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풍지를 흔드는 겨울입니다. 겨울이 오면 사람들은 두터운 옷을 껴입고 찬바람을 피해 보려 합니다. 그러나 자연에게 겨울은 알몸으로 사는 계절입니다. 겨울나무는 자신의 몸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홀로 겨울 한가운데 서 있습니다.
  
신앙인에게 있어 겨울은 어떤 계절일까요? 봄은 소망의 계절이요, 여름은 축복의 계절이요, 가을은 감사의 계절이라면 겨울은 겨울나무처럼 아무 것도 걸치지 않는 자유하는 계절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온갖 욕심덩어리를 털어 버리고 자유하신 주님을 만나는 계절입니다. 겨울은 봄날 지나 여름에서 가을까지 우리의 몸을 휘감고 있는 허위의식과 겉치레를 훌훌 벗어버리고,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알몸으로 사는 계절입니다.
  
나의 스승 최완택 목사는 겨울을 벌거숭이로 거듭나는 계절이라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옷을 다 벗은 나무는 죽은 것이 아니라 벌거숭이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신앙인에게 겨울은 우리 마음속에 붙어 있는 허망한 꿈과 욕망의 잎, 그리고 지난 계절 동안 부풀어올랐던 욕심덩어리들을 하나 둘 떨어 뜨려 주님 앞에서 벌거숭이가 되는 계절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 앞에서는 숨길 게 없는 투명한 겨울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찬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에 알몸으로 서 있는 겨울나무는 구도자입니다. 혹독한 겨울바람의 칼끝에서도 온전히 자기를 비움으로 견디어 냅니다. 겨울나무의 '겉몸'은 앙상한 가지가 잘려 나가고 상처투성이 몸이지만, 겨울나무 '속몸'에는 활활 타오르는 뜨거운 사랑이 있습니다. 겨울나무는 자기 자신에게는 냉정하고 혹독한 수련을 요구하지만, 알몸 속에는 새봄을 준비하는 뜨거운 사랑이 숨쉬고 있습니다.

저는 겨울나무처럼 알몸으로 살았던 한 젊은 목회자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는 농부 목사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은 밖에서 찬바람 맞고 집에 들어오면 언 몸 녹여주는 화롯불 같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벌써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 간지 벌써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38년이라는 길지 않는 삶을 살았지만, 그는 우리에게 참으로 아름답고 따스한 기억들만 남기고 떠나갔습니다.

그는 88년 강원도 거진읍 대대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지난 96년 2월 신장암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故 최경철 목사입니다. 그는 그저 평범한 목사 같지만 우리와 같은 보통목사는 아니었습니다. 겨울나무처럼 투명한 알몸으로 온전히 하늘의 삶을 살다가 하나님 품으로 돌아간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를 추모하는 추모예배에 참석했었습니다. 그 날 추모예배에는 설교가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 참석한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대신해 그 사람을 기억하고 증언하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그와 1년 동안 동고동락을 했던 산돌교회 조규백 목사가 나와 그를 증언했습니다.
  
"목사님은 목사요, 목수였습니다. 산돌교회에서 요양 중이실 때, 그분은 몸을 한시도 가만있지 않았어요. 이곳저곳에서 나무 조각들을 주어 모아 조그만 책상을 만드셨지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곳을 방문하는 친구들을 위해서 입니다. 그 책상 위에 성경책과 좋은 글을 올려놓고 마음의 양식을 쌓으라고 목사님은 정성스레 책상을 만들어 주셨지요. 책상 만드는 모습이 얼마나 진지하고 정성스러운지 마치 도(道)를 닦는 수도승 같았어요. 그 분은 그걸 참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웃 침례교회 사모님은 조금 침울한 분위기를 씻어내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제 마음 속에 이젠 슬픔 같은 건 없어요. 목사님을 생각하면 아쉽다, 슬프다 이런 감정보다는 따스한 아랫목이 생각나고, 그저 내 마음 속에 따스한 아랫목으로 남아 계시거든요. 그리고 그 분은 아주 추운 겨울날 김치독에서 막 퍼 마시는 동치미 국물과 같은 분이예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아랫목처럼 따스하고 너그러우면서 자신에 대해서는 냉정하고 차가운 분이셨어요. 그래서 그 분은 살아 계실 동안 의롭게 사실 수가 있었던 것 같아요."

산돌교회 주수원 목사님은,

"최경철 목사는 자연주의자요, 한국적 목회자라고 보아요. 고성핵발전소 건립반대운동을 했다고 그래서 그러는 건 아니예요. 그는 정말 자연을 사랑했어요. 이 고성의 아름다운 자연을 말이예요. 그리고 교회를 건축할 때 그는 교회 제단을 조선시대 엽전 모양을 연상케 만들었거든요. 그리고 젊은 사람이 한복 입기를 좋아했지요."

거의 마지막 순서에 이르러 최 목사의 아버지께서 나오셨다. 처음에는 말문을 열지 못하시더니 떠듬떠듬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88년, 그러니까 이곳 강원도 고성으로 아들이 첫 목회를 하러 왔었어요. 부임한지 얼마쯤 뒤에 아들이 목회하는 교회가 어떠한지 애비로서 한 번 보고 싶었어요. 원주에서 이곳 고성까지 오는 길은 참으로 험했지요. 여러 개의 고개를 넘어 한 참만에 대대교회에 와보니 정말 마음이 무겁더군요. 교회는 조그만 시골집 세를 얻어 있었어요. 아들은 그곳에서 숙식을 하고 예배도 드리고, 제가 그 교회에 처음 들어갈 때 고개를 숙이고 허리 굽혀 들어갔어요. 제가 교회에 들어가서 기도하려니 기도가 나오지 않더군요. 아들이 고생하는 것이 꼭 애비가 지은 죄가 많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가슴이 아프더군요. 그래서 아들에게 말했어요.
  
'너 같이 똑똑하고 많이 배우고, 능력도 있는 사람이 이 산골에 있을 이유가 어디 있니, 지금 당장 이 애비랑 원주로 가자. 그곳에 여러 목사님께 부탁을 해서 좀 살만한 교회를 알아보도록 하자. 어서 이 애비랑 같이 가자.'
  
  '아버지, 저 여기 떠날 수 없어요?'

  '왜 떠날 수 없다는 거니?'

  '저희 교회 교인 때문에요.'

  '교인 때문에? 그래 교인이 몇 명인데.'

  '교인이요? 한 명이요.'
  
나는 그 때, 이 애는 내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지...요."


최경철 목사가 대대교회 뒷동산에 묻힌 뒤 한 해 뒤에 대대교회를 다시 찾은 적이 있습니다. 그가 떠나고 주인 없는 빈 서재에서, 하얗게 쌓인 먼지를 털어 내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안타까움을 털어 낼 수 없는 마음으로 그가 7년 동안 이 곳에서 목회하면서 남겨둔 흔적들을 찾아냈습니다. 꼼꼼하게 적힌 일기장, 사랑하는 아내와 친구들과 나누었던 편지, 그리고 설교문과 목회이야기들을 찾아내 커다란 배낭에 담아 눈보라 몰아 치는 한계령을 굽이굽이 돌아 대대교회를 떠났습니다.
  
지금 우리의 절기는 겨울 한가운데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그 무덤 가엔 찬바람 이겨내며 자신을 위해 아무 것도 걸치지 않는 겨울나무가 우뚝 서 있습니다.
  
그는 떠났지만, 그는 내 마음속에 하얀 겨울나무로 살아 있습니다. 여전히 훌훌 털어 버리고 알몸으로 서 있는 겨울나무처럼, 그래서 그는 자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관념이나 제도, 교권이나 욕망의 한 자락도 남아 있지 않는, 오직 주님 앞에서 알몸으로 살았던 겨울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1988년 12월 11일자 일기를 다시 읽어봅니다.

  "하나님, 겸손을 배울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이런 것 말입니다.
   도움을 입고도 감사하다는 말없이 같이 공유할 수 있는
   누가 한 움큼 속을 후비어가도 아프지 않는 것 말입니다.
   또 대가에 대한 기대감 없이 가슴을 쪼개어도
   사라지지 않는 겸손을 열어 보이지 않아도
   자랑스러운 여유를 주어도 주어도 끝이 없다는
   동화의 소금 맷돌이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는,
   주고 나서 아까워하니, 이젠 줄 것이 없다는 빈 마음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곧 송구영신 예배를 드릴 시간입니다.
   주위에 고마운 얼굴을 생각해 봅니다.
   먼저 부모님과 세 동생, 이젠 순위 안에 들어야 할 사람 은순.
   흑석동 교회 우리 고등부 학생 하나 하나, 친구들,
   민주화 운동에 희생된 젊은 영령들, 토마스 머튼과
   김광규 시인, 도와주신 목사님들,
   티없이 깨끗한 성경의 야고보 선생님.
   이 모두들 하나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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