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나쁜 하나님' 소개의 말

오늘의 한국교회는 정치적 타락, 종교적 부패, 신학의 허약함으로 인해 파산 직전에 몰려 있습니다. 이는 명백히 신학, 신앙, 교회의 위기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 너머에 치유를 위한 열망 또한 숨 쉬고 있음을 부정해선 안 될 것입니다.

치유와 소생의 가능성을 경험하기 위해 오늘의 한국교회를 지배한 기복과 왜곡된 순수의 풍경을 동시에 전망하는 문학적 시도는 어쩌면 필연이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이러한 시도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교회의 본령을 회복하는 사상적, 신학적 갱신 의지와 흐름을 같이한다고 확신합니다. <뉴스앤조이> 연재 소설 '나쁜 하나님'은 한국교회의 궤멸적 징후를 극사실적으로 해부하고 그 너머의 희망, 치유, 소망의 가능성을 함께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 소설가 주원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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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사님.

민규를 먼저 부른 건 김정은이었다. 서둘러 도망치듯 나온 피아노 반주자 김정은의 뒤를 따라 나온 민규였다. 하지만 그렇게 나온 뒤에도 바로 김정은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지하에 있는 소예배실에서 나온 김정은은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섰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녀의 뒤를 따라 나온 민규는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지만 그 순간 할 말이 없어졌다.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엄두가 안 났다고 하는 게 정확한 민규의 마음이리라.

눈이 마주친 다음 어색한 침묵의 벽을 먼저 깬 건 정은이었다. 정은이 민규를 '목사님'으로 부른 순간, 민규의 마음에선 두 가지 생각이 회오리처럼 뒤엉켰다. 청년부 시절, '야', '너', 그도 아님 '민규', '정은'으로 부르던 막역한 사이에서 이제는 목사님과 성도의 관계로만 봐야 하는 어색함이 그 하나였다. 하지만 반대로 이 거리감이 없다면 정말 정은과는 최소한의 대화도 불가능해질 거란 안도감이 교차했다. 그렇게 민규의 머리와 가슴속에서 묘한 심정의 충돌이 일어나던 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정은이 먼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문을 열었다. 엘리베이터 문 밖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민규를 보며.

- 안 타실 거예요, 목사님?

일러스트레이터 주원태

정은의 그 말은 민규의 귀에 함께 탑승하자는 제안처럼 들렸다. 정은의 말을 들은 민규가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서자 문이 곧 닫혔고, 둘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지하 2층 소예배실에서 지상 1층으로 올라서는 동안이었다. 그 시간이 민규에겐 숨 막히는 순간으로 다가왔다. 침묵의 베일을 벗겨 낸 건 이번에도 정은이었다. 정은은 자신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는 민규와 다르게 머리 하나 정도는 큰 키의 그를 당돌할 수 있을 만큼 당당하게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민규 역시 정은을 보다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14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오랜 시간의 풍상을 입은 것만큼이나 더 심대한 변화가 그녀의 인생을 두고 휘몰아쳤을 것이다. 하지만 민규의 눈에 들어 온 정은은 세월을 잊은 14년 전 모습 그대로였다. 청년부 예배를 마치고 예배실 밖을 향하며 성경, 하나님, 진실에 대해 진지하게 묻던 맑게 빛나던 눈동자와 표정 그대로였던 것이다.

- 목사님.

- 예? 예.

- 오신 걸 환영해요.

- 예?

- 이곳, 율주제일교회로 돌아오신 걸 환영한다구요.

- ………

- 진심으로… 기뻐요.

'진심으로… 기뻐요. 진심으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 절반쯤 개방되어 있는 교회 정문이 보였다. 스테인드글라스로 화려하게 장식된 율주제일교회의 정문은 지나칠 정도로 높고 웅장했다. 그 웅장한 문을 오가는 순간, 정은과 민규는 그 문의 출입을 함께했다. 둘은 다시 침묵했지만, 서로가 서로를 외면하지 않았고,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보폭을 함께하며 걸어 나갔다. 이 순간 민규는 마치 시간을 잊은 듯했다. 14년 전 청년부 예배를 파하고 교회 정문을 함께 걸어 나오던 그때 그 기분 그대로였다.

하지만 정은과 함께 걷던 민규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 생각을 쉬 지우지 못했다.

'진심으로 기쁘다고?' '과연 정은이 그럴 수 있을까.'

그러한 마음은 민규로 하여금 두려움과 죄책감을 낳았다. 정은은 자신의 얼굴을 당당하게 볼 수 있지만 민규는 그렇지 못했다. 자신이 14년 전, 정은에게 보여 준 무책임과 비겁함이 민규의 마음을 무겁게 내리눌렀기 때문이다.

민규가 마음의 죄책감을 쉽게 내려놓지 못할 때와 흐름을 같이하듯 새벽 2부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 정문으로 걸어오는 적지 않은 시간 동안이었다. 그때, 여자 집사와 권사들의 곱지 않은 시선이 파고들었다.

민규는 그 따가운 시선이 자신만의 예단이 아닌 것을 실감했다. 정은과 나란히 걷는, 때문에 둘이 함께 걷는 동행으로 예측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바라보는 새벽 예배 참여 교우들의 시선은 가혹할 정도로 차가웠다. 질타와 원망, 두려움과 경계로 뒤엉킨 교우들의 시선이 표적처럼 파고들었다. 그런데 그 대상은 민규가 아니라 정은이었다. 민규는 조심스럽게 교우들의 따갑게 파고드는 노려봄의 대상이 된 정은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정은은 교인들의 냉대와 경계의 시선에 대해 오래된 내성을 지닌 듯 태연하게 반응했다.

- 왜… 이러지?

민규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말을 뱉었다. 김정은이 태연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 뭐가요?

- 저기. 정은 씨.

어떤 표현이 적당할까를 쉼 없이 고민하던 중 내뱉은 마지막 말은 결국 '~씨'였다. 그 호칭을 뱉은 뒤 민규는 바로 호칭을 정정했다.

- 미안요. 미국에서의 습관이 남아 있어서. 김정은 선생님.

그 사이사이에도 새벽 예배 참여 교우들의 따가운 시선은 계속해서 민규를 괴롭혔다. 아마도 정은은 민규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한 눈치였다. 정은이 말했다.

-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아요.

- 뭘?

- 뭘 묻고 싶어 하는지 짐작한다고요. 권사님들, 집사님들의 시선이요.

- 김 선생…

- 알고 싶으세요? 저들이 왜 이러는지?

김정은의 시선이 민규의 마음속 깊이 파고들었다. 순간, 민규는 어떻게 해 볼 겨를도 없이 14년 전 겨울의 자신으로 되돌아갔다. 14년 전에도 민규는 정은으로부터 같은 말을 들었다. 일방적인 헤어짐을 통보받던 정은이 물었던 질문이 민규의 기억 속에서 다시 되살아났다.

'알고 싶어. 민규 씨. 왜 이러는지… 알고 싶어.'

(계속)

*'나쁜 하나님'은 주 3일(월, 수, 금) 업데이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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