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나쁜 하나님' 소개의 말

오늘의 한국교회는 정치적 타락, 종교적 부패, 신학의 허약함으로 인해 파산 직전에 몰려 있습니다. 이는 명백히 신학, 신앙, 교회의 위기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 너머에 치유를 위한 열망 또한 숨 쉬고 있음을 부정해선 안 될 것입니다.

치유와 소생의 가능성을 경험하기 위해 오늘의 한국교회를 지배한 기복과 왜곡된 순수의 풍경을 동시에 전망하는 문학적 시도는 어쩌면 필연이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이러한 시도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교회의 본령을 회복하는 사상적, 신학적 갱신 의지와 흐름을 같이한다고 확신합니다. <뉴스앤조이> 연재 소설 '나쁜 하나님'은 한국교회의 궤멸적 징후를 극사실적으로 해부하고 그 너머의 희망, 치유, 소망의 가능성을 함께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 소설가 주원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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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주를 맞이하는 설교. 민규의 입에서 토해져 나오는 설교는 한결 더 민규를 가볍고 여유 있게 했다.

강대상 높이에 압도되면서 느꼈던 첫 주 때의 긴장은 더 이상 민규를 힘들게 하지 않았다. 여전히 설교자 권위를 인위적으로 유도하는 강대상 높이가 비상식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민규는 그 비상식을 더 이상 어렵거나 낯설게만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다.

강대상에 오른 민규는 지난주에 겪었던 정신적 공황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치밀하게 설교를 준비하던 습관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빼꼭한 밀도로 A4 용지에 타이핑된 설교 용지 대신 몇 장의 메모지만 손에 쥐었다. 눈에 뜨이는 낱말 몇 개 끄적인 게 고작인 메모지였다.

일러스트레이터 주원태

'아브라함, 이삭, 번제단, 신의 제물.'

그 네 단어면 충분했다. 미국에서 근 10년간 붙잡고 씨름하던 논문 주제가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장 실증적으로 확인해 주는 이삭으로 상징되는 인신 제사의 화두는 구약학이 주 전공이 아님에도 학위논문을 아브라함으로 밀어붙일 정도로 민규를 사로잡았다.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한 민규는 그 네 낱말만 머릿속에 담아 둔 채 설교를 시작했다. 거친 파도처럼 회오리치던 부담감이 일시적으로 말소되자 비로소 청중들의 면면이 민규의 눈에 확연히 들어왔다. 그 순간, 민규는 서글픈 신비감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기도하고 갈구하던 첫 주의 설교 때 민규의 눈에는 신도들의 모습, 표정, 그 살아 있음이 아무것도 실감되지 않았다. 경건해야 한다고,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달라야 한다고 그렇게 부르짖고 외치던 기도의 결과물로서 주어진 설교를 뇌까릴 때는 오히려 신도들에게서 분리되어 홀로 고립된 비통한 외로움에 사로잡혀야 했다.

그런데 지금 두 번째 설교에서는 확실히 달라졌다. 주일을 지키기 위해 모여든 이들의 마음과 생각, 그 살아 있음이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왜 이럴까. 이게 뭔가.'

비겁하고 끔찍하게도 그 순간, 김인철과 보낸 이른바 소돔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더럽고 불경건한 모습과 말투, 태도의 진창 속에 원하든 원치 않든 빠져 버린 그 순간, 세계의 진실, 마음 깊이 흐느끼고 있는 사람들의 맨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민규, 그 자신부터.

맨얼굴이 드러나자 심장을 두들기는 긴장감도 휘발되었다. 드높은 강대상 위에 선, 그래서 외톨이가 되어 버린 고립감도 더 이상 없었다. 민규는 비로소 잠잠히, 자신이 품어 왔던 생각의 끈을 풀어낼 용기가 생겼다. 자신을 더 이상 신 앞에, 사람들 앞에서 감출 수 없다는 무장해제된 무력감이 도리어 가장 솔직한 자신과 마주하게 했다.

- 여러분. 전 오늘 아브라함이란 인물을 주제로 설교를 할까 합니다. 제목도 그렇죠.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말씀드릴 아브라함의 믿음은 우리 정신적 지주로서 아브라함의 뛰어남이나 위대함, 흔히 이야기하는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모범, 위인전을 읽으려는 의도와는 별 상관이 없다는 걸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준비된 설교문 없이 이야기를 풀어 갔던 적이 언제였던가. 수백 번이고 고치고 쓰고, 또 지우고 고쳐 넣던 논문 속 내용이었기에 민규가 한 번 말을 풀어내자 별달리 기억하기 위해 애쓰지 않고도 설교를 이어 나갈 수 있었다. 민규의 말이 자연스럽게 풀려나오자 상투적인 설교에 지쳐 있던 신도들 표정도 오히려 더 진지해지고 생기를 찾았다.

-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단 위 희생 제물로 바치려 했던 그 행위는 과연 위대했던 걸까요. 그의 인생에서 경이롭게 축적된 야훼 하나님과의 신적 교감의 결과인 걸까요. 그게 아니라는 걸 우리는 너무나 분명히 확인하게 됩니다.

잠시 침묵. 침묵의 행간 속에서 민규는 자신의 부적절한 행위에 대한 죄책, 그에 반해 솟구치는 인간 본성, 그 일반에 대한 직면 욕구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기저의 역동을 외면하지 못했다. 민규의 설교가 다시 이어졌다.

- 아브라함은 온갖 시행착오와 고통, 번뇌, 세상의 번잡한 처세에 때론 길들여지고 때론 타협하며 인생을 살아 낸 존재입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끝없이 야훼를 찾았지만 야훼를 믿는다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불신, 불능, 무능의 작태도 함께 보여 주었습니다. 여러분. 그게 야훼 앞에 선, 신 앞에 선 인간의 솔직한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이러한 인간 실존의 원형으로 우리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실존의 원형. 사람들의 바닥을 잠식한 끔찍한 공동의 허무 앞에서 전율하는 모습, 당연히 품어 오던 믿음의 기저가 뿌리에서부터 흔들릴 때, 그 흔들림에도 지속되는 야훼를 향한 도저한 갈망, 이처럼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가장 숭고한 가치와 가장 세속적인 범속성이 공존하는 아브라함이 보인 단 하나의 행위가 지금 우리 앞에 형언하기 힘든 강력하고 찬란한 빛으로 타오릅니다. 바로 아들 이삭을 끌고 야훼의 번제단을 향해 꾸역꾸역 걸음을 옮기던 그때, 그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강단 위에 올라 강의나 설교를 하면 절정에 이를 때쯤 어떤 규칙처럼 신도들 중 한두 명에게 시선이 고정되고는 했다. 그건 14년 가까이 일요일만 되면 어김없이 설교를 해 오던 민규에게 찾아온 오래된 습관 같은 현상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삭의 번제단 이야기로 설교의 절정을 치닫는 이 순간, 민규의 시야 안으로 강하게 파고드는 한 존재가 있었다. 왼편 앞의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감색 코르덴 양복 차림을 한 반백의 남자였다. 남자의 눈빛은, 반백의 머리칼과 전체적인 풍모에서 느껴지는 중년의 느낌에도 불구하고 소년의 눈빛처럼 총명하게 빛났다. 그 눈빛은 상대에게 자신의 전체를 내맡기는 듯한 강렬함으로 무장돼 있었다. 눈빛이 민규에게서 내내 떠나지 않았고, 민규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리며 격정적인 어조로 설교를 마무리했다.

- 비루한 한 남자, 죄와 업으로 들끓는 아브라함의 손에 잡힌 그 아들, 이삭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숨 막히는 순간, 번제단 위에 타오르는 불, 번제의 불이 우리에게 소멸의 불이 되어 압도되는 바로 그 장엄함, 그 장엄함 앞에서 우리는 기도하게 됩니다. 주여. 우리의 믿음 없음을, 주여. 우리를 이 지옥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계속)

*'나쁜 하나님'은 주 3일(월, 수, 금) 업데이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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