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ence and Religion

필자는 2014년 여름, 10년간의 시카고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미국 유학을 하면서 느꼈던 가장 큰 인상은 각 분야에서 Interdisciplinary Study(한국말로는 학제간 연구, 융복합 등으로 번역)가 상식처럼 보편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미국 학계는 시대적 요청, 자본의 논리, 학문의 발전 등 갖가지 이유를 들이대면서 온갖 경계를 넘나들며 학제 간 연구에 매진하고 있었고, 그 결과 놀라운 성과물들이 학교로, 도서관으로, 그리고 시장으로 흘러들어 가고 있었다. 비교적 보수적인 신학 분야도 이러한 시대적 요청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데, 가장 대표적인 분야가 종교와 과학 간의 대화가 아닐까 싶다.

미국내에서 'Religion & Science' 분야의 최고 연구 기관 중 하나이자 정기적으로 기관지를 발행하는 'Zygon Center for Religion and Science' Zygon(줄여서 그냥 Zygon이라 부름)이 시카고 루터란신학교(The Lutheran School of Theology at Chicago) 내에 있다. Zygon의 운영자이자 미국 '종교와 과학' 분야의 대부 격 인물 중 한 분이 지금은 은퇴한 필립 헤프너(Philip Hefner)이다. 헤프너 교수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GTU에 있는 테드 피터스(Ted Peters)와 러셀(Robert John Russell), 영국에서 활동하는 아서 피콕(Arthur Peacocke)과 폴킹혼(John Polkinghorne), 그리고 얼마 전에 타계한 이언 바버(Ian G. Barbour) 등과 더불어 신학계 내에서 '종교와 과학'을 선두에서 이끌었던 인물이었고, 특별히 인간을 하나님과 함께 Co-Creator 지위로까지 부상시켜 생태신학의 기반을 제공했던 중요한 학자이기도 하다. Hefner, Philip., The Human Factor: Evolution, Culture, and Religion(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3), 145~156. 헤프너 교수 강의를 들을 때 한국에서 번역된 그의 책을 가지고 가서 겉표지에 사인을 요청한 적이 있다. 너무 신기해하면서 기쁘게 웃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테드 피터스가 편집을 맡아서 출간된 Science and Theology: The New Consonance(Westview Press, 1998)가 한국에서 <과학과 종교: 새로운 공명>(동연, 2002)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 책에 필립 훼프너 교수의 논문인 '생명 문화적 진화와 창조된 공동 창조자'가 실려 있다.

나는 시카고에서 석사과정 수학하면서 헤프너 교수가 개설하는 'Epic of Creation'(2005년)과 'Science & Ethics'(2006년) 두 과목을 수강했었다. 'Epic of Creation'(번역하면 '창조의 새 기원'쯤으로 해석되는)시간은 시카고에 있는 유수한 대학의 천문학자, 물리학자, 분자생물학자, 진화 생물학자들을 초빙하여 우주의 창조 혹은 진화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신학적 의제의 폭을 넓히는 시간이었다. 빅뱅에 대한 이론을 과학자들이 설명하고, 그 다음에는 구약학자들이 구약성서에 나오는 창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음 시간에는 신약학자들이 신약성서에 나오는 종말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고, 그 다음 시간에는 물리학자들의 엔트로피에 대한 해설을 듣는다. 이런 식으로 한 학기 내내 창조부터 종말까지 과학과 신학에서 다룰 수 있는 폭넓은 이슈들에 대한 논의들이 현란하게 펼쳐지는 수업이 바로 'Epic of Creation'이었다.

'뇌과학'으로 바라본
Post Human의 쟁점들

'Epic of Creation'을 마치고 다음 학기(2006년 봄 학기)에 나는 헤프너 교수가 진행하는 'Science and Ethic'을 계속 수강 신청해서 세미나에 참여하였다. 특별히 그 해는 헤프너 교수가 은퇴를 하던 해였던지라 대가의 수업을 들을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다. 그 수업은 과학의 발전에 따른 윤리적 이슈들을 다루는 수업이었는데, 인간 복제, 핵, 가상공간, 기술 문명, 환경, 뇌과학 등의 주제들에 대한 윤리적 담론 형성을 목표로 디자인되었다.

'뇌과학과 윤리'를 다루는 내용은 학기 후반부에 배치되었다. 시카고대학 의대에서 뇌신경을 가르치는 교수가 와서 수업의 반을 책임졌고, 응용윤리학을 강의하는 교수가 나머지를 담당했다. 뇌과학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마음과 감정의 메커니즘을 알아 버린 지금, 이러한 지식이 인간의 윤리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 강의의 주된 목적이었다. 교수는 수강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졌다: "9·11 같은 끔찍한 기억을 선택적으로 지울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자녀들의 기억력과 창의력을 높이기 위해 약을 먹고 뇌의 특정 부위에 대한 시술을 받는 것은 윤리적으로 정당한가? 뇌과학에 의하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무시할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는데, 그렇다면 인간의 도덕적 의지와 직관은 무엇으로 보장받는가?" 그 강의는 이처럼 뇌과학의 발전에 따라 등장하는 다양하고 묵직한 윤리적 함의들에 대해 질문한다. 그리하여 전통적 규범윤리학에 함몰되어 있던 나에게 윤리적 혼란을 불러일으켰던 시간이었다.

뇌과학의 발전은 인간의 인지능력이 일어나는 회로를 파악하게 하였고, 그 지식을 토대로 인지능력의 개발과 보충을 가능케 하였다. 근육을 늘리고 강화하기 위해 무슨 약물들을 복용하는 것처럼, 기억력, 창의력, 감수성을 자극하는 방법을 개발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결국, 문제는 '어디까지 뇌과학의 발전을 허용할 것인가?'인데, 이 물음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문제와 최종적으로 조우한다. 왜냐하면 뇌과학의 적용이 인간 조건에 대한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아픈 기억을 지워 버리고, 호르몬 분배를 장악하여 인간의 감정과 기분을 통제, 조절하게 되면 인간이 어떻게 될까. 과연 인간 마음 깊숙이에는 변하지 않는 정신의 숭고한 무엇이 있고 그것으로 인해 인간의 생각과 행동이 지배받는 것이 확실한가.

그 밖에도 뇌과학과 윤리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는 산적하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뇌의 작동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와 지식의 발전이 그동안 전통적으로 간주되었던 인간의 이성, 감성, 자유의지 등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그 결과 발생할 사회적, 윤리적, 철학적 딜레마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한 문제가 그것인데, 미국 내에서 뇌과학과 윤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를 크게 두 분야로 나누는 것 같다.

뇌과학과 윤리를 다루는 개론적인 미국 책들을 읽을 때 두 가지 용어가 등장하는데, 하나는 ethics of neuroscience이고 다른 하나는 neuroscience of ethics이다. 전자는 '뇌과학의 윤리학'이고, 후자는 '윤리학의 뇌과학'으로 번역할 수 있겠다. 얼핏 비슷해 보이는데 굳이 분류하자면, '뇌과학의 윤리학'은 뇌과학적 지식을 인간에게 적용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윤리적 절차의 문제들에 관심한다. 따라서 뇌과학 자체의 윤리적 수행의 문제, 뇌과학 연구자들의 행위에 대한 윤리적 문제를 다룬다. 반면, '윤리학의 뇌과학'은 전통 윤리학에서 다루어 왔던 윤리적 이슈, 예를 들어 자유의지, 선의지, 도덕성 등이 뇌과학의 등장으로 어떻게 다시 규정되는지에 대한 연구다. 즉 인간의 도덕적 행위에 대한 새로운 뇌과학적 정의 혹은 버전이랄까. 윤리학 교과서를 뜯어서 다시 써야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뇌과학자들을 윤리학자들에게 넌지시 농을 건다.

미국 학계에서는 21세기로 접어들면서 뇌과학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본격적으로 학제 간 접촉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뇌과학이 지니는 이런저런 염려 때문에 뇌과학에 대한 통제를 해야 한다는 기독교 우파 진영의 목소리도 있는 것 같고, 뇌과학의 발전으로 예상되는 우리 삶의 변화된 모습에만 포커스를 맞추는 가십성 기사도 많다. 하지만, 대부분의 양식 있는 학자들은 차분히 여러 각도에서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고 성찰하면서 천천히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Post Human
다시, 인간을 묻다

결국, 뇌과학의 발전으로 인한 근심과 걱정, 전망과 희망의 최종 종착점은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원초적인 물음으로 귀환한다. 우리는 어떻게 다시 인간을 정의해야 할까? 뇌과학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엄격히 말하면 '인간의 마음이란 무엇인가?'로 바꿔 써야 맞다. 뇌과학 이론에 따르면 마음은 뇌에서 작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을 뇌 활동의 산물이라고만 국한시킬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 제기에 맞서 뇌과학자들은 '육화된 마음 이론(emboded mind theory)'과 '확장된 마음 이론(extended mind theory)'을 주장하기도 한다.[신상규, '확장된 마음과 자아의 확장', <포스트 휴먼의 무대-포스트 휴먼 총서2>(아카넷) 35~62쪽을 참조하라] 전자는 인간의 마음이 온몸을 통해 형성된다는 이론이고, 후자는 더 나아가 인간의 마음이 뇌와 몸뿐만이 아니라 인간을 둘러싼 환경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이론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마음은 뇌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우주 전체가 우리의 마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된다. 만약 그렇다면, 윤리적 문제는 또 다른 양상에서 전개된다. 외부와 맺는 관계의 양상, 관계의 법칙으로 확대된다는 말이다. 즉 나와 다른 타자와의 접속과 교감의 능력이 마음의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또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기억의 문제이다. 뇌과학에서는 기억을 지우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언젠가는 공상과학영화 '블레이드 러너'(1992)에서처럼 기억을 심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세월호 사건으로 딸을 잃은 부모에게서 세월호 사건과 관련된 기억을 지우고, '딸은 성장하여 멋있는 남자를 만나 미국으로 유학 갔고 지금 미국에서 잘 살고 있다'라는 기억을 새로 심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사위에 대한 설명, 미국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자료, 딸의 연애 과정, 결혼식 풍경, 공항에서의 이별 등 지금 살아 미국에 있는 그 딸에 대한 수많은 기억이 함께 구성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기억이란 단편적인 것의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은유와 환유의 고리와 연쇄를 따라 통합적으로 구성되는 사건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억의 총합이 마음을 직조하고 그러한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뇌과학에서 말하는 기억을 삭제하는 것이 가능하여 실제로 누군가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쓰라리고 고통스런 과거, 혹은 무의미하고 쓸데없는 사건들의 기억을 지워 버리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만약 이런 기술이 완성된다면 사람들은 괴로움을 잊고 평생 평안한 기분으로 살게 될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들이 아픔과 괴로움을 모르는 세상, 그런 세상은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필요 없는 세상일 것이고 아픔에 대한 연민도 소용없는 세상일 텐데, 타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없게 되는 그 세상은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일까?

그들은 이제 공적인 가치를 상상하지 않으면서 정신과 양심의 가위눌림에도 반응하지 않는 쿨한 인간들이다. 그 어떤 충격과 놀라움이 밀려와도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간혹 잽을 날리면서 자기만을 보호할 뿐이다. 반성과 실천의 글이 다소 비관적인 관점으로 흐른 것 같은데,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뇌과학이 지니는 부정적 요소가 아니라, 뇌과학의 발달은 전통적 도그마에 갇혀 있었던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 다시 성찰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 그리하여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정직하게 대면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미래의 인간은 어떻게 자리매김될까? 솔직히 별로 유쾌하지 않은 상상이지만, 우리는 이 불쾌와 낯설움을 뱀과 같이 지혜롭게 긴 호흡으로 건너가야 한다. 지금까지 나는 뇌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등장하는 Post Human 시대의 문제들에 대해 잠시 살펴보았다. 인간 종(種)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도모되는 Post Human 시대에 인간 마음의 총합이라 할 수 있는 종교 또한 Post Religion의 단계로 진입하였다고 한다면 너무 불손한 발언일까.

문득 지금 이 순간 그동안 스쳐 지나갔던 숱한 'Post-' 담론들이 떠오른다. Post Modernism, Post Structualism, Post Marxism, Post colonialism, Post Feminism, Post Human, Post Religion까지… 왜, 이리도 많은 Post 담론이 그동안 존재했고 지금도 끊임없이 생산되는 것일까. 대부분의 Post 담론에 깔려 있는 정서는 불만과 불안, 그리고 위기의식이 아닐까 싶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에 대한 위기의식이고, 포스트 마르크시즘은 정통 마르크시즘에 대한 불만으로부터 나왔다. 탈구조주의 역시 구조주의가 담지 못하는 의미의 결핍 혹은 균열에 주목한다. Post Human 담론도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인해 새롭게 창조되는 인간 種에 대한 불안과 위기감으로부터 나왔고, 지금부터 다룰 Post Religion 역시 인간 삶의 조건이 바뀌는 격동 속에서 인간의 믿음을 다시 응시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종교의 위기라 부를 수 있겠다.

Post Religion이란?

하지만 돌이켜 보면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모든 종교는 현실에서 위기의 종교였고, 그래서 어느 시대건 종교는 항상 위기의 한복판에 자리했다. 그리스도교의 역사만 봐도 그렇다. 예수의 자리가 공백으로 남겨진 이후 역사적 그리스도교는 항상 위기의 연속이었고, 교회는 항상 위기의 공동체였다. 초대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중세 교회 역시 표면적으로는 강한 도그마가 세상을 짓누르고 있었겠지만서도 그 수면 아래에서는 변혁에 대한 꿈과 상상을 욕망하면서 위기를 잉태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500년 전에 발생했던 종교개혁은 여러 가지 긍정적. 부정적 평가가 있겠지만 어쨌든 중세 천 년의 교회 전통에 대한 반동을 선언했다는 점에서 가톨릭교회의 입장에서 보자면 엄청난 위기의 현상학이었다. 고대, 중세가 지녔던 온갖 신화와 미신과 주술에서부터 탈출한 근대는 또한 종교적으로 볼 때 얼마나 위기의 시대였나. 막스 베버는 이런 근대를 '주술과 신화로부터 벗어난 시대'라 평했을 정도다. 미토스에서 로고스로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종교는 이신론에 입각한 자연종교의 경향으로 흘렀고, 유럽의 사회가 사회계약설에 입각해 급격하게 시민사회로 변해 가는 과정에서 종교는 시민 종교로 탈바꿈하게 된다. 종교적 권위와 신적인 주술로부터 탈피한 근대는 어쩌면 역사상에서 종교적 파국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다.

자본주의의 등장은 새로운 유사종교의 등장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싶다. 자본주의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사물의 사용가치를 교환가치로 전환시키는 시스템이다. 즉 사물이 지녔던 그 자체로서의 가치가 시장성으로만 평가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인간 역시 그렇게 효용성의 원칙과 교환성의 원칙에 따라 서열화되었다. 자본주의의 도래 전까지 인간을 지배했던 양식들, 예를 들어 우리의 전통, 관습, 역사, 윤리, 명예, 사랑, 대의, 양심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앙까지도 자본주의는 화폐의 양으로 전환시켜 버렸다. 사용가치를 교환가치로 전환시키는 자본 특유의 마력 앞에서 각각이 지녔던 개별적 가치들은 화폐의 양에 따라 서열화된 것이다. 모든 질적인 차이를 냉소하고 화폐의 양으로 등가시켜 버리는 자본주의 정신은 기존의 세상 법칙과 질서를 새롭게 바라보는 종교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렇듯 매 시대마다 Post Religion을 둘러싼 논의는 존재했었고, 이는 당대의 종교 위기상황, 혹은 위기의 종교에 대한 대항 혹은 대응 담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Post Religion 논의가 지금 막 등장한 Hot하고 새로운 무엇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이 종교 생활을 시작하던 무렵부터 현재까지, 종교의 위기가 운운되는 당대의 삶과 질서 가운데 늘 가시처럼 존재했던 것이 Post Religion 논의였고, 당대가 지녔던 종교적 위기를 전제하면서 그 위기에 대한 답변과 대안을 상상하고 제안하고자 했던 것이 Post Religion 담론의 주된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21세기 자본에 대한 전 지구적 재편이 완료된 상황속에서, 21세기 Post Human 논쟁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세계 속에서 종교란 무엇인가?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인한 온갖 기괴한 내공들이 인간 정신의 흐름과 마음의 법칙을 발견하면서 그것들에 대한 조작과 변형이 가능해진 세상속에서 인류는 현재 인간 種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믿음이란 무엇일까?

믿음에 대한 커밍아웃

얼핏 어렵고 복잡해 보이는 21세기 믿음에 대한 물음은 이미 전 시대에 한 차례 홍역을 치룬바 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했던 충격적인 대목에서 우리는 이미 종교적 파국을 경험하였다. 21세기 믿음에 대한 문제로 본격적으로 접근하기 전에 잠시 '신의 죽음'이 선언되었던 그 시절로 돌아가 보자. 흔히 정신분석학이나 문화인류학에서 대타자 아버지는 기존의 질서와 법과 가치에 대한 상징으로 묘사되곤 한다. 엄마로부터 전적인 사랑을 받아 왔던 아이는 생의 어느 한 지점이 지나면서부터 밀려오는 불쾌와 공포에 눈뜨게 되고 그것의 원인에 대해 알아 가다가 마침내 엄마의 정부인 아버지와 대면한다. 아버지로 상징되는 상징 세계(the Symbolic)와 맞닥뜨리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아이에게 있어 엄마가 당근이라면 아버지는 채찍이다. 아이는 엄마의 사랑과 아버지의 훈육을 먹고 자라면서 정상적인 성인으로 성장하는데…… 이것이 정신분석학으로 풀어쓴 범박한 인류학이다.

신은 서구인들의 집단 무의식에서 아버지로 상징되는 법과 질서와 도덕의 원형과도 같은 존재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신의 죽음에 대한 니체의 발언이 충격적인 것이다. 하지만, 니체가 진정 의도했던 것은 '신의 죽음'에 대한 선언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는 모두가 성인(成人)이 되어버린 세상 속에서 더 이상 신율(神律)이 작동되지 않는 허무의 상황 속에서 인간 삶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묻고 싶었다. 신이 사라진 이곳에서 어떻게 우리는 다시 사회를 조직하고 공동체를 재건할 수 있을까. 그럴 경우 법은 무엇이고 그 법의 권위는 무엇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가. 대타자가 사라지는 것을 목도하고 대타자의 균열을 감지한 자식이,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한 자녀들이 어떻게 다시 삶을 이어 갈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이라도 한 것일까. 이것이 바로 근대의 비극성이 확인되던 무렵 니체에 의해 제기된 '신 없는 세상 속에서의 믿음'을 둘러싼 문제 제기다.

대타자 신의 죽음이 선포되고, 틈이 없어 보이던 실재에 균열이 생기고 빗금이 그어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니체 이후 사람 인간들은 비록 커밍아웃은 안했지만 무신론자가 되어 버린 것 아닐까. 대타자로서의 역할을 하던 기독교의 신(神) 대신에 서양에서는 힌두교, 불교, 도교에서 영향을 받은 명상, 힐링, 마음 수련, 요가 같은 수행 프로그램들이 확산되고 있고, 종교적 대상에 대한 숭배 대신 스포츠, 연예인, 정치인에 대한 팬덤이 더 강력한 신도들을 거느린다. 최순실 국정 농단에서 드러났듯이 줄기세포 주사, 태반주사 등 온갖 첨단 의료 기술을 이용한 성형과 생명 연장의 욕망은 이제 우리 시대 믿음이 되어 버렸다.

이런 현상들을 지켜보면서 느끼는 것은 어쩌면 우리 시대 믿음의 문제는 무신론자들의 믿음, 무신론자들의 신앙으로 수렴되었다는 점이다. 오직 자본의 명령만이 유일한 정언명령이 되어버린 21세기 세상 속에서 그 명법에 철저히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는 무신론자 아닌가.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Post Human을 꿈꾸는 우리는 유물론자라고 해야 맞지 않나. 이 보다 더 어떻게 무신론자일 수 있겠고, 이보다 더 어떻게 유물론자일 수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슬라보예 지젝의 지적은 날카롭다.

지젝은 "오늘날에는 오직 무신론자들만이 기도를 할 것"[슬라보예 지젝, <시차적 관점>(마티), 211쪽]이라고 말하면서 무신론자의 믿음을 논한다. 그리고 이들의 신앙패턴을 "믿음 없는 신앙(Faith Wihtout Belief)"[Zizek, Salvoj., <On belief>(Routledge), 109~112쪽]이라 정의한다. 지젝의 이러한 발언은 어떤 의미에서는 타당하다. 서울 강남의 대형 교회들을 보라. 수백·수천 억 원대의 교회당을 지으며 신앙을 물적인 양으로 환산하여 드러내 보이는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유물론자들 아닐까. 오히려 신의 존재를 믿지 않은 유물론자들이 성서를 새롭게 해석하면서 신학적 논의들을 신학자들보다 더 밀도 있게 하는 것을 보면 오히려 유물론자들이 세상에는 물질보다 더 중요한 무엇이 있다고 믿는 듯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런 무신론자들의 믿음은 무엇일까?

발터 벤야민,
'유물론자의 신학'을 낳다

현대 좌파 철학자들 가운데 신학적 상상력으로부터 혁명의 기운을 취하려는 사람들은 대략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다. 자크 데리다, 알랑 바디우, 조르조 아감벤, 야곱 타베스, 슬라보예 지젝 등이 그런 인물들이라 할 수 있을텐데, 이들보다 앞서서 20세기 초반에 벌써 유물론적인 신학, 혹은 유물론자들의 신학을 언급한 섹시한 사상가가 있었다. 그가 바로 발터 벤야민이다.

벤야민이 활동하던 20세기 초반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그들의 광기로 자행된 세계대전이 창궐하던 때였다. 이러한 시기에 벤야민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서 공히 취급되는 메시아 담론을 유물론적 상상력과 결합하여 혁명을 위한 정치술로 제안하였다. 벤야민은 자신의 유명한 소논문 <역사철학 테제>에서 신학과 '사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의 결합을 동화와 같은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난쟁이 곱추로 그려진 숨어 있는 신은 메시아 혹은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으로 상징된다. 우리의 상상 속에서 빛나는 메시아의 모습, 혹은 지난 역사에서 유토피아 건설을 가열차게 주장했던 혁명 전사들의 늠름한 모습에 비하면, 난쟁이 곱추로 묘사된 숨어 있는 신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이렇듯 벤야민이 말하는 메시아론은 기존 메시아론과는 다른 느낌을 우리들에게 선사한다. 거기에는 벤야민 나름대로의 계산이 깔려 있다.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인류는 유토피아를 주장했던 많은 이들과 만나 왔다. 그들은 본인들의 종교적 확신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신념에 빠져 자신을 불살랐던 강철과도 같은 이들었다. 하지만,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몇몇 실험들이 디스토피아로 변했던 역사를 우리는 기억한다. 우파 유토피아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나치일 것이고, 좌파 유토피아의 실패는 스탈린으로 상징되는 교조주의적인 공산주의가 아닐까 싶다. 기독교의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이 불러일으켰던 만행에 대해 이 자리에서 일일이 열거하고 싶지는 않다. 십자군 전쟁, 종교개혁에 이은 각종 종교전쟁들, 서구 열강의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벌어진 만행들은 모두 유토피아를 내걸고 진행된 디스토피아 역사였다.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는 것은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없는 세상' 혹은 '도래하지 않는 세상'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유토피아에는 '부재하나 있어야 한다'는 공리가 또한 공존한다.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과 기대, 그리고 욕망이 없었다면 어떻게 인류가 진보를 거듭해왔겠는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서로 짝패인 셈이다. 존재하면서 부재하는, 부재하면서 존재해야만 하는 운명속에서 우리는 메시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유토피아를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 것 일까? 벤야민은 <역사철학 테제>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고, 그것이 유물론자의 신학을 태동하게 만들었다.

유물론과 신학의 공명

지난 시절에 만들어진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 혹은, 메시아의 도래를 둘러싼 믿음은 목적론적인 역사관에 영향을 받은 바 적지 않다. 목적론적 역사관이 무엇인가. 제1원인과 제1목적이 있고 만물의 변화와 운동은 그들로부터 기획된 순서를 따라간다는 것 아닌가. 그 종착점이 유토피아이고, 유토피아로 견인하는 작자가 메시아이다. 최종 목표인 유토피아는 이미 정해져 있고 메시아는 그런 믿음이 깨지지 않도록 현실 속 우리를 강제적으로 그 길로 견인하는 존재라고 한다면 신성모독일까.

벤야민은 일단 기존의 유토피아 이론과 메시아에 대한 믿음에 의심의 해석학을 들이댄다. 벤야민에게 있어 구원의 때는 미래의 어느 한 지점으로부터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사후적으로 구성되어 "지난 세대와 현세대 사이에 비밀스런 협약이 있다. Our coming(구원을 상징?)이 지구상에서 기대되어진다. 우리 앞을 살았던 모든 세대처럼, 우리에게도 희미한(약한) 메시아적 힘이 부여되었다. 과거는 그 힘을 요구할 수 있다."[Benjamin, Walter., "Theses on the Philosophy of History" <in Illuminations, with an introduction by Hannah Arendt>(Schocken Books), 254쪽] 현재 시간을 충만케하는 시간[Jetztzeit]이다. "역사는 특정한 구조물의 대상인데, 그 구조물의 자리는 단일하고(동일하고) 비어 있는 시간이 아니라, Jetztzeit(the presence of the now)에 의해 충만한 시간이다. 그래서 로베스피에르에게 있어 고대 로마는 지금의 시간에 의해 충전된 과거였다… 프랑스혁명은 스스로를 다시 태어난 로마로 간주하였다."[Ibid., 261쪽] 벤야민이 논란의 중심이 되었던 이유는 이런 시간관 때문이다. 벤야민의 시간 의식은 변증법적 시간관과 다르다. 본래 그것은 과거로부터 시작하여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해 중단 없이 이어지는 시간관이다. 기본적으로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역사관이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나아지리라는 기대와 지평 속에서 미래를 향해 가슴을 열고 뛰쳐나가는 것이 변증법적 시간관의 특징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벤야민이 "희미한 메시아적 힘"과 "현재 시간[Jetztzeit]"을 이야기하면서 기존의 변증법적 시간관에 대해서, 더 나아가 미래에서 기인하는 메시아의 도래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란 지나간 과거의 역사적 순간, 혹은 그것을 통해 현실의 비전을 보게끔 하는 통로이겠지만, 그것은 기존의 메시아관처럼 뚜렷한 목적론적 역사의식에 젖어있지는 않다. 그것을 벤야민은 "역사의 자유로운 하늘에로의 도약"[Ibid., 261쪽]이라 표현하였다. 유물론자는 그런 비상을 꿈꾸는 자들이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벤야민은 다시한번 논리를 비튼다. 지금까지 의심의 대상이 되어 왔던 유토피아는 결코 폐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체스 게임판 앞에 터키풍의 의상을 입고 파이프를 물고 있는 인형이 앉아 있다. 이 인형은 게임을 매번 승리로 이끈다. 좀 더 그림을 살펴보면 인형의 배후에는 게임의 명수인 난쟁이 곱추가 있고, 그 둘은 줄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벤야민은 인형을 사적 유물론으로, 체스의 명수인 곱추를 신학으로 비유한 후에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상상을 한다. 신학과 사적 유물론이 제휴하면 "그 누구와도 한 판 싸움을 벌일 수 있다"[Ibid., 253쪽]고 말이다.

벤야민의 발언은 Post-Marxism이 걸어가야 할 바에 대한 아포리즘 같은 역할을 하였다. 혁명이 더 이상 번지지 않고 단절된 상황 속에서 황망해하고 있는 마르크시스트들에게 혁명이란 인간의 하부구조뿐 아니라 그동안 혁명의 요소에서 도외시되어 왔던 인간의 상부구조, 즉 정신, 신화, 무의식, 그리고 종교적 믿음으로까지 그 영역이 확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벤야민의 이런 상상은 이후에 등장하는 유물론자들의 신학을 견인하는 데 중요한 모멘텀이 되었다. 우리는 결코 유토피아에 도달할 수도 없고, 그러므로 굳이 메시아의 도래를 손꼽아 기다릴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것들은 부재하면서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유물론자들의 갖는 믿음에 대한 고백이라면. 어쩌면 우리는 유토피아를 향해 가는 점근선에 위치하는 존재일는지 모르겠다. 수학에서 목표를 향해 무수히 무한히 접근하지만 닿지 않는 상태의 운동을 점근선이라고 한다지. 유물론자들은 계속해서 그 점근선을 그리는 행위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고.

21세기
무신론 시대의 믿음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자본의 무한 질주가 유일한 삶의 원칙이 되어 버린 사회 속에서 우리의 신은 맘몬이다. 조물주인 맘몬이 첨단의 테크놀로지를 동원하여 인간에 대한 리빌딩에 들어갔고 그로 인한 부작용으로 인류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으로 치닫는다는 기사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시나리오다. 미래를 소재로 한 공상과학영화(혹은 서적)들에서 단골로 등장했던 내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SF 영화 속 장면들이 실현되고 있는 현실의 상황은 영화에서 봤던 것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고 예민하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종교적 감수성이 요구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데리다의 해체론을 신학적으로 풀어 설명하고 있는 존 카푸토(John D. Caputo)는 <종교에 대하여(On Religion)>에서 지금 시대의 종교 상황을 "Religion without Religion"(종교 없는 종교)[<Caputo, John D., On Religion>(Routledge, 2001), 132쪽]이라 표현하였다.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화된 종교와 독단적 진리를 해체하는 가운데 새로운 실천적 차원의 진리를 어떻게 세울 수 있을지를 모색하는 것이 카푸토의 과제다. "…the name of God in may post-modern Itinerarium is the name of infinity questionability…(나의 포스트모던 순례에서 신의 이름은 무한한 질문가능성이라는 이름이다…)God is a how, not a what(신은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이다)."[Ibid.,134~135쪽] Post Human 시대를 맞아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접근을 요청하는 이 시기에 우리는 당연히 변화된 인간상에 걸맞는 종교에 대한 새로운 상상, 즉 Post Religion에 대한 담론을 마련해야 한다. 카푸토 "Religion without religion"은 나름의 답변이라 할 수 있을 텐데, 구체적으로 그것을 어떻게(How) 현실의 삶에서 이해하고 적용해야 할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카푸토는 어떻게(how)와 관련하여 데리다의 '차연' 개념을 적용하여 '사건으로서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차연(differance)은 차이(differ)와 지연(defer)의 합성어다. 차연으로서의 신은 세상과 차이가 나는 신이지만, 신의 임재와 도래는 무한히 지연된다. 신은 인간의 믿음, 행위, 고백, 이성적 판단 안으로 수렴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러한 가능성들과 대립하는 불가능한 형식으로 도래한다. 신으로부터 기인하는 사건이란 신의 현재화를 드러내는 표식이겠지만, 한편으로는 현재화될 수 없는 잉여를 남기며 미끄러져 가는 무엇이다. 사건의 결과 신은 현재화할 수 없는 절대 미래, 절대타자의 자리로 내몰린다.[Derrida, Jacque., "Faith and Knowledge" <in Acts of Religion, Edited by Anidjar>(Routledge), 56~57쪽] 그것이 카푸토로 하여금 "Religion without Religion"을 발설하게 하였고, 그 사건의 이름을 '사랑'이라고 카푸토는 말하고 싶었던 같다. "신의 의미는 사랑의 다양한 움직임 안에서 규정된다…사랑은 정의되어야 하는 의미가 아니라 행하고 만들어야 할 무엇이다."[Caputo, John D., <On Religion>, 140쪽] 그에 따르면 우리는 각각의 삶의 공간과 조건과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사랑의 사건 속으로 개입할 것을 요청받는다.[Ibid., 141쪽]

그런가 하면 라캉의 욕망 이론으로 바라본 사랑은 파괴적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불가해하게도, 나는 당신 안에 있는 당신 이상의 어떤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을 파괴합다."[Lacan, Jacuqes., <The Four Fundamental Concepts of PsychoAnalysis>(Penguin Books), 268쪽] 이 경우 사랑은 주체의 대상을 향한 전유, 혹은 집착의 형태가 된다. 이 사랑은 앞만 보고 달려가기에 옆에 있는 이웃을 살피거나 뒤쳐져 있는 타자를 돌아볼 겨를이 없다. 만족을 모르고 전방만 주시하는 리비도의 돌진 앞에서 인간은 온전한 향유의 대상에서도, 관심과 배려의 대상에서도 제외되는 사물로 전락하고 만다. 하지만, 카푸토가 말하는 사랑에 대한 서사는 다르다. 사랑과 욕망의 변증법 안에서는 '당신 안에 있는 당신 이상의 어떤 것'이 운동의 동력이 되지만, 사랑과 타자의 법칙성 안에서는 오히려 '당신 안에 있는 상처와 결핍'이 사랑의 원칙이 된다. 전자가 자기를 채워 나가는 증산의 사랑이라면, 후자는 자신을 비워 가는 감산의 사랑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욕망 이론 속 사랑이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여전히 그대가 그립다'라고 선포한다면, 카푸토식 사랑은 '내 안에 너 있다'라고 속삭이며 그(녀)를 품는다.

이는 마치 그림으로 비유하자면 모자이크와 같다. 수많은 파편들이 어우러져 하나의 작품을 형성하듯, 수많은 이들의 꿈과 기억, 그리고 사건의 조각들이 우리의 구원으로 들어올 것이다. 구원이란 언젠가 도래하리라 믿어지는 환상 속 메시아의 단 한 번의 붓질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유토피아는 현실에 뿌리박지 않은 미래로부터 도래하는 환상이 아니라, 이 땅에서 투쟁하던(는) 사람들의 집단적 기억 속에 보존되어 있던 사건들이 어떤 시점과 계기에 재생되어 사후적으로 되살아나는 그것이다. 그날은 분명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문제들을 갖고 이 땅에서 투쟁하던 각각의 인민들이 지니는 서사가 특별한 계기에 우발적으로 맞아 떨어진 그날일 것이다. 그리고 그날의 거리 거리들에서는 사랑의 송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노라고 누군가는 기록하겠지.

에필로그

'Post Human, Post Religion 시대의 믿음이 무엇일까?'라는 물음에서 이 글은 시작되었다. 근대 이후 전개되었던 '신의 죽음', 2차 세계 대전 유대인 대학살의 현장에서 확인된 '신의 침묵'은 '신의 무능' 서사로까지 번지면서 무신론은 공공연한 진리가 되어 버렸고, '무신론자의 믿음'이라는 그럴듯한 테마를 낳았다. 이러한 문제들은 기존의 신 관념에 대한 변화를 요청하였다. 하여 우리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종교적 믿음에 대한 새로운 모델을 상상하게 한다.

최종적으로 카푸토의 조언에 용기를 내어 최종적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 아닐까 싶다. 무신론자의 믿음이란 대타자인 신의 음성을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수동적 믿음일 수는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동안 우리를 지탱케 했던 상징계의 법칙과 교리의 강제와 도그마의 환상을 버리게 한다. 그리고 현실에 존재하는 다양한 복수적 타자들이 일으키는 변혁의 사건들을 지지하는 사랑의 자리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 자리란 모든 개별적 존재가 지니는 차이와 다양성을 자본이라는 등가의 원칙으로 서열화한 세상이고, 그 자리란 생명에 대한 존엄이 무너진 디스토피아 세상이다. 더 구체적으로 그곳은 성의 차이로 인한 혐오가, 계급의 차이로 인한 소외가, 종교의 차이로 인한 적대가 넘치는 그곳이고, 거기는 또한 새로운 인간 種의 탄생으로 인한 파국이 예상되는 이곳 지구다. 그 파국의 한가운데서 다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할 수 있다면, 그것의 이름은 무신론자의 믿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글은 웹진 <제3시대>에도 실렸습니다.
웹진 <제3시대> 바로 가기: http://minjungtheology.tistory.com/

이상철 / <제3시대> 편집인, 한백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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