 이들의 기도 응답이 되기 위해서….

예수의 삶이 그러했던 것처럼.

기독교인의 정신 질환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정신 질환'에 대한 이해가 높지 않은 사회 분위기를 감안하더라도, 기독교인의 '정신 질환'에 대한 이해와 대응은 더욱 무지하고 열악하다 할 수 있습니다. '정신 질환'으로 시달리는 신앙인의 문제를 '영적인 문제'나 '귀신 들림'으로 단정지으며, 전문적인 상담과 치료를 받는 방법을 선택하기보다 신앙적으로만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정신 질환은 신앙적인 접근만이 아니라 전문적인 치료가 시급한 질환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2013년, 미국 새들백교회 릭 워렌 목사의 아들 매튜 워렌이 수년간 우울증을 앓아 오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으로 많은 이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릭 워렌 목사는 허핑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정신 건강 체계는 붕괴됐으며, 기독교인들이 다양한 정신 질환으로 고통받는 수백만의 사람들을 끌어안아야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기독교인의 정신 질환'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관련 세미나와 사역을 꾸준히 해 온 단체로 송탄 신경정신과 차준구 박사님의 '한마음치유공동체'가 있습니다. 위의 글에서도 밝혔듯이 저도 이 단체의 세미나를 통해 어머니가 전문적인 치유가 필요한 정신 질환의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전국 지역 자치단체별로 '정신보건센터'가 있어서, 상담과 안내를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잘 정비되어 있으니 가족 중에 그런 질환이 의심되는 분이 있다면 얼마든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저 또한 정신보건센터에서 상담과 안내를 받아서 어머니를 믿을 수 있는 전문 의료 기관으로 모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신앙인이 '정신 질환'에 걸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이 꽤나 많습니다. '정신 질환'에 대한 무지와 오해로 더욱 그런 생각을 하는 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정신 질환'은 영적인 문제나 신앙적인 문제가 아니라 누구나 걸릴 수 있는 '병'이라고 이해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신앙적으로 건강한 믿음을 갖고 있더라도 누구나 '감기'에도 걸리고 '암'도 걸릴 수 있는 것처럼, '정신 질환'도 그렇게 여기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정신 질환' 문제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드러내어 신속하게 전문적인 도움을 받게 할수록 환자와 가족들의 치유가 빨라집니다.

정신 질환은 방치할수록 그 병을 앓고 있는 당사자뿐 아니라 가족들의 고통도 커지기에 '정신 질환'이 의심된다면 전문적인 치료를 받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정신 질환'은 발병 이후 신속한 대처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발병 이후 빨리 치료를 받게 할수록 완치될 확률도 높아지고 상태도 많이 호전됩니다.

또한 가족 중에 정신 건강이 의심이 되는 분이 있거나, 본인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 여겨질 때 목회자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보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를 권합니다. 목회자도 '정신 질환'이나 '우울증'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아서 섣부르게 '귀신 들림'이나 '영적인 문제'로 몰아가는 사례가 많습니다.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라는 말도 있듯이, 정신 건강에 문제가 있을 때는 목회자를 의지하기보다 의사를 찾아가시기를 권합니다. 모든 문제를 신앙적인 문제로 오해해서 치료의 시기를 놓치거나 고통의 시간이 길어지는 신앙인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현실에서는 정신 건강에 문제가 있어 시달리는 많은 사람이 있는데, 교회와 신앙인에게 정신 질환에 대한 이해가 열악하고 무지한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인의 정신 질환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전문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교회와 기독교인이 더욱 많아지길 바랍니다.

- 정부 정신 건강 사업 안내 정보(정신건강증진센터 운영 안내, 아동·청소년 정신보건 사업, 자살 예방 및 자살 예방 센터 운영, 마약류 중독자 치료 보호 사업, 정신 질환 편견 해소 및 인식 개선, 사회 복귀 시설, 정신 요양 시설 운영, 정신 의료 기관 운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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