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미 헌법재판소장권한대행이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주문을 읽는 순간, 깊은 감동에 눈물이 흘렀다. 아, 이 기쁨을 무엇으로 표현하랴! 나 혼자 한참 동안이나 힘차게 박수를 쳤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 수고한 촛불 시민들에 대한 고마움과 자랑스러움의 표현이었으리라!

그러나 내 마음 깊은 곳 어디엔가는 여전히 아린 슬픔이 남아 있다. 세월호 유족들의 얼굴이 떠올라서다. 헌재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대통령의 생명권 보호 의무와 직책 성실의무 위반은 탄핵 사유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헌법이 요구하는 대통령의 의무를 구체적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데다, 직책 수행의 성실성 여부는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그런 대통령의 의무 조항을 굳이 헌법에 기재할 필요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냥 법적 효력과는 무관한 대통령의 개인적 윤리 강령 같은 것을 만들어 거기에 포함하면 될 일이 아니겠는가? 헌법재판소마저 결정적 지점에서 고통당하는 국민의 편에 서지 않았거나 설 수 없었다. 그것이 오늘 대한민국 법치주의 현주소다.

그래서 나는 박근혜의 탄핵은 우리 국민에게 아직 미완의 승리라고 생각한다. 새 출발을 각오해야 할 이유다. 물론 잠시 촛불 시민의 쾌거를 축하하자! 서로 얼싸안고 기쁨을 나누자! 하지만 그 시간을 새로운 출발을 위한 숨 고르기요, 에너지 재충전의 기회로 삼자!

전 대통령 박근혜의 파면이 선고되자 기뻐하는 시민들. 뉴스앤조이 현선

새롭게 출발하면서 제일 경계해야 할 바는 "이제 통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보편타당한 명제이기에 그만큼 더 위험하다. 통합 명제는 한 사회와 국가가 치열하게 해결해야 할 불의한 갈등 구조를 외면케 함으로써, 기득권 세력의 지배를 영속시켜주는 매우 효과적인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를 우리 국민은 반복적으로 경험해 왔다. 통합의 이름으로 친일 세력과 군부독재 부역 세력은 아무런 반성도 없이 자신의 불의한 과거를 깔끔하게 세탁받아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박근혜·최순실의 국정 농단은 바로 그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박근혜 탄핵 이후 다시 통합 명제는 박근혜를 떠받쳐 온 지배 동맹 세력에게 값싼 면죄부를 제공해 주는 불의한 수단으로 얼마든지 전락할 수 있다. 우리 국민은 두 눈을 부릅떠 그런 비극적 사태를 막아 내야 한다.

그동안 박근혜 주변에 빌붙어서 권력과 온갖 특혜를 누려 온 세력들이 통렬히 반성하고 합당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철저히 청산해야 한다. 통합의 이름으로 용서해선 안 된다. 그들이 또다시 변신하여 기득권세력으로 살아남는 걸 허용해선 안 된다.

그건 교만한 자기의나 속 좁은 분노의 발로가 아니다. 진정한 통합의 길이다. 참된 통합의 길은, 불의를 행한 지배 세력이 철저히 반성하고 져야 될 책임을 질 때, 비로소 열린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통해 성취되는 통합의 의미다.

예수님은 온유와 겸손의 왕으로 오셨지만 섣불리 통합을 이야기하신 적이 없다. 고통당해온 사람들의 편을 확실히 들며 불의한 지배 세력에 저항하셨기에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지막 숨을 거두시기 직전, 예수님은 하나님께 불의한 지배 세력과 그 추종자들을 용서해 달라 기도하셨다.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길 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회개하여 돌아올 때 비로소 진정한 통합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 전까진 누구도 섣불리 통합을 이야기해선 안 된다. 사회적 약자를 편들고 지배 세력에 저항하다 고통당하여 죽게 되면 그들을 용서하는 것만이 그리스도인의 임무일 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주주의는 평등 경제를 바탕으로만 흔들림 없이 세워져 나갈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3·1 운동과 4·19 혁명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은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민주주의가 쟁취되었지만 국민주권이 너무 쉽게 무너졌다. 가장 결정적 원인은 절차 민주주의가 확립되었고 헌법에 경제민주화를 허용하는 조항까지 포함되었지만,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어 온 데 있다.

부가 특정 소수집단에 집중되고 중산층이 소멸되고 국민 대다수는 항시적 생존 위협에 직면하게 되면,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부를 공통분모로 한 지배 동맹 세력이 입법·행정·사법부 권력뿐 아니라 학계, 언론 그리고 심지어 대중문화까지 장악하여 사회를 자기 입맛에 맞게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두려움과 무기력에 빠진 대다수 서민 대중은 기득권 세력에 속아 자발적으로 지지하거나, 냉소주의자로 전락해 정치 영역에서 스스로 퇴장한다.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게 된다. 그것이 바로 1987년 민주화 이후 30여 년 동안 우리가 목도해 온 과정이다.

민주주의를 확고히 세우려면 평등 경제를 이룩해야 한다. 부의 편중을 해체하고 중산층을 다시 살려내고 사회적 양극화를 해소하는 방향으로 경제 질서가 재편되어야 한다. 헌법의 경제민주화 조항이 의무 조항이 아닌 허용 조항인 것이 아쉽지만,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힘없는 을들에게 여전히 형식적 자유가 있지만, 생존을 위해서라면 갑에게 굴종을 해야 하니, 그들은 노예 아닌 노예인 셈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작년 12월 24일 창원 촛불 집회 자리에서 심금을 울리는 발언을 한 24세 전기공 청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는 자신이 노동자로서 걸어온 길의 서러움을 이야기한 후 이렇게 질문했다.

"여러분께 꼭 한 번 여쭤 보고 싶은 게 있어서 나왔습니다. … 박근혜가 퇴진하면 제 삶이 나아질 기회가 따라 올까요? … 박근혜가 퇴진하더라도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 슬픔 같은 건 어떻게 하고 싶습니까?"

지금이야말로 정의와 평화 그리고 생명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그리스도인이 이 질문에 온몸으로 응답해야 할 때다. 박근혜 탄핵은 새로운 출발의 신호탄이다. 아직 봄은 와야 한다.

박득훈 / 새맘교회 목사, 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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