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나쁜 하나님' 소개의 말

오늘의 한국교회는 정치적 타락, 종교적 부패, 신학의 허약함으로 인해 파산 직전에 몰려 있습니다. 이는 명백히 신학, 신앙, 교회의 위기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 너머에 치유를 위한 열망 또한 숨 쉬고 있음을 부정해선 안 될 것입니다.

치유와 소생의 가능성을 경험하기 위해 오늘의 한국교회를 지배한 기복과 왜곡된 순수의 풍경을 동시에 전망하는 문학적 시도는 어쩌면 필연이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이러한 시도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교회의 본령을 회복하는 사상적, 신학적 갱신 의지와 흐름을 같이한다고 확신합니다. <뉴스앤조이> 연재 소설 '나쁜 하나님'은 한국교회의 궤멸적 징후를 극사실적으로 해부하고 그 너머의 희망, 치유, 소망의 가능성을 함께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 소설가 주원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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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규는 쉬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당연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래도 누적된 피로를 생각하면 의외로 잠이 금방 찾아올 거란 기대도 있었다. 뉴욕에서 14시간의 비행시간 동안 수면용 안대를 착용하고도 잠을 한숨도 이루지 못했다. 거기에 누적되는 시차 부적응까지 겹쳐 자신에게 마련된 사택에 도착하기만 하면 곯아떨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민규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킹사이즈를 떠올리게 하는 대형 침대에 홀로 누워 커튼을 걷고 율주시를 넘어서서 경북 일대의 풍경과 산야가 검은 실루엣을 그리는 창밖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전혀 눈이 감기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정신은 더 또렷하고 분명하게 살아 올랐다. 잡다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한국으로의 귀향에서 오는 설렘이나 기대보다는 막연한 불안과 우려 섞인 미래에 대한 걱정이 민규를 잠들지 못하게 했다.

그래도 시간은 지나갔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들, 우려 가득한 마음의 편린이 복잡하게 떠돌았지만 그래도 어김없이 시간은 밤을 향해 움직였다. 이른 새벽 시간대로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민규의 눈도 감기기 시작했다. 민규는 이대로라면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을 거란 기대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분명 깊이 잠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나지막이 울리는 백색 시트 위에서의 스마트폰 진동음에 침대에 누워 있던 민규의 온몸이 반응했다. 기다렸다는 듯 진동음에 따라 벌떡 몸을 일으킨 민규가 발신자 번호를 확인했다. 낯선 번호, 저장된 적이 없는 번호였다.

상체를 일으킨 민규는 어둑하고 휑하게 텅 비어 있는 방 안, 침대 위에서 규칙적으로 울리기 시작하는 스마트폰 액정 속 번호를 집요할 만큼 예민하게 바라봤다. 그리고 어서 빨리 진동이 끝나길 기다렸다. 지금 민규에게 누군가 전화를 걸어 올 사람이 있을까. 민규는 전화를 걸어 오는 사람이 있어선 안 된다고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자신의 한국행을 기뻐하며 눈물을 글썽이던 사람은 단 한 사람, 병약해진 그의 홀어머니뿐이었다. 뉴욕한인교회에서 담임목사인 아들이 벌인 스캔들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없는 민규의 어머니 양선희 권사는 아들의 급작스런 담임목사직 사퇴가 전혀 이해할 수 없었고, 그만큼 애통해했다. 그러던 차에 자신의 정신적 고향이기도 한 율주제일교회로 아들이 전격 청빙되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양권사는 그동안의 설움과 이해할 수 없는 수난을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신다고 믿게 되었다. 하지만 민규는 그런 어머니에게조차 자신이 언제 한국으로 들어온다는 이야기조차 하기 힘들었다. 그랬기에 자신의 한국행에 관한 정확한 날짜를 아는 이들은 적어도 뉴욕에서는 아무도 없을 거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미국에서 갖고 온 전화에서 걸려 오는 전화를 민규는 받지 않아도 될 것으로 여겼다.

쉽게 멈추지 않던 진동음이 잠시 가라앉았다. 민규는 새벽에 잘못 걸려 온 전화일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몸을 뉘었다. 하지만 잠시 후,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몸을 일으킨 민규의 눈에 방금 전과 같은 번호가 보였다.

세 번, 네 번. 생전 처음 보는 번호가 민규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처음엔 대여섯 번 울리다 끊어졌지만 이번엔 달랐다. 전화는 계속해서 울렸고, 번호 역시 계속해서 같은 번호였다. 진동이 멈추지 않고 이어지는 동안 민규의 시선은 문득 창밖을 향했다. 새벽 3시가 넘어가는 시간대의 율주시는 낮에 보았던 번화함 중 그 어느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다만 창밖을 집요하게 밝히는 불빛들은 원자력발전소의 둥근 지붕 위로 솟구쳐 오른 화염을 닮은 방사형으로 뻗어 오르는 검푸른 불꽃이었다. 그 불꽃들이 마치 작은 점묘화처럼 촘촘히 어둠의 율주시를 수놓았다.

결국 민규가 전화를 받았다. 낯선 이의 번호가 혹여 고동식의 전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 여보세요.

낮게 깔린, 경계심 강한 목소리로 대응한 민규의 예상과 다르게 상대는 침묵했다. 잘못 걸려 온 전화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민규가 재차 물었다.

- 누구세요?

- 저예요. 목사님.

목소리의 주인공은 익숙한, 하지만 듣는 순간 민규의 온몸에 소름을 일으키게 했다. 젊지도, 나이 들지도 않은 중년 여성의 목소리였다. 민규는 그녀가 누구인지, 그 단 세 낱말만으로 정확히 기억해 냈다. 김, 연, 주. 그녀는 김연주였다. 뉴욕한인교회 성가대 객원 반주자 피아니스트 김연주.

이번에는 민규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민규의 침묵에 스며들지 않겠다는 듯 김연주가 말을 걸었다.

- 저예요. 연주. 저. 기억하시죠?

그녀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순간, 민규의 마음에서는 어쩔 수 없는 울분과 격동이 일었다. 그때 문득 민규는 침실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자신의 얼굴과 조응하는 순간, 낯설고 충격적이었던,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얼굴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통화 속 상대, 연주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 왜 한국에 가신다는 말씀, 하지 않으셨어요. 제가 모를 줄 아셨어요?

-  ……

- 그래도 전화는 받으시네요. 목사님은 정말… 아니, 민규 씨. 당신이란 사람은…

- 그만하지.

- 예?

- 이제 그만해도 되잖아.

말을 이어 가는 민규의 목소리가 점점 떨렸다. 흥분이 쉬 가라앉지 않았다. 하지만 연주 역시 민규의 격정적인 떨림과 그 흥분을 함께했다.

- 그만하고 싶은 건 정말 제가 원하는 바예요. 하지만 멈추지 않았던 건 민규 씨. 당신이잖아요.

- 제발 그 민규 씨란 말, 집어치워!

창가에 비친 민규의 얼굴이 점점 더 험악하게 일그러져 갔다. 화를 내고 치를 떠는 자신과 조우할수록 민규는 스스로 괴로워 견디기 힘들어했다. 민규가 스스로 흥분을 가라앉힌 뒤 조용하고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 미안해. 소리 질러서.

- 저도 미안해요. 하지만 목사님.

- ……

- 보고 싶어요. 목사님.

- ……

- 목사님. 저 사랑한다고 하셨잖아요. 목사님… 제발요…

(계속)

*'나쁜 하나님'은 주 3일(월, 수, 금) 업데이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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