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것이 왔다.

몇 년 전부터 '종교개혁 500주년이 곧 다가온다,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와 같은 이야기를 교계와 관련된 자리에서 수차례 들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지나더니 바야흐로 종교개혁 500주년이 오고야 말았다.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를 논의하던 수많은 단위에서는 무엇을 준비했을까. 해가 바뀌어 2017년, 그리고도 1/4분기를 마감하는 이때, 현재 우리는 개혁을 위한 초 한 자루라도 밝히고 있는 것일까.

글을 마무리하려는 지금. 1,073일 만에 인양된 세월호, 박근혜 검찰 조사 후 구속 여부에 대한 미디어 기사가 홍수를 이룬다. 한편 명성교회가 소속된 서울동남노회 일부 목회자가 변칙 세습 시도를 반대한다는 성명을 내었다는 소식도 들린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기독교 관련 소식은 그렇지 않아도 암울한 이 사회에 더 깊은 어둠을 드리우곤 한다.

20주를 밝혀 온 광장의 촛불, 전 세계 그 어느 곳에서도 없었다는 2017년 촛불 혁명 과정에서 우리는 어둠을 몰아내는 빛의 희망을 경험했다. 하지만 동시에 또 다른 광장에서 들려오는 광기 어린 외침 속에서 우리는 기독교의 또 다른 얼굴과 조우해야만 했다.

종교개혁이 절실한 때라고 누구나 입을 모아 말하지만, 95개조, 아니 대형교회마다 찾아가서 950개 조문을 정문 앞에 붙인다 한들 과연 개혁은 가능할 것인가. 나 역시 종교개혁은 이제 불가능하다, 교회 개혁은 물 건너갔으니, 이제 다 같이 망하는 수밖에 없다고 읊조리며 패배주의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지.

종교개혁의 3대 정신은 매해 종교개혁 주일마다 강단에서 되풀이되고 있건만 정작 오늘날 한국교회는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오직 은혜로만(Sola Gratia),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인해 망해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직 성경으로"는 축자영감설과 성경 무오설을 지탱하는 도구로 전락해 있을 뿐이다. 한국교회만큼 각종 성경 공부가 발달하고, 성경 통독이 일상화되어 있는 곳이 또 있을까. 이 둘의 폐해는 자명하다. 같은 교회에서 똑같이 성경을 읽고 있는 여성은 쉽게 비하되고, 무시당한다. 여전히 여성 안수는 어불성설이라며, 성경에 여성은 잠잠히 있으라고 되어 있다며 밑줄을 쫙쫙 긋는다. 성소수자를 돌로 쳐서 죽여도 되는 존재들로 여기면서도 양심에 거리낌이 하나 없다. 이슬람을 비롯한 이웃 종교인들은 여전히 사탄이자 마귀요, 우리의 적일 뿐 웬만하면 이 땅에 발도 못 들이기를 바라기도 한다. 성경에 대한 질문은 용납되지 않을 뿐 아니라, 성경은 앞뒤 맥락 없이 필요한 구절만 가져다 쓰는 뽑기 기계처럼 이용될 뿐이다.

"오직 은혜로만"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횡포 앞에 무력한 신앙인을 양산했다. 기복주의와 물질만능주의에 찌들어 온갖 썩은 내가 진동하고 있음을 주변 사람들은 이미 알아차렸는데도 교회는 여전히 '더 많이', '더 빨리'를 외치며 성공주의에 대한 찬사를 아낌없이 보내고 있다. 그리고 이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라고 강조한다. 설사 일상에서 매우 소박한 은혜를 경험했다고 해도, 그 은혜는 곧 화폐 단위로 환원되어야 한다. '헌금'을 내지 않으면, 혹 온갖 불행이 닥쳐온다. 하지만 '헌금'을 유용하고 재정운영을 투명하게 하지 않는 것은 하등 문제될 것이 없는 '은혜로움'의 영역일 뿐이다. 이런 엉터리 은혜가 대량생산되어 유통되고 묵인되고 있다.

"오직 믿음으로"는 신앙과 일상생활이 연결되지 않아도 된다는 면죄부를 남발했다. 표리부동한 신앙인들을 양산해 낸 것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 정신을 내세운 대형 기업이 시간당으로 임금을 쳐줘야 하는 아르바이트 노동자들 임금을 착취해도 이를 준엄하게 꾸짖고 퇴출시키는 데 앞장서는 목사나 교회는 드물다. 삶에 체화되지 않은 믿음은 교회 안에서는 순한 양과 같이 지내다가도 교회 밖 한 발자국만 나가면 가면을 벗어 버리고 내 밥그릇에서 한 숟가락이라도 덜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는 탐욕스러운 본래 얼굴을 드러내는 교인을 양산했다. 그래서 이제 기독교인이라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너도나도 꺼려 하는 존재 영순위가 되었다.

몇 년 전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대학가를 휩쓸며 뜨거운 호응을 받은 적이 있다. 철도 민영화에 저항했던 4,000여 명의 노동자가 해고되었던 사건을 계기로, 세상 돌아가는 것에 무관심한 채로 외면하고 살아도 우리는 '안녕한 것인가' 되묻게 한 것이다.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바로 이 '안녕들 하십니까' 교회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평안들 하십니까'라는 되물음이 필요하다.

많이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세월호 참사와 촛불 혁명은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깨어나는 대각성의 계기를 가져왔다. 그뿐 아니라 해고 노동자들이 농성을 하던 천막이 공권력에 의해 부서지는 거리에서, 무차별 물대포 발포로 힘없는 농민 어르신이 쓰러져 사경을 헤매며 장기간 입원해 계셨던 병원 인근에서, 작은 가게 하나 열어 하루 먹을거리를 챙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여기는 영세업자들의 리어카 좌판이 재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빼앗겨 버리는 저 어느 골목길에서, 그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한 장소 인근 지하철역에서, 이곳저곳에서 성소수자는 존재 자체가 병균덩어리요, 음란 귀신에 씌운 악한 자들이요, 사회악이라며 온갖 가짜 뉴스를 양산해 유포하는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며 인적이 드문 조용한 산골 마을에 송전탑을 세우고 미사일을 들여놓겠다며 순식간에 쑥대밭을 만들어 놓는 비극을 마주 대하며 많은 기독교인은 우리가 평안하지 않음을, 이제껏 거짓 평안을 강요당하며 지내왔다는 것을 고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세월호 참사 때 눈물을 흘리며 외쳤던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라는 다짐이 이제는 교회에서 울려 퍼져야 할 때다. 교회 개혁을 진심으로 바란다면 가만히 있지 마시라.

교회 직분으로 계급을 만들어 서열화하고, 양극화된 빈부 격차를 타파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부를 과시하고, 가난한 자에게는 사회구조의 근본적인 변혁 대신 자비라는 이름으로 시혜를 남발하는 교회에서 가만히 있지 말라.

차별이 없다는 복음의 선언을 제 마음대로 각색해 여성, 장애인, 이주민, 성소수자 등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정당화하는 교회에서 가만히 있지 말라.

교회의 주요 의사 결정 과정에서 여성과 청년, 그리고 청소년을 배제한 채, 50대 이상 혹은 60대 이상의 가부장만이 주요 결정을 내릴 수 있으며 그러한 권리를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양 호도하는 교회에서 가만히 있지 말라.

그 가부장들이 함부로 여성을 대하고 성추행, 성폭력을 일삼아도 침묵하고 방조하는 것이 은혜로우며 하나님이 다 알아서 심판하실 것이라고 가르치는 교회에서 가만히 있지 말라.

왕조 신학에 길들여져 지배와 착취의 전쟁을 성전이라 칭하며 숭미주의의 극치를 보여 주는 성조기를 흔들며 하나님, 예수는 왕이요, 주의 종인 목사도 왕이라며 성직중심주의를 당연하게 여기는 교회에서 가만히 있지 말라.

성경에 대한 질문을 불신앙의 상징으로 취급하고 신자의 귀와 입을 막은 채로 순종이 제사보다 나으니 무조건 믿으라고 하는 교회에서 가만히 있지 말라.

500년 전 종교개혁사에서도 개혁에 적극적인 여성들이 어떻게 소외되고 배제되었는지 드러난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증가하고 있다는 나라에서, 500년 전 개혁의 기치를 내걸 게 한 교회의 부패상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그때나 지금이나 여성들이 배제되고 지워지는 이 현실에 참담해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말하는 "개혁"은 그저 립 서비스에 지나지 않는다.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채교회 앞에 붙였던 95개조 반박문으로 종교개혁의 불이 붙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반박문을 제대로 읽어 보게 한 교회들이 있을까.

-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필요한 사람에게 꾸어 주는 것이 면죄증을 갖는 것보다 선한 일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 왜냐하면 사랑은 사랑을 베푸는 일로 성장하고 그 인간은 선을 행하는 사람보다 선하게 되지만, 면죄증은 보다 선하게 되지 못하고 다만 형벌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뿐이다.

- 가난한 사람을 보고도 본체만체 지나 버리고(요 3:17 참조) 면죄를 위해서 돈을 바치는 사람은 교황의 면죄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산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 그것이 현세적인 보화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왜냐하면 많은 설교자(면죄증 판매인)들이 이와 같은 보화를 나누어 갖지 않고 도리어 쌓아 두려고만 했기 때문이다.

- 또한 오늘날 제일 부자의 재산보다도 더 많은 재산을 가진 교황이 가난한 신자의 돈으로 행하는 대신 차라리 자기의 돈으로 성베드로교회당쯤은 세울 수 있지 않는가.

종교개혁 500년 후 아시아에 위치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우후죽순 교회가 난립한 채로 교권을 휘두르며 쌈박질이나 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수백 개의 성베드로교회당을 짓느라 재물을 쌓아 두기만 하고, 재물과 함께 하나님의 진노가 쌓이고 있다는 것을 간과한 채 성도들을 겁박하고 불안감을 조성하는 종교 사기단이 판을 치리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교회의 거듭남을 위한 열쇠는 깨어난 평신도들에게 주어져 있다고 감히 목소리를 내어 본다. 목사들이 망쳐 놓았으니 목사들이 개혁하고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은 일견 일리가 있는 듯하나, 자기모순에 불과하다. 체화되지 않은 개혁만을 부르짖는 목사들에게서 어찌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는가 말이다.

- 그런고로 그리스도의 백성을 향하여 평안도 없는데 "평안", "평안" 하고 부르짖는 예언자들은 다 물러가라. (겔 13:10, 16 렘 6:14, 8:11 살전 5:3)

- 이같이 하여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위안에 의해서보다 오히려 많은 고난을 통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데 더욱 깊은 신뢰를 가지게 하라. (행 14:22)

새롭게 채워져야 할 개혁의 의제들은 산적해 있지만, 이 두 가지만 제대로 교회에서 가르쳐도 교회의 재구성에 희망의 빛이 비추어 오지 않을까!

종교개혁 500주년에 대한 되새김질과 개혁에 대한 열망이 사과나무 아래에서 저절로 열매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입만 벌리고 있는 무익한 행위만 남는 허망한 것이 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기독교 적폐 청산 없이 새 시대는 결코 오지 않는다.

임보라 / 섬돌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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