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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 톨스토이, 교회와 국가를 부정하다
톨스토이의 영적 위기와 회심(2)…"나는 진리를 사랑한다, 사람들은 왜…"
  • 천정근 (yasnayapalanya@gmail.com)
  • 승인 2017.02.17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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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개혁을 외친 급진적인 기독교 사상가이기도 합니다. <뉴스앤조이>는 모스크바국립대학과 동 대학원에서 19세기 러시아문학을 전공한 자유인교회 천정근 목사로부터 톨스토이의 신앙관과 삶을 정리하는 글을 받아 두 차례 나눠 싣습니다. (이전 글 바로 가기- 편집자 주

오래 준비된 위기 3
- 전쟁과 평화

그는 귀족 사회에서 영웅 대접을 받았지만 상류사회의 위선과 사교계의 허영에 환멸을 느끼고 고향에 돌아가 영지 경영과 교육 사업에 몰두했다. 이 시기에 쓴 단편적인 작품들은 계몽가로서 작가의 희망과 좌절을 그리고 있다. 그는 농민 학교를 열어 빈곤층의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친히 <АЗБУКА(아즈부카)>라는 러시아어 초급 교과서를 집필했고(이건 오늘날에도 사용된다), 유럽의 교육 체제를 견학하기 위해 1857년(29세) 유럽 여행을 가기도 했다. 이 시기 그는 서구적 진보라는 것을 믿었고, 자신이 러시아 민중들의 교육과 계몽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사명감과 열의가 대단했다. 이것은 그가 당시 러시아의 지식인 사회를 지배하던 서구주의와 나로드니키 사상에 공명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기대를 품었던 유럽 여행에서 그는 상징적인 한 사건을 만난다. 파리에서 본 기요틴 처형 장면이었다. 길거리 단두대에서 흉악범으로 알려진 죄수의 목을 자르는 장면을 보고 그는 신의 통치(신앙심)를 상실해 버린 인본주의의 극단을 발견하고 서구적 현대 문명에 회의를 품게 된다. 이 끔찍한 폭력이 제도로 정비된 국가의 이름으로, 정의의 이름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 그는 진보라 불리는 서구 사회가 실제로는 폭력의 공포에 의해 지배되는 비인간적 실체임을 깨닫게 된다. "단두대는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하고 자꾸 떠오른다"고 그는 썼다. 이 사건을 통해 톨스토이는 서유럽 문명에 회의를 느끼고 러시아의 미래상은 서구적 모델을 좇는 것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톨스토이가 집필한 러시아어 교과서 아즈부카.

이 무렵 그는 최초로 아나키즘 이론가인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 1809년~1865년)의 저서를 접하게 된다. 그는 "모든 정부는 선과 악의 정도에 있어서 똑같다. 보다 나은 이상은 아나키이다"라고 쓴다. 1861년 서구의 교육가들을 만나러 갔던 두 번째 유럽행에서 프루동을 만났다. 이 만남이 그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곧 프루동의 저서 <소유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소유는 절도(竊盜)다"라는 명제가 귀족이자 대토지 소유자로서 톨스토이 자신의 경제적 도덕적 고뇌와 사유의 화두로 등장했던 것이다. 톨스토이의 타고난 비타협성과 양심적 정직성은 이 문제에서 생의 끝까지 그를 자유롭게 놔주지 않았다. 그는 이 문구를 '진리(眞理)'라고 썼다. 진리가 실현되는 농민적 공동체의 이상향을 찾으려 했다. 그는 마침내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러시아의 전 세계적 민족적 과제는 토지 소유 없이 사회를 조직할 수 있다는 사상을 세상에 내놓는 데 있다." "러시아혁명은 차르와 전제주의에 맞서지 않고 토지 소유에 대항할 것이다." 그에게 있어 아직 국가는 거부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교육과 계몽 사업을 벌이면서 동시에 그는 개인적인 죽음의 공포와 초조감, 무의미성, 거기서 나오는 방탕과 육욕의 유혹을 극복하지 못했다. 방탕에 빠졌다가 반성하기를 거듭했다. 철저한 금욕의 계획을 세웠다가 일주일 만에 완전히 망가지기도 했다. 도덕주의적 이상과 방탕한 육욕의 극단적인 생활은 그를 심각한 정신적 공황 상태에 자주 빠지게 했다. 곧 자신이 추구하려는 모든 중대한 인생의 의미는 사실상 명백한 죽음 앞에서 아무런 효력도 가지지 못하는 발버둥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이 공허가 다시 그를 방탕에 빠지게 했고, 방탕이 다시 그를 절망시켰다. 그는 34세 때 18세였던 소피아 안드레예브나 베르스와 결혼함으로써 일시적 안정을 찾는다.

톨스토이 저택 본관.
톨스토이의 일기.

1863년부터 1869년까지 톨스토이는 나폴레옹 침략과 함께 철학적 내용이 가득 담긴 장편 소설 <전쟁과 평화>를 썼다. 이 대작에 피력된 작가의 세계관은 모든 존재의 존재하는 맹목적 법칙이 이끌고 있는 생활(생명)에 대한 낙관적인 긍정이다. '무수한 온갖 현상'의 살아 있는 생활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전쟁과 평화>의 예술적 철학적 과제였고 그의 저작 가운데 가장 생을 긍정하는 건강한 작품이 되게 했다. <전쟁과 평화>는 영원히 운동하고 발전하는 인간의 생활은 그 무엇에 의해서도 절멸될 수 없다는 강력한 주제를 환기시킨다. 그러나 모든 생활이 다 긍정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생활은 '단순함', '선함', '아름다움'이라는 자연 상태와 같은 이상에 따르는 생활이라고 그는 역설한다. 그는 이러한 이상을 이해시키고 실현하기 위해 작품에서 자연과 생의 긍정에 일체화된(되어 가는) 주인공들을 등장시키는 동시에 '환영'에 몸부림치는 허위의 부자연스러운 생활을 살아가는 주인공들을 대립시킨다(이러한 대립은 그의 모든 작품에 재연된다). 이 소설에 반영되고 있는 철학과 역사에 대한 기본적인 관점은 몇몇 정치적 사회적 권력자가 아닌 민중을 역사적 사건을 완성해가는 근원적 기초로 인정하고 있는 점이다. 톨스토이는 특히 나폴레옹과 같은 민중과 철저히 고립된 권력자의 소망이나 비전이 인류 역사 발전의 지도력이라고 보는 역사가들의 견해를 거부하고 통렬히 비웃었다.

"어느 정도는 미지이고, 어느 정도는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그러한 사건을 지배하는 법칙이 있다. 우리가 한 개인의 의지 속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는 생각을 깨끗이 단념할 때 비로소 이러한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지구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생각을 단념할 때 비로소 혹성의 운동 법칙을 발견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여기에서 이미 자기를 부인한 공적 생에 관한 영적 자각으로서의 종교적 인식이 발견된다. 그 종교적 진리는 신비주의와 교의신학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역사와 삶의 합리적인 과학으로 도출되고 있다. 곧 그가 과학으로서의 역사 앞에 제기하려 한 영적 자각은 여러 모순에 가득한 삶의 끝없는 원인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하나의 일관되고 통일된 법칙을 탐구하는 것이었다. 그의 내면에서는 그 모든 회의와 부정을 하나의 완결된 긍정으로 조화시키려는 분투와 노력이 끝없이 이어졌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전쟁과 평화>에서 그토록 강력하게 피력한 이 모든 생의 긍정을 다시 완전히 부정하게 된다. 부정을 통해 마침내 진리의 긍정에 도달하게 된다. 그 과정은 극적이고도 치열한 반전이었다.

오래 준비된 위기 4
- 안나 카레니나

소피아 안드레예브나 회고록에 따르면 톨스토이는 1869년 <전쟁과 평화>를 완성한 후 정신적 휴식을 가지려 펜자 지방에 어떤 토지를 매입하러 갔었다고 한다. "소유는 절도"라는 명제를 진리라 했고 "러시아혁명은 토지 소유에 대항할 것"이라 천명했던 그였었다. 모순된 삶이 가능했던 마지막 시기였을 것이다. 그 여행이 끝날 무렵, 죽음의 유령이 나타나 그를 노려보는 사건을 겪게 된다. 소냐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몹시 피곤하여 잠자리에 들고 싶었소. 그러나 침대 속에서 편안한 기분을 만끽하던 나는 갑자기 두려움과 공포의 전율에 압도당했소. 이러한 느낌은 이전에 결코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었소."

그는 자신이 묵고 있던 조그만 집의 어둡고 낯선 방에서 무엇인가 두려운 것으로부터 탈출해야만 한다고 느끼면서 깨어났다. 곧이어 자신을 쫓아오는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로부터 필사적으로 달아나면서 복도로 뛰쳐나왔다. 그는 "누구야?" "무엇이 나를 두렵게 하는 거지?"라고 스스로 의문에 찬 말들을 중얼거리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주위에 악의에 찬 어떤 것이 있다고 느꼈다. 그 순간 "나다, 나! 여기 있다" 대답하는 목소리를 그는 들었다. 그것은 '죽음의 소리'였다. 도망칠 수도 도망칠 이유도 도망쳐 봐야 소용도 없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쓰러져 기도로 밤을 지새웠다. 그 다음날까지. 그는 뒤를 돌아보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이 악몽은 지워지지 않고 남은 생애 동안 그를 따라다녔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나는 만족하기 위하여 다시 태어나야 하며,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안나 카레니나>(1873~1877년, 45~49세)를 쓸 때 톨스토이의 정신적 위기는 마침내 폭발한다. 그는 이것을 영적 위기(Духовное кризис)라 불렀다. <안나 카레니나>는 표면적으로 결혼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사실 파탄 나고 있는 현대 세계의 욕망의 현실과 그 말로에 대한 추적이다. 안나와 같이 인습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열정, 귀족 사회의 다양한 욕망들, 귀족 사회를 대표로 하는 이 세상의 물질적 지배 질서, 원리와 윤리의 모순, 그 거짓된 추구의 끝은 어디인가? 안나는 가슴속 열정이 이끄는 사랑을 믿고 과감하게 봉건적인 가정을 버리지만 모든 것을 걸었던 브론스키의 애정이 식어 버리자 절망해서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소피아 안드레예브나의 일기에는 톨스토이는 정말 이를 갈면서 이 작품을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작품이란 처음부터 여주인공이 철로에 뛰어들어 자살함으로써 끝나게 되는 결말이 정해진 이야기였다. 예술가에서 영성가로 변모하려는 톨스토이의 마지막 처절한 사투가 계속됐다. 이 둘은 서로를 인정할 수 없었다. 서로를 적대했다. 모든 윤리적 모순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오로지 진리에 따르는 순종 이외에는 그 어떤 결론도 결코 화해에 이르게 할 수 없는 영적 전투였다. 모든 집안일은 부인의 몫이었고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절망과 좌절이 그를 사로잡았고 죽음의 위기가 항상적으로 그를 따라다녔다. 겉으로는 위엄 있고 명성 있는 삶이었지만 위기가 찾아오면 어린아이처럼 울부짖으며 기도를 했다. 위기가 지나가면 다시 통렬하고 지독하게 신을 부정하게 되는 일이 반복됐다. 비록 <안나 카레니나>에서 또 다른 주인공 레빈과 키치를 통해 그 자신과 아내의 삶에 깃든 희망을 피력했지만, 실제론 그것마저 아름답게 꾸민 위선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토록 괴로워하는지, 부인과 가족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이대로는 더 이상 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 상태로는 죽을 수도 없는. 세계의 고통을 혼자 짊어졌으나 고작 자기 몸 하나의 고통에 지나지 않을 뿐인 몸부림. 오늘날까지 톨스토이의 괴로움을 이해할 사람이 얼마나 될지 의심스럽다.

<안나 카레니나>의 서문에는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로마서 12:19)라는 성경 구절이 인용되어 있다. 신명기 32:25에 나오는 "보수는 내 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때에 갚으리로다. 그들의 환난의 날이 가까우니 당할 그 일이 속히 임하리로다"가 원출처이다. 표면적으로 이 성구는 안나의 부정에 대한 심판은 신에게만 속해 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다시 여러 층위로 신의 심판에 대한 강력한 절대 언어를 일깨워 준다. 오로지 신의 심판 앞으로 다가갈 뿐인 우리의 이 모든 무의미한 현실은 어떤 죄에 의한 '신의 원수 갚음'일까?

톨스토이 저서들.

진리를 위해
교회와 국가를
부정하다

"나의 생활은 정지되었다. 진리를 알려는 소망조차도 가질 수 없었다. 나는 진리가 무엇이라는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리란 바로 이것이었다. 즉 '인생은 무의미하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의 앞길에는 멸망 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자신의 앞길에 고통과 진정한 죽음밖에 없다는 것을, 즉 완전한 멸망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가릴 수도 없었다. 그러나 나 자신이 자살을 원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없다. 삶을 두려워하고 삶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죽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자기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나는 교활한 자기기만의 수단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나의 생애는 마치 심술궂은 누군가에 의하여 우롱당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에는 과거나 현재 그리고 미래를 통하여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마치 바보처럼 그 마루턱에서 서 있는 나의 모습을 누군가가 어느 한구석에서 응시하면서 즐기고 있는 듯한 상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내 생애 전체에 대하여나 그 어떤 행위에 대해서도 나는 결코 합리적인 의의를 부여할 수는 없었다. 분명히 드러난 것은 오늘 아니면 내일, 질병이나 죽음이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나 혹은 나에게 습격해 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부패하는 악취와 구더기밖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나의 행동은 그것이 어떠한 성질의 것이라도 조만간에 모두 잊어버리게 될 것이며, 따라서 나라는 존재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바득바득 애를 쓰며 살아야 한단 말인가? 어찌하여 사람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외면하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그야말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삶에 도취해 있는 동안만은 우리는 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도취에서 깨어나는 순간 그것은 모두 기만이며 어리석은 미망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시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생각해 볼 때 인생에는 재미있는 것도 우스운 것도 있을 수 없다. 오직 참혹함과 어리석음만이 가득 차 있을 뿐이다." (<참회록>, 1879)

1870년대 후반 특히 1879년~1881년의 혁명적 정세를 전후한 시기에 톨스토이는 사회문제에 활발한 관심을 가졌다. 동시에 이 무렵 그와 그의 작품은 긴장된 종교적 탐구에 몰두해 있었다. 모순인 듯하지만 그에게 이 두 가지는 하나를 잡아당기면 나머지가 딸려 오는 하나의 주제였다. 종교적 탐구는 사회적 윤리의 실천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기독교는 물론 불교와 동양 사상 이슬람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종교적 저작들을 탐독했고 구원의 진리를 모색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적인 사회제도 속에 구현되어야만 했다. 아니 그 구현을 위해 싸우는 과정 속에 구원의 증거가 들어 있었다. 이 진리를 위한 종말론적인 마지막 투쟁이 톨스토이의 세계관에 급진적이고 전격적인 최후의 전환을 가져왔다. 곧 일체의 모순된 허위의 긍정을 부정함으로써, 그 죽음을 통과함으로써, 새로운 생의 가능성에 돌입하게 되는 영적 회심이었다. 그는 이를 통해 오래 준비된 '영적 위기'를 돌파했다. 마침내 정신적 안정을 찾게 되었다. 그것은 양심과 무의식의 도덕적 '부활(Воскресенье, 갱생)'이었으며 동시에 그가 태어나고 자라난 귀족 사회의 견해와 결정적 절연이었다.

특기할 것은 그 과정이 처음에는 유년 시절의 정교회로 돌아갔다가 곧 교의신학과 제도적 교회로부터 벗어났다는 점이다. 이 점이 기독교 역사에서도 매우 희귀하고 특이한 톨스토이만의 회심 사례이다. 그에게 신비주의적이고 영성적인 정교회의 오랜 유산은 허무맹랑하고 불필요한 허례허식에 불과했다. 1899년 71세에 발표된 최후의 장편 <부활>은 그의 종교 윤리적 최후의 사상과 그 실현 방법이 집대성된 작품이다. <부활(復活)>(정확하게 번역하려면 <갱생(更生)>이 되어야 한다)은 경찰과 사법제도, 감옥과 유형, 사형제 등 국가에 대한 해부와 비판과 더불어 그 세속 권력과 한패가 돼 버린 교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도 한 주제를 이루고 있다. 이 모든 모순과 부패가 점증하며 임박해 오는 혁명에 대한 종말론적 묵시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이 작품의 여파로 1901년 정부의 어용 기관인 러시아정교회 종무원(宗務院)으로부터 '사이비 교주(лжеучитель)'로 파문을 당한다.

"새로이 거짓 설교자 톨스토이 백작이 나타났다. 세계가 다 아는 작가이자, 러시아에서 태어나 정교 신자로 세례와 교육을 받은 톨스토이 백작은 자신의 오만한 이성에 유혹되어 대담하게도 신과 그의 아들 예수, 그 신성에 거역하고, 자신을 먹이고 키워 준 어머니 정교회를 모두 앞에서 명백하게 버렸으며, 신이 주신 재능을 예수와 교회에 대적하는 가르침을 민중에 퍼트리고, 조국의 신앙, 정교회의 신앙을 파괴하는 데 다 바쳤다. 광신자의 질투심으로 그는 정교회의 모든 교리를 전복하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 자체를 전복할 것을 설교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회개하고, 교회와의 교제를 회복하지 않는 한, 교회는 그를 자신의 일원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간주할 수 없다." (<Синод>, 1901)

톨스토이는 <종무원에 보내는 답변>에서 자신이 지상 유일의 정통 교회라 자랑하는 교회를 버렸음을 시인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거역해서 버린 것이 아니라 영혼의 온 힘을 다해 그를 섬기기 위해 버렸다고 답변했다. 그는 "교회의 가르침은 이론적으로는 교활하고 해로운 거짓이며 실천적으로는 기독교 가르침의 모든 의미를 완전히 가리는 가장 천한 미신과 속임수의 조합"이라고 비판했다. 톨스토이는 정말 신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가 신비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말들의 종교적 기만을 폭로할 의무라고 썼다. 만일 예수가 이 땅에 나타나 자기 이름으로 행해지는 이 모든 사기와 협잡을 목도한다면 마땅히 큰 분노로 모든 것을 내던져 버릴 것이라고. 그러나 톨스토이는 그리스도의 단순한 진리가 이렇게 심각하게 왜곡되는 최종적 원인은 교회가 아니라 국가라고 보았다. 국가와 종교가 한통속이 되었고 국가가 교회를 조정하고 있으며 교회가 국가를 정당화해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톨스토이 80세 생일 기념사진, 아내 소피아와 함께.

"나는 진리를 사랑한다,
사람들은 왜…"

80세(1908년) 때 알렉산드르 황제에 대한 암살 기도 사건이 벌어졌다. 톨스토이는 황제에게 사형을 철회하고 테러분자들보다 더 높은 도덕성을 보여 줄 것을 촉구했다. <폭력의 법칙과 사랑의 법칙>, <나는 침묵할 수 없다>를 써서 사형 반대를 주장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81세(1909년) 톨스토이는 러시아에 혁명이 임박해 옴을 예견하는 <불가피한 혁명>을 썼다. 82세(1910년) 7월 22일 일체의 저작권을 포기하는 최후의 정식 유언장을 만들었고, 10월 28일 새벽, 아내 소피아 안드레예브나에게 최후의 편지를 써 놓고 의사이자 비서 마코비츠키와 가출한다.

톨스토이가 가출한 직접적 원인은 아내가 그의 방에 몰래 들어와 모든 저작권을 포기하는 유언장을 훔치려 했기 때문이었다. "소유는 절도다"라는 진리는 최후까지도 그에게 처음과 같은 절망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톨스톨이는 자신이 야스나야폴랴나를 떠나야 이 싸움이 끝나리라고 생각했다. 10월 26~29일 최후의 저작인 <유효한 수단>을 썼고, 여동생이 사는 수도원을 방문했다. 10월 31일 여행 도중 병이 위중해져 랴잔의 간이역 아스타포보에 다다르자 기차에서 내렸다. 11월 7일(신력 20일) 오전 6시 5분 역장의 집에서 톨스토이는 최후의 눈을 감았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나는 진리를 사랑한다, 사람들은 왜…"이었다고 한다.

톨스토이 마지막 모습.

톨스토이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야스나야폴랴나의 한가로운 숲길에 묻혔다. 그곳은 그가 어린 시절 놀던 숲으로, 그의 형이 이야기해 준 사연이 깃든 곳이다. 이 세상에는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마법의 푸른 지팡이가 있는 데, 그 지팡이는 야스나야폴랴나의 골짜기에 묻혀 있다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그는 스스로 그 마법의 지팡이를 만들어 훗날 자신이 묻힐 자리에 묻어 놓았었다.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마법의 푸른 지팡이. 지금 세계는 다시 톨스토이를 그리워하고 있다. 흐르는 강물처럼.(끝)

천정근 / 열린 교제와 깊이 있는 말씀의 공동체를 지향하며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에 주력하는 자유인교회 목사. 산문집 <연민이 없다는 것>(케포이북스, 2013), 설교집 <고뇌가 없다는 것>(포이에마, 2016) 저술. 모스크바국립대학과 동 대학원에서 19세기 러시아문학을 전공하고,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목회학 석사(M.div.) 과정을 졸업했으며, 한독선연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논문으로 <1880~1890년대 톨스토이 중편에 나타난 종교 윤리적 관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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