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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 교회의 징조
[이제는 바꿔야 할 교회 윤리] ⑤민주적 능력
  • 박충구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7.03.13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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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사순절이 다시 시작되었다. 잠시 물러서서 죄를 돌이켜 회개하고, 욕망을 겸허하게 내려놓으라는 계절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형편은 그러한 물러섬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같다. 일개 민주 시민으로서 우리 사회를 바라볼 때 바라보기가 정말 민망하기 그지없는 일이 적지 않다. 기독교 신자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박사모와 한패가 되어 좌파 척결을 외쳐 대며 태극기를 흔드는 모양을 보면 정말 민망하기 짝이 없다.

자세히 보면 태극기만이 아니라 미국 국기를 손에 들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스라엘 국기까지 들고 나오는 이들도 생겼다. 왜 이들은 박근혜 정권을 옹호하기 위하여 미국 국기를 들고, 이스라엘 국기를 드는 것일까. 태극기와 성조기, 그리고 이스라엘 국기까지 동원하는 이들의 정신적 배경에는 뭐가 있을까. 여기에는 한국 기독교의 왜곡된 정치신학적 특성이 묻어 있다.

추측하건대 그들이 성조기를 들고 있는 것은 미국이 기독교 국가라는 생각과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준 국가라는 점, 그리고 6·25 전쟁 중에는 우리 편을 들어 공산 정권을 막아 온 우방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속내 이면에는 '공산주의 타도'라는 연대 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국면에 반공주의적 연대의 정신이 모아지는 것은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하려는 세력을 종북, 좌파 세력으로 간주하고, 이들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에 적대적인 '공동의 적'이라고 규정한 결과라 판단된다. 심지어 이스라엘 국기를 들고 나온 것도 하나님의 백성이라 칭해졌던 고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민인 것처럼 자신들도 영적 새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면모로 보아 이들은 기독교 신앙을 이념적 우파로 자리매김하는 정치신학에 오염된 이들이다.

이들이 나누는 연대 의식은 하나님 편은 기독교 편이고, 기독교 국가인 미국과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도 같은 편이라 여기는 믿음에서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믿음의 연대와 적대적인 세력이 바로 교회에서 하나님의 원수라고 배운 바, 하나님의 원수는 곧 하나님을 부정하는 무신론적 공산주의 세력이다. 그러니 촛불 시위는 종북 좌파 세력에 이끌려지는 집단이라 간주하고, 종북 좌파 세력에 의하여 대통령이 위기에 처해 있으며, 대통령이 쫓겨나면 우리나라가 공산화될 것이라 우려한다.

태극기 집회에서 태극기를 망토처럼 두르고 나타난 어느 노변호사 주장은 이런 입장을 대변한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국민이 주권자임을 요구하는 민주화 운동은 좌파 세력의 책동이다. 이들은 좌파의 음모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기독교인이 분연히 나서야 한다고 믿는다. 대중화된 종교로 포장된 기독교의 경박한 정치철학이다.

전근대성의
포로가 된 기독교

법과 헌법을 무시하며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마치 철없는 정치 놀음으로 여긴 박근혜의 실정과 범법 행위를 헌법적 질서에 따라 탄핵하는 것이 왜 이들의 눈에는 좌파의 음모이며 혁명과 같은 것이라고 여겨진 것일까. 여기에는 전근대성에 사로잡힌 기독교의 정치신학적 후진성이 작용하고 있다.

첫째,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서구 사회에서 종교의 권위에 도전과 비판을 제기해 온 일련의 논의는 몇몇 이들에게서는 소위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틀로 규정되어 왔다. 자유주의 신학은 종교적 신화에 매달려 시대착오적 보수성에 천작하는 교회를 비판하고, 더 새로워진 합리적인 교회로의 이행을 요구했다. 이 요구를 다소 수용한 이들이 신학적으로 진보적인 입장이라 볼 수 있다. 반면 보수 교회는 이 요구를 사탄의 계략이라며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를 비판하는 세력으로 규정하고 이를 악마화했다.

부패한 교회에 대한 비판의 정당성을 애써 무시하며 절대 수용할 수 없는 것으로 규정했을 뿐 아니라, 이들의 후예들은 새로운 교리적 규범을 만들어 성서의 문자를 절대화하고, 비이성적 복종을 신앙의 본질이라 주장했다. 동정녀 탄생, 성서 무오설을 주장하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지 1만 년도 안 됐다고 우겨 댔다. 이들이 바로 소위 근본주의자들이다.

이들은 마르크스 사상이 제기한 종교 비판에 역정을 내며 공산주의를 하나님을 적대하는 세력으로 보고, 이를 대화와 타협이 불가능한 사탄의 책략이라고 규정한다. 문제는 이들이 이런 절대적 규정을 확대 적용하며, 타락한 종교에 대한 비판이나 진보적 사회 변화 요구까지 좌파로 모는 악습을 기독교 신앙과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기독교는 극우적이 된다.

둘째, 극우 기독교가 가진 역사 이해는 매우 조야하다. 17세기 중반 1,000년에 걸친 봉건 세계가 서서히 몰락하면서 서구 사회가 산업사회로 진입해 들어가는 과정은, 과거의 왕정 – 봉건적 지배 세력의 고된 몰락의 과정이었다. 산업사회는 과거의 신분적 사회질서에 집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산업사회는 개인의 노동 가치를 더 중시했기 때문이다. 하여 산업사회는 신분적 사회질서를 거부하고,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산업사회에서는 "누구 자식이냐?"라는 혈연적 신분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도리어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이냐?"라는 새로운 기준을 가지고 개인을 평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산업혁명의 여파로 상품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지자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자본주의가 발흥하게 되어 자본과 노동의 대립, 즉 개인의 노동을 값싸게 얻으려는 자본가의 탐욕과 인간다운 생존을 보장받으려는 노동자의 요구와 대립하게 되었다. 이런 격변기에 정치는 사회 내 힘을 분배하는 기술로 평가를 받아 사회 내 힘의 균형과 견제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사회적 불평등과 착취, 권력의 오용을 비판하면서 개인의 권리와 자유 그리고 평등을 주장하는 정치철학이 나오게 되었고, 이러한 새로운 시대적 흐름에 자유주의 신학은 동의를 보냈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신학은 과거의 세계관에 천작하고 있었던 교회를 비판하고, 더 도덕적이며 책임적인 교회로의 변화를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기독교 주류는 과거의 지배 세력과 결탁해 온 역사와의 단절을 선언하지 못하고 성서를 내세우며 왕정을 옹호하던 습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왕정이나 세습 권력을 비판하는 세력을 비성서적인 죄인들의 요구라고 비난했다.

셋째, 하지만 세상은 교회를 축으로 삼고 돌아가다 기독교 세계에서 이탈하여 새로운 가치 체계를 따라 변하고 있었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좌불안석이 된 집단은 기득권에 천작했던 봉건귀족들, 그리고 그들에 버금가는 권위와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성직자들이었다. 이들은 사회 변화의 길목을 가로막고 기존의 질서를 신적 질서라 옹호했다.

기독교가 오랫동안 간직했던 신정(神政) 정치적 이상은 하나님이 세우신 권력자가 죄인들을 억압하라는 신적 소명의 수행자로 간주하게 만들었다. 어거스틴의 두 도성설과 루터나 칼빈의 비정치적(종교적) 정치 이론은 정치권력이란 하나님이 죄인들의 죄 된 본성을 억압하기 위한 신적 기제라고 여기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세속 군주는 신민을 칼과 창(권력)으로 억압하라는 소명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신민은 하나님에게 복종하듯 이들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것이 종교개혁자들의 정치신학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신민은 반드시 거룩한 교회의 후견을 받아야 할 죄인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지배자 편에 섰던 것이다. 이런 흐름에 이견을 제기하고 교회의 현존 질서 유지적 신학과 질서 이론을 비판한 신학이 소위 자유주의 신학의 정치신학이다.

넷째, 사실 전근대적 신학적 유산에 집착하는 기독교적 정치 이해에는 민주주의를 이해할 소지가 없었다. 왜냐하면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 후 1세기에 걸쳐 기록된 성서는 민주주의 사상을 명시적으로나 암묵적으로 일러 주지 않기 때문이다. 성서에 나오는 정치적 텍스트는 근본적으로 왕정 체제나 봉건적 사회질서에 적합한 이론을 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현대 세계 속에서 시대착오적으로 성경만 들고 있는 이들의 정치이론은 전근대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종교개혁자들의 정치신학에 따르면, 18세기 이후의 사회혁명기에서 민중의 절박한 요구가 된 민주화의 장애였다. (간혹 기독교가 민주주의 형성에 기여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 경우는 소수의 진보적 교회 지도자나 사상가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다.) 성서는 왕정 체제를 옹호해 주는 이야기들만 가지고 있어서 민주주의적 가치나 질서에 대해서는 침묵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서만 절대시하는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는 다분히 전근대적인 지배 체제를 옹호하는 종교다. 이런 태도를 명시적으로 지지하는 구절도 있다.

이런 성서 해석에 근거하여 정치적 이슈를 해명하면, 지배 권력은 신적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 예컨대 로마서 13장 1절, "각 사람은 위에서 난 권세에 복종하라"는 성서 텍스트는 권력자가 성경을 들고 국민들의 복종을 요구하며 하나님의 명령이라 교사할 수 있는 본문이다.

심지어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아니한 권세는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이 전하신 바라"라는 구절을 들이대면 평범한 신자들은 성서의 지엄한 권위를 부정하려 들지 않는 한 그 주장을 물리칠 방법이 없다. 이렇게 성서는 독재자를 편드는 본문, 권세를 가진 통치자의 편을 드는 책으로 읽히곤 했다. 박정희 정권도 기독교인의 복종을 요구하며 이 텍스트를 즐겨 인용한 사실이 있다.

다섯째, 이런 연유에서 성서 텍스트를 우상처럼 여기며 성서 무오설을 주장하는 근본주의 기독교는 세속 권력을 하나님이 내신 권세라 가르치며 신도들에게 그 권세에 복종하는 것이 곧 성서가 가르치는 바요, 하나님 뜻이라 가르치는 것이다. 성경의 무오(無誤)한 절대 권위를 강조해 온 보수적인 교회의 신자일수록 이러한 지침은 하나님이 "성경에 기록해 주신" 원칙이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것을 일러 주는 목사의 권위 역시 정치권력보다 한 수 더 높은 "위에서 난 영적인 권위"를 가지는 것이라 해석하는 어부지리를 얻는다. 목사가 제아무리 무식하고, 성범죄를 저지르고, 교회의 헌금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착복한다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종이니 신도들이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 태도가 바로 이런 성서 해석에서 나왔다.

오늘날 민주화된 사회에서조차 목사들이 이렇게 왜곡된 성서 해석을 고수하는 까닭은 신도들에게 전근대적인 절대 권위와 일시적으로 위임된 근대적 권위를 구별하지 못하게 만들어 자신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기 위한 것이다. 결국 정치권력에 대한 복종을 신자의 의무라 가르치고, 목사의 영적 권위에 대해서도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에서 벗어난 것은 사탄적인 것으로 매도된다.

이런 불신앙의 대명사는 보수 교회를 비판해 온 자유주의 신학과 사회 변화를 가로막는 기독교를 종교적 아편이라 규정한 마르크스주의, 곧 공산주의 좌파 세력이 된다. 그러므로 보수적인 신자의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신앙의 적은, 매우 단순하게 이념적으로 착색되는 것이다.

여섯째, 성서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고 그 안에 갇힌 보수적 신앙을 가진 이들은 권위주의적 정권, 그리고 권위주의적인 목사의 영적 권위를 동일한 선상에서 기독교 사회 이론의 철칙처럼 믿게 된다. 이런 오류에 쉽게 빠지는 까닭은 앞서서도 말했던 바와 같이 성서는 민주주의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딜레마는 사실 초기 기독교에서부터 드러나고 있었다. 기독교 사상의 기초를 놓은 4세기 말의 어거스틴이나 그의 멘토 격인 암브로시우스도, 심지어 기독교 대계를 세운 13세기의 아퀴나스조차도 세속 정치권력자의 책무와 그 한계를 규정할 수 있는 정치신학적 근거를 성서에서 찾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한결같이 로마의 정치철학자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106~43 BCE)의 정치권력 이해를 빌려와 정치가의 책무에 관해 설명하곤 했다.

요약한다면 "권력을 가진 통치자는 불의를 행해서는 안 되고, 사회 구성원 전체를 위한 정의를 세우는 책무를 가진 자"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권력자는 권력을 자의에 따라 행사하면 안 되는 것이며, 그런 오류를 범할 경우 그의 권력은 박탈될 수 있다"고 했다. 성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론이다.

그런데 "오직 성서로만"이라는 구호를 외치던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 로마 전통의 이성, 즉 철학적 지혜를 가급적 멀리하면서 오직 성서적 근거에서만 기독교인의 삶을 해명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정치신학에서는 퇴행이 일어난 셈이다. 개신교가 은근히 권력 신수설을 지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가르쳤던 그들은 하나님과 상관되지 않는 권력은 없으니, 비록 억압적 군주를 만나 신민들이 모진 시련을 겪을지라도 하나님이 세우신 권력자에게 복종하며 인내하기를 가르쳤다. 이렇듯 지배 권력을 옹호하는 습성을 가진 기독교의 비정치적 정치 이론은 현대 민주주의 사상과 갈등을 가질지언정 민주적 발전에 기여하기 어려웠다.

일곱째, 이런 까닭에 현대 민주주의 사상은 신학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세속 사회 사상가들에 의해 주도되어 형성되었다. 서구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을 옹호해 주던 억압 체제 안에서 기생해 온 기독교는 스스로를 언제나 지배적 위치에서 이해해 왔기 때문에 교회 안이나 밖에서 민주주의 사상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18세기 이후 거센 사회적 혁명기에 민중들이 절대 권력에 저항했을 때 상당수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득권을 옹호하려는 귀족들 편에서 사회 변화를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 규정하고 비난했다. 마치 오늘날의 태극기 집회를 배후에서 선동하고 조장하는 목사 집단과 하등 다름이 없었다.

그들은 당시에도 하나님이 내신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설교했다. 이들의 피를 이어받은 오늘의 보수적인 목사들은 "현 질서를 흔드는 민주 시민들의 요구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라고 설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민주 시민에게 공산화를 도모하는 친북, 용공, 좌파라는 프레임을 덧씌운다. 이쯤 되면 민주 시민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충실한 기독교인은 좌파들에 의하여 위기에 처한 조국을 지키려는 십자군을 자처하게 되는 것이다. 목사의 권위가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강한 대형 교회 신자일수록 이들의 행동 양식은 필사적이 될 수밖에 없다.

교회와 민주적 능력

모든 인간은 야만으로 태어난다. 야만으로 태어난 인간은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성장하면서 다양한 인식과 실천에 관해 학습하기 마련이다. 불행하게도 우리 국민은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왕조 사회의 가치 체계 안에서 살던 신민이었고, 30년전 까지만 해도 우리는 군사독재자에게 오늘날처럼 저항할 줄 몰랐던 백성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된 민주적인 투표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도 1987년도 체제 이후다.

근대 세계가 안고 있는 정신을 이해할 수 없었던 나이 든 노인들은 그저 5년에 한 번 투표하는 민주적 절차에 대한 학습조차도 몸에 익지 않았다. 민주주의의 의미라든지, 사회 공동체를 위한 정치권력의 중요성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나마도 온갖 연줄에 매이거나 감언이설 공약에 속아 소중한 표를 던져 버리는 이들도 적지 않다.

오죽하면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김기춘이 부산 어느 복집에서 했던 말 "우리가 남이가"라는 주장이 당연한 소리로 좌중에 전해졌겠는가? 낡고 낡은 전근대적 습성에 기댄 정치는 이처럼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서 청산되지 않았다. 그리고 기독교는 이런 전근대성을 은근히 조장해 온 셈이다.

그러나 그릇된 권위에 대한 도전은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근대화된 사회는 인간의 기본권을 확대해 나가는 운동의 일환으로 노동운동에서도, 학교의 전교조 운동에서도, 그리고 학생 운동권의 움직임에서도 그릇된 권위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국민의 민주적 권리 행사가 당연시되기 시작했다. 이런 움직임은 여성의 권리 운동으로, 새로운 차원의 인권 운동으로, 시민운동으로 펴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운동은 마침내 교회의 습성과 가치 체제 속에 담겨 있는 전근대적 권위의 산물들을 민주적 시각에서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을 직면한 일부 목사들은 자신들의 지적, 도덕적 무능과 부패와 타락을 영적 권위 아래 감추고 있던 자신들의 권위가 도전을 받는 것에 대하여 적지 않게 당황해했다. 이런 정황에서 나오는 주장은 이런 것이다. "기독교, 교회는 민주적인 것이 아니다!" 이 말을 바꾸면 이런 주장이 된다: "교회의 주인은 목사지 신도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주장은 100% 틀린 것이다. 개신교는 목사가 권위를 행사하는 제도로서의 교회(Kirche)에서 나온 신자들의 공동체(Gemeinde)이기 때문이다.

비민주적인 기독교를 주장하는 목사를 둔 교회를 살펴보면 참으로 경악스럽다. 남성들이 장악한 교권을 나누어야 한다는 여성들의 소리에 귀를 막고, 여성 목사는 안 된다며 여성 목사 안수를 거부하는 목사 집단도 있고, 교회 내 결정권에서 50%도 아닌, 겨우 30%조차도 여성에게 맡길 수 없다고 버티는 게 오늘날 한국교회 현실이다. 가부장적 남성 가치가 모든 강단을 지배하고 있고, 신학적 근거 없이 강요로 뜯어낸 헌금이 교회의 수입원이 되어 물신주의에 빠진 교회가 되었다.

민주적 다양성을 부정하는 폐쇄주의, 여성과 소수자의 평등을 부정하는 차별주의, 이념적 적대성에 빠진 사탄론, 사회 변화를 좌파의 요구로 매도하는 극우적 신앙 등으로 무장한 교회는 마치 늙고 진부한 과거의 유물 위에 올라타 좌파 척결의 창을 들고 시대의 변화를 거슬러 돌진하는 이 시대의 돈키호테와 다를 바가 없다. 돈키호테는 정의감과 진실성 있는 낭만이라도 있었으나, 이런 교회에서는 그런 것조차 찾아볼 수 없다.

이런 보수의 늪에 빠진 교회는 전근대성을 유통하는 동시에 낡아 빠진 시대착오적 질서를 옹호하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모래 위에 세운 교회가 되는 것이다. 신자들을 불평등하게 엮어 내는 '장로-권사-집사-평신도'라는 계급주의 사회로 교회를 전락시켜 온 것이다. 이 계급 사회는 신도들이 평등 의식을 가지게 되면 무너질 것이다. 이미 미국이나 독일에서는 무너졌다.

여성 신자가 70~80%를 이루는 교회에서 남성 지도자가 90% 이상인 남성 중심적이며 가부장적 질서를 기둥 삼고 있는 교회는 가부장적 억압 체계가 무너지면 무너질 교회다. 온갖 감언술수를 동원하여 십일조 외에도 적게는 대여섯 가지에서 십수 개의 각종 헌금을 요구하며 허황된 축복을 빌어 주는 기복신앙은, 사회가 합리화되어 한탕주의, 기회주의가 사라지고 민주 시민의 책임성이 자각될 때면 미신으로 치부될 것이다.

전근대성에 안주하며 근대정신을 외면하는 집단이 정보의 세계화가 이루어진 세계에서 생존할 수 있을까? 현대사회에서 살아가는 말씀의 증언자가 치열한 독서도 없이(성경 밖의 주장이니까 읽을 필요도 없기 때문에), 근대성의 요구를 이리저리 회피하며, 허구한 날 성경을 인용하기에 바쁜 동어반복적인 설교를 하고 있다면 오늘의 현대인을 변화시키기 어렵다.

이런 전근대성의 정신적 유물을 간직하고 있는 교회는 결코 민주주의를 이해하지 못한다. "신앙생활은 민주주의와 상관이 없다"라는 주장은 적절한 주장이 아니라, 오히려 "오늘의 일부 한국교회는 전근대적 유산에 매여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용기도 능력도 없다"라고 말해야 옳은 것이다.

교회의 비민주성은
망할 교회의 징조

정치적으로 민주주의는 "가장 덜 타락하는 권력 사용법"과 같다. 교회도 권력이 있고, 경제구조가 있는 집단이므로 힘의 균형과 견제가 요구된다. 따라서 교회도 당연히 정치를 요구한다. 교회가 민주화가 되지 않으면 누군가가 독재자가 되어 지배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의 한국교회는 전제주의나 전체주의적 집단처럼 일인 독재나, 북한처럼 일당 비밀 독재 체제와 유사하다. 목사, 장로만으로 이루어진 집단의 장기(長期) 정치, 일당 독재가 이루어고 있기 때문이다.

신도 수가 적어 가난한 교회는 나눌 권력이 그리 크지 않지만, 교회가 대형화될수록 교회의 금력과 권력은 정비례하며 배가된다. 대형 교회의 경우 한 주간 헌금만 억대에서 수억대에 이르는 교회도 있다. 대형교회 교인 중에는 정부 고관, 고위 법관, 장·차관, 대학교수 총장 등, 사회의 저명한 인사들이 포진하기도 하여 그들이 적재적소에서 교회의 발전과 성장의, 심지어 부정한 결정의 촉매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큰 교회의 지배 체제는 사회의 지배 체제와 유사성을 가지게 된다.

기독교 윤리학자 라인홀드 니버에 의하면 지배 계층은 일반적으로 특별한 신념을 가지지 않는 한 생득적으로 평등주의를 거부하는 성향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결국 지배 계층은 민주주의 이념을 싫어한다는 말이다. 그들은 더 강한 지배자에게 복종함으로써 다른 이를 일사불란하게 지배할 수 있는 힘을 행사하려는 지배자들이기 때문이다. 태생적으로 민주적 신념을 결여하고 있는 보수적인 목사와 결탁한 정치적 지배 집단은 반민주적일 수밖에 없다. 한국의 대형 교회가 생존하는 방법은 그러기에 그 본질이 반민주적인 권위주의의 체제라 규정될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정권은 초기부터 국민과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심지어 탄핵 국면에서도 국민 앞에서 검찰의 조사, 특검의 조사에 응하겠다고 약속하고서도 이행하지 않았다. 온갖 국정 농단의 실타래가 풀어져도 상당수 목사는 박근혜 정권을 옹호하는 논리를 교인들에게 설파했다. 아마도 가장 깊은 내적 이유는 박근혜와 동일한 권위주의적이며 자의적인 지배 행태를 그들 스스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박근혜도 할 수 없는 성직 세습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해내는 이들이 아닌가? 부정한 이들은 부정한 자의 부정을 부정한 것이라 판단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문제는 목사들이 이런 조야한 판단을 순진한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처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대중화된 종교는 언제나 가볍고 경박했다. 대중화에 더해 정치적 선동이 더해지면 그 종교는 비이성적으로 잔인해진다. 십자군 전쟁의 선봉에 자기 목숨조차 아까워하지 않고 나선 평신도는 그들의 성직자로부터 종교적 확신을 교사받은 이였다.

정치의 영역은 이성적인 비판과 견제의 방식을 사용하기 때문에 서로를 상대화하며 이성적인 합의에 이를 수 있는 장점이자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정치에 종교를 이용하면 자기편은 신(神)의 편이 되어 종교적 의로움을 얻는 대신, 다른 편은 악마화할 수 있기 때문에 대화나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극단적으로 혐오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상대의 존재조차 부정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이런 이유로 사악한 정권들은 언제나 종교를 이용해 왔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슬람국가(IS)를 꿈꾸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상대를 대화 대상이 아니라 능멸과 저주와 심판의 대상으로 본다. 왜냐하면 상대를 정치적 정적이 아니라 자신들이 믿고 있는 신의 원수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마르틴 루터조차 터키인과 싸우려 전장에 나가는 기독교인들에게 "전쟁터에서 사람을 죽이는 군인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렇다, 하나님의 원수인 터키인들을 개 잡듯이 죽여야 한다"고 교사했다. 종교개혁자도 하나님의 원수라면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으며 사람을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을 양육해 낸 셈이다.

한국의 보수 교회는 이와 유사하게, 타락한 권력에 도전하는 "법 앞에서의 평등", 모든 이들의 "인권을 지키는 법치주의"를 요구하는 민의를 불온하게 보고 좌파로 몰았다. 보수 교회는 이에 그치지 않고, 타당성이 현저히 결여된 종북, 친북 프레임을 촛불 민주 시민에게 덧씌우며 신자들을 억지 십자군으로 내세웠다. 이런 오류를 스스로 비판할 능력이 없는 종교는 역사 속에서 사라져야 할 망할 종교다. 반면 살아남을 수 있는 종교는 민주적 질서와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하나님의 교회다.

탄핵 직후 여론 조사에 의하면, 우리 국민 87%가량은 민주주의 근간인 법치주의를 무시하고 법과 헌법 정신을 위배한 대통령을 탄핵하여 그 지위를 박탈하는 데 동의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런 국민의 마음에서는 법과 헌법 위에서 군림하던 박근혜를 지지, 옹호한 목사들도 더불어 탄핵된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이번 대통령 탄핵 사건을 통하여 우리 국민은 역사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교회와 죽어 버림받을 교회를 알아볼 능력을 지닌 국민임을 증명했다. 전근대적인 낡고 낡은 모래 위에 세워져 헛된 목사의 권위주의의 볼모가 된 교회는 민주주의를 거부한다. 아무리 겉보기에 화려하고 그럴 듯해도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교회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교회가 아니다. 그것은 망할 수밖에 없는 교회, 곧 망할 교회의 징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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