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황창선 목사가 1월 18일 종암교회에서 했던 설교 전문입니다. - 편집자 주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행 2:1-11)

평안 없는 세상

요즘 평안하신지요? 사실 요즘은 평안하다고 대답하기가 어려운 세상입니다. 국내외적으로 암담하고 슬픈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1월 20일 임기를 마친 마크 리퍼트 주한미국대사가 이한했습니다. 그는 이임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아니다. 눈만 뜨면 무슨 일이 일어나 있더라." 정말 하루도 특별한 소식이 없는 날이 없습니다. 그것도 충격적이고 슬픈 소식들로 말입니다.

요즘 국내적으로는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로 온 국민이 기가 막힌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막장 드라마도 이런 드라마가 없습니다. 얼마 전 뉴스에 노량진 공시생(공무원 시험 준비생)들이 학원 문 열기를 기다리며 새벽 4시부터 줄 맞춰 땅바닥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도되었습니다. 영하 12도의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 쌓인 길, 얼어붙은 바닥에 앉아 손전등을 켜고 책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만으로도 안쓰러웠습니다. 기자가 지금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눈물겨운 대답을 듣고 말았습니다. "특별한 행운을 바라지 않습니다. 정유라 사건 같은 게 없었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노력해서 쌓은 실력이 정당하게 평가받는 세상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구의역 전동차 문에 끼어 죽음을 당한 정비기사의 가방 속 컵라면이 떠오릅니다. 그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취업한지 7개월이 된 효성이 깊은 열아홉 살 청년이었습니다. 아무런 상관없는 여성을 그저 무참히 살해한 강남역 묻지 마 살인 사건, 그 피해자와 가해자가 생각납니다. 가난에 찌들려 목숨을 끊은 송파 세 모녀 사건이 스쳐갑니다. 이런 가슴 아픈 일들이 빈번함에도 끊이지 않는 가진 자들의 갑질 사건이 줄을 잇습니다. 연속극이 되어 버린 재벌 후예의 비행기 사건들… 아, 정말 평안이 없는 시대입니다.

국외로 시선을 돌려 봅니다. 계속되는 테러는 어제오늘 얘기가 아닙니다. 테러 대책 수준을 계속 끌어올리는데도 끊임없이 테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해 성탄절을 앞두고 세계 곳곳에서 테러가 일어났습니다. 12월 19일, 난민에게 가장 우호적인 나라 독일에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한 난민이 트럭 돌진 테러를 일으킨 것입니다. 그 테러로 크리스마스 마켓에 있던 사람 12명이 사망했고 48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이보다 열흘 전에는 터키 이스탄불 축구장 인근에서 일어난 테러로 48명이 죽고 155명이 부상당했습니다. 그보다 한 달 전에는 IS가 파리에서 동시다발적인 테러를 일으켜 130명이 사망했습니다. 성탄절 테러 모의한 테러리스트들이 호주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체포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시리아 내전으로 인한 난민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IS로 인한 전쟁과 테러는 여전히 온 세계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정말 온 세계가 평안치 않습니다.

교회는 어떻습니까? 한국에서는 교회가 사회 걱정을 하지 않고,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슬픈 얘기입니다. 방송이나 신문에 교회 혹은 목사 얘기만 나오면 또 무슨 수치스런 보도일까 내용을 보기도 전에 불안해집니다.

지난 1월 20일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45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취임식 순서 중에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하는 시간이 있고, 성경을 봉독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때 성경을 봉독하신 목사님은 철저한 복음주의자였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트럼프가 당선되는 데 복음주의 진영의 도움이 컸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하지만, 미국 이익 우선주의를 거침없이 내세운 트럼프의 정책이나 마음가짐이 얼마나 복음적인가를 생각해 보면,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세계 최대의 강국 대통령이 표방하고 있는 것이 세계 전부가 아닌 미국, 그것도 미국인 일부의 이익이라는 사실, 그런 입장을 가진 인물이 공적인 권력을 갖도록 복음주의 진영이 도움을 줬다는 사실… 마음이 착잡해집니다. 진정 복음이, 교회가 모든 이의 소망이 되고, 모든 어두운 곳에 빛이 되는 시대는 끝이 난 것입니까?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는 이유

이런 암울한 상황들은 무엇 때문일까요? 도대체 우리 인간이 어디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세상 사람들 문제는 차치하고, 우리 믿는 이들 문제부터 생각해 봅시다. 이 시대에 교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은 우리를 빛이요 소금이라고 하셨는데, 우리 즉 교회가 어두운 곳에 빛이 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패해 가는 곳, 제 맛을 잃어 가는 곳에 소금이 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 이유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골똘히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느덧 제 나이와 경력이 저를 비판자의 자리가 아니라 비판받는 자의 자리에 서게 합니다. 잘못되어 가는 사회와 교회에 대해서 이렇고 저렇고 비판할 입장이 아니라 그렇게 잘못되게 한 것에 대해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책임질 뿐만 아니라 대책을 내어놓고 실천으로 본을 보여야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절실하게 잘못의 원인과 대책을 찾아보았습니다. 결론은 '꿈'입니다. 이 시대에 교회가 잘못된 길로 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꿈을 잃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기에 치유책은 바로 꿈을 되찾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적인 꿈을 되찾아야 합니다.

옛날 선원들은 깜깜한 밤에 항해할 때 북극성을 의지했습니다. 주위가 깜깜할수록 별을 바라보고 길을 바로잡았습니다. 목적지에 제대로 도달하기 위해 별을 바라본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별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꿈입니다. 꿈이 있으면 유혹이 있고 시련이 심해도 바른 길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인생 여정에는 꿈이 중요합니다. 세상이 어려울수록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하는 꿈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어떤 꿈을 제시하고 있습니까?

성경 말씀 중에서도 최고의 가치를 가진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거나 예수님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얘기하는 꿈 중에 예수님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꿈이 무엇입니까? 구약에서 하나, 신약에서 하나를 뽑아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이룩할 나라

이사야서 11장에 보면 예수님이 오셔서 이룩하시게 될 나라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꿈꿔야 할 나라입니다. 한 번 봉독해 보겠습니다. 1절에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다윗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조상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나서 결실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지칭합니다. 1절 이하의 얘기가 예수님이 오셔서 이룩할 나라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어떤 세계가 펼쳐지느냐, 6절부터 9절까지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리와 어린양이, 표범과 어린 염소가, 어린아이와 독사가 함께 거하는데, 해함도 없고 상함도 없다. 예수님이 오시면 그런 나라가 이루어진다. 얼마나 감격적인 말씀입니까?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이러한 나라를 꿈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누가 이리이고 누가 어린양입니까? 최근 몇 년간 발생한 세계적인 사건을 주목하면, 잔혹한 전쟁과 테러를 일삼는 IS가 이리라는 점에 쉽게 동의하실 것입니다. 물론 어린양들은 테러를 당하는 사람들, 특히 서양인들이겠지요.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IS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미국인, 러시아인, 프랑스인들이 IS를 척결하겠다고 폭탄을 쏟아붓습니다. 군인들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 민간인들도 죽습니다. 어린이, 여인, 노인 구분이 없습니다. 이들에게는 무고한 사람들을 폭탄을 퍼부어 마구 죽이는 미국인, 프랑스인, 러시아인들이 이리입니다. 설사 서방의 폭격을 받더라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IS 군인들이 죽었다고 해도, 그들은 누군가의 아들이요 아버지요 남편입니다. 자기 아들이, 자기 아버지가, 자기 남편이 갈기갈기 찢겨져 죽어 있는 모습을 보는 가족들에게는 서양인들이 이리입니다.

나아가, 폭탄을 쏟아붓는 이유가 그토록 많은 것을 가진 서양인들이 국제정치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그래서 더욱 더 큰 경제적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IS 사람들이 알게 되면 누구를 이리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무참한 살상을 서슴지 않는 이유가 결국 서양인들의 엄청난 탐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서양인들, 즉 이리들에게 분노합니다. 원수를 갚기 위해서,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리고 탐욕스런 이리들과 맞서기 위해서 그들은 오늘도 기꺼이 테러리스트가 됩니다. 서양인들은 그들을 테러리스트라고 부르지만, 그들은 자신들을 성전(거룩한 전쟁)의 진정한 용사라고 부릅니다. 자, 누가 이리이고 누가 어린양입니까?

이런 모순적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도대체 어떻게 이러한 비극을 멈출 수 있습니까? 방법은 성경적인 꿈을 꾸는 것입니다.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거하는데, 서로 상함도 해함도 없는 나라를 꿈꿔야 합니다. 예수님이 역사하시면 그런 나라가 온다고 이사야는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예언을 믿고 그 소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각자의 꿈이 무엇입니까? 교회의 꿈이 무엇입니까? 꿈이 있다면, 우리의 꿈들이 이사야의 예언과 연결되어 있는가 점검해 봐야 합니다. 연결이 부실하다면, 지금이라도 연결시키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꿈이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어 있습니까?

신약에서 꿈을 하나만 소개한다면, 요한계시록 21장 4절을 꼽을 수 있습니다.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 구절 또한 예수님이 역사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꿈꿔야 하는 세상은 주님께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는 세상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손이 눈물을 닦아 주시는 주님의 손이 되는 세상이어야 합니다.

지상 첫 교회의 모습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리와 양이 해함도 상함도 없이 함께 평안히 거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모든 눈물을 닦아 줄 수 있겠습니까? 그 해답이 오늘 본문에 명확히 나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세상에 처음 생긴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 첫 교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먼저 성도 여러분께서 각자가 한 번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자 제자들은 성령을 기다리라는 예수님의 분부대로 열심히 기도하며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열흘이 지나 오순절 날이 임했을 때 예수님의 약속대로 성령이 강림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자 제자들이 방언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성령강림과 방언은 지상 첫 교회의 핵심적인 특징입니다.

방언이 무엇입니까? 성경에는 두 종류의 방언이 나옵니다. 하나는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방언입니다. 이 방언은 세상 말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세상에서 실지로 쓰이는 말이 아닙니다. 방언하는 사람조차 자기가 무엇을 말하는지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만 그것을 아십니다.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고 방언하지만 하나님과 소통이 되어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입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방언이라고 하면 이 방언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방언은 이런 종류가 아닙니다. 배우지 않았는데 진짜 외국 말을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6-8절을 읽겠습니다.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신적인 능력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서로 말을 몰라 소통할 수 없는 사람들이 소통하게 되었습니다. 서로 얘기가 통할 수 없는 사람들이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그들의 마음에 와 닿는 말을 합니다. 전혀 소통이 안 되던 사람들이 가슴으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그런 말을 합니다. 마치 이리가 어린양의 말을 한 것입니다. 어린양이 이리의 말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이 임하셔서 하신 일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내 생각' '내 감각'에 사로잡혀 남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내 말'만 하던 사람이 내 말이 아니라 '남의 말'로 '남의 생각', '남의 마음'에 감동이 되는 말을 하게 됩니다. 이게 지상 첫 교회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지상 첫 교회 방언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입니까? 11절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제자들은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큰 일은 무엇인가요? 인간이 죄악에 깊이 빠져 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 일입니다. 인간의 모든 죗값을 성자 하나님이 죽으심으로 대신 치르시고 인간에게 생명과 자유를 주신 일입니다. 그리하여 이리도 어린양도, 표범도 어린 염소도 해함도 상함도 없이 평안 속에 살게 된다는 소식입니다.

교회의 역할 중에 가장 중요하고 고귀한 역할은 방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연결되어 2장 마지막에 나오는 처음 교회의 모습을 보시겠습니다. 2:42-47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지상 첫 교회는 성령님께서 임하셔서 성도들 간에 서로 마음을 헤아리는 남의 언어로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이 키포인트입니다. 서로의 마음에 와 닿는 말을 할 수 있었기에 서로 기쁘게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였습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서로의 마음을 읽으며, 방언의 말만 한 것이 아니고 방언의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찬송이 절로 나왔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을 칭송했습니다. 그리고 기꺼이 성도의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이게 교회의 원래 모습입니다.

하나님나라를 꿈꿔라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나라를 꿈꿔라. 성령을 사모하라. 방언을 사모하라. 방언하는 세상엔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거해도 서로 해함도 상함도 없으리라. 모든 눈에서 눈물이 닦아지리라. 이 땅에 임하신 하나님나라를 맛보게 되리라."

지금으로부터 2년 전, 2014년 12월 15일, 호주 시드니 도심 카페에서 벌어진 인질극 사건 기억하시지요? 만 하론 모니스라는 이란계 무슬림이 카페 손님과 종업원 40여 명을 사로잡고 인질극을 벌였습니다. 인질이었다가 처음 탈출한 네 명 중에 한 사람이 한국인이어서 우리들이 주목했던 사건입니다.

인질극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이슬람과 무슬림(이슬람교인)에 대한 여론이 급격히 나빠졌습니다. "역시 이슬람은 안 돼." "무슬림은 잠정적 테러분자야." 호주만이 아니라 온 세계가 무슬림들의 테러에 공포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공포는 증오로 변해 갔습니다. 그때 레이첼 제이콥스라는 호주 여인이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나는 인질극이 벌어진 다음 날 기차를 탔다. 마침 옆자리에 무슬림 여성이 앉았다. 그 여인은 주위의 시선을 의식한 듯, 머리에 두르고 있던 히잡(머리 스카프)을 조용히 벗었다. 나는 그가 내릴 때 같이 내려 그 여성을 따라갔다. 그리고 가까이 가서 이렇게 말했다. '다시 쓰세요. 제가 당신과 같이 걸어갈게요.' 내 말을 들은 무슬림 여성은 울음을 터뜨리며 나를 끌어안았다."

얼마나 주위 시선을 따갑게 느꼈으면, 자기 신앙의 상징인 히잡을 벗었을까요? 얼마나 압박감과 공포를 느꼈으면, 처음 보는 사람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을까요?

이 글은 본 또 다른 시드니 여성이 자신의 트위터에 레이첼의 페이스북 이야기를 전하면서,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당신이 정기적으로 마르틴 플레이스에서 373번 버스를 탄다면, 그리고 당신이 종교적인 옷차림을 하고 있다면, 외롭다고 느끼지 마세요. 내가 당신과 함께 탈게요(I'll ride with you)"라고 썼습니다. 그 후 "내가 당신과 함께 탈게요."(I'll ride with you)라는 해시태그(주제어)가 온 세계에 삽시간에 퍼졌습니다. 그로 인해 온 세계 사람들이 처음과는 다른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극소수의 테러리스트와 대다수의 무슬림을 구분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야." "무슬림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선량하고 마음이 아름다운가." "공포를 증오로 대처하지 말고, 사랑으로 대처하는 길만이 세계 평화를 가져온다."

성도 여러분, 레이첼 제이콥스는 무슬림 여인의 방언으로 그 여인의 마음을 만져 주는 방언을 했습니다. "다시 쓰세요. 제가 당신과 동행해 드릴게요." 그 방언으로 무슬림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습니다. 그 방언으로 온 세계에서 증오의 찬 기운을 몰아내고 사랑의 불꽃을 다시 피워 냈습니다.

저는 레이첼이 기독교인인가를 알아보려고 노력했지만,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기독교인이었다면, 정말 성령받은 것입니다. 그가 기독교인이 아니었다면, 기독교인들은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도 방언을 하여 사랑을 전하는데,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기독교인들이 뒤처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방언의 원조

이 세상에서 방언의 원조를 알고 계십니까? 그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자신의 말을 버리고 철저히 방언만 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유대인의 말만 하면서 사셨습니다. 원래 예수님의 말은 유대인의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나라에서 성부, 성자, 성령님이 유대인 말을 하셨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 마음을 헤아리시고 우리 마음을 울리는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 인간으로까지 태어나셨습니다. 아기가 되셔서 엄마, 아빠, 맘마라는 말부터 배우셨습니다. 배고프다는 말을 배우시려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힘들다는 말을 배우시려 노동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온 삶으로 배우신 말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풀어 주셨습니다. 언어만이 아니라 온 삶이 "말씀"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태초부터 그런 사랑의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예수 곧 성자 하나님입니다.

방언하는 사람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다

교회는 방언의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하고, 세상을 향해서 예수님처럼 방언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첫 교회는 탄생과 동시에 방언 선교를 감당했습니다. 교회는 지상 첫 교회부터 성령과 방언과 선교가 동시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는 바벨탑의 저주를 풀어 갑니다. 이것이 교회의 원래 모습입니다.

이리에게 성령이 임하면 어떻게 될까요? 어린양에게 성령이 임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리가 어린양의 방언으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어린양아, 많이 무섭지? 내가 네 맘 다 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 난 널 절대로 잡아먹지 않을 거야. 내가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이리는 어린양이 평안과 감사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죽어 갈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리의 이러한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죽음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그 죽음이야말로 부활로 가는 대문이었듯이 말입니다.

어린양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이렇게 방언할 것입니다. "이리님, 오랫동안 아무것도 드시지 못했으니 얼마나 배가 고프세요? 내가 다 알고 있어요. 마음 편히 가지시고 저를 잡아먹으세요. 이리님이 기운을 차릴 수 있다면 전 죽어도 괜찮아요." 이 어린양의 죽음도 더 이상 죽음이 아닙니다. 그것을 부활의 여정일 뿐입니다.

십자가는 방언의 꽃
부활은 방언의 열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러한 신비로운 비밀 즉 영생의 비밀을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방언입니다. 극악무도한 사람도 알아들을 수 있는 방언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방언의 꽃이요, 부활은 그 방언의 열매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끔찍한 일, 두려운 일, 증오와 폭력이 난무하는 이 세상이라 할지라도 교회는 성경이 보여 준 꿈을 꿔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방언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방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이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지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나라를 꿈꿔라. 방언을 해라."

하나님, 내 말만 하는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성령님, 내 속에 오셔서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방언을 하게 해 주옵소서. 그리하여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거하는 나라, 그렇지만 다시는 해됨도 상함도 없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옵소서. 오 주님, 우리로 하여금 모든 사람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는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황창선 /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신학과 졸업,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졸업, 장신대 신대원 졸업, 영국 버밍엄대학교 Ph.D 과정(4년) 수학, 전 인도네시아 선교사(예장통합), 전 싱가폴한인교회 담임목사, 현재 안식년 중인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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